[매거진 esc] 허지웅의 설거지
“스트레스 안 받는 데 필요한 건 망각·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
“스트레스 안 받는 데 필요한 건 망각·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
픽사베이
하나둘 떠올려보았다
화가 났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글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건 당시 곽노현 교육감이 상대후보에게 후보 사퇴를 대가로 2억을 주었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곽노현 교육감이 문제의 2억을 두고 “대가성이 없었다”고 말한 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걸 가지고 정말 대가성이 없었다고 편을 드는 나꼼수 팬덤이 가장 문제였다. 안그래도 ‘나꼼수 팬덤은 선거를 앞두고 문제를 야기할 소지가 크다’는 칼럼을 시사인에 썼다가 팬덤과 갈등이 한창이었다. 이걸 문제 없다고 말하는 순간 선거에서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할 중간층은 떠난다. 조바심이 났다.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을 진영의 이름으로 감싸안는 운동은, 언론은, 정당은 필연적으로 망한다. 세상을 간편하게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나누어버리고 무조건 내편 감싸고 보는 진영논리라는 게 얼마나 허무하게 판을 일그러뜨리고 망쳐버리는지에 관해 그때 당시보다 바로 지금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대가성 없는 2억이라는 게 말이 되느냐, 그런 말을 진영논리로 감싸안는 게 정상인가, 나는 2억이면 뭐도 하겠다고 썼다. 결국 남은 건 뒤의 말 뿐이었다. 맥락은 결코 기록되지 않는다. 과격한 말이었다. 어쩌면 과격하고 선정적인 나중의 말만 남은 게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에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찌됐든 이후 나는 140자 단위로 말의 맥락이 절단되어 기록되는 트위터를 가능한 멀리했다. <국제시장>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당시 진중권 교수와 한해 결산 한겨레 대담을 했다. 나는 반성하지 않는 어른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의 지옥도는 외면하고 군사독재 경제개발 신화를 떠올려 자위할 기성세대의 정신승리가 토할 거 같다고 말했다. 이는 TV조선에 의해 “허지웅이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토할 거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고 왜곡되었다. 내가 토할 것 같은 영화라고 말했다며 노이즈 마케팅이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내가 아니라고 해봤자 내가 그랬다는 기사가 하루에 오백개씩 올라오니 이미 난 그렇게 말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어서자 감독은 “허지웅씨 고마워요!”라는 제목으로 인터뷰를 했다. 나는 모 방송사의 출연금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가 경로를 거쳐 팩트를 확인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화가 났다. 그러나 이제 와 떠올려보면 아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감독은 별 악의없이 일종의 화해의 제스쳐로 그렇게 말했을 수 있고 모 방송사는 당시 여러모로 밉보이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쉽게 까먹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까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까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까지 함께 잊어버리기 마련이더라. 그렇게 까먹은 중요한 것들은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반드시 훗날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이해 말이다. 내가 생각한 것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 위해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이마에 땀을 닦아내고 있길래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럴 때는 늘 미안해진다. 스트레스가 모이는 곳이라는 저 뒷목 어딘가가 전혀 아프지 않을 그런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허지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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