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가을, 트렌치코트의 계절이 돌아왔다. 영화 <만추>를 기억하는가. 늦은 가을, 탕웨이의 고독과 쓸쓸함을 극대화해 보여준 건 트렌치코트였다. 클래식한 디자인과 색깔로 아무렇게나 걸쳐도, 장롱 속에 오래 묵힌 뒤 꺼내 입어도 세련되고 우아한 멋을 잃지 않는다. 1914년 군복으로 첫선을 보인 트렌치코트가 시대와 유행에 구애받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유는 정장부터 캐주얼까지 어떤 옷과 같이 입어도 자신만의 개성을 연출할 수 있는 매력 덕분이다.
트렌치코트라고 하면 ‘무릎을 살짝 덮는 베이지색 코트’를 떠올린다. 하지만 올가을 트렌치코트의 무한변신이 펼쳐진다. 발목까지 오는 길이부터 엉덩이를 살짝 덮는 짧은 기장은 물론 넉넉한 핏, 색다른 디자인, 색상과 소재의 특성을 살린 다양한 제품들이 가을 거리를 휩쓸 전망이다. 변신을 꿈꾸는 당신에게 고정관념을 깬 디자인을 소개한다.
정통 트렌치코트는 더블 브레스티드(앞판 양쪽을 넓게 겹쳐 여미는 코트 또는 재킷)에 넓은 옷깃과 벨트, 견장이 특징이다. 지금껏 디자인과 색깔 등에서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이 원형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최근엔 견장과 벨트가 생략되거나 싱글 버튼(단추가 한 줄로 돼 있는 것)을 단 디자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수진 앳코너 디자인실장은 “마른 사람은 더블이, 체격이 크다면 싱글 여밈이 더 잘 어울리며 중성적인 멋을 연출할 때는 더블을, 우아한 차림을 즐기고 싶다면 싱글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셀린느는 단추 대신 지퍼를 달았고, 스튜디오 톰보이는 밑단에 체크 배색의 술 장식을 달았다.
클래식한 트렌치코트의 색상과 소재를 선택했지만, 단추와 벨트 등 소품에 변화를 꾀한 제품들도 출시됐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독특한 모양의 장난감 같은 오브제를 단추로 활용하고, 여러 겹으로 포인트를 준 앞섶과 보석을 박은 벨트로 디자인된 제품을 선보였다. 알렉산더 왕은 기본 실루엣을 유지하되 펀칭과 금속 소재를 활용한 벨트로 화려함을 강조했다. 앳코너는 견장과 단추 등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과감하게 디자인의 변형을 시도했다. 특히 소매를 길게 디자인해 물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며, 소매 끝에 리본 장식의 매듭을 달아 포인트를 준 제품은 원피스와 함께 입어 여성스러움을 한층 강조할 수 있는 제품이다.
단추 대신 지퍼 달고
견장·벨트 없애기도
오버사이즈 핏 열풍 여전
텐셀·면 등 가벼운 소재 인기
지난여름 대유행한 오프숄더룩 형태의 제품도 주목받는 디자인이 될 전망이다. 발렌시아가가 내놓은 ‘스윙 트렌치’가 대표적이다. 어린이가 놀 때 옷을 대충 입은 모습에서 착안한 디자인으로, 평소 기본 트렌치코트처럼 입다가 어깨를 뒤로 젖혀 단추를 고정하면 오프숄더로 변신한다.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격식있는 차림부터 간단한 데이트룩까지 변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에피그램은 하이넥으로도 연출할 수 있는 레귤러 칼라에 셔츠형 여밈, 앞단과 뒷단의 길이 차를 둔 제품을 밀고 있다. 버버리가 선보인 케이프 스타일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 만하다.
(왼쪽) 에피그램 박시 트렌치코트, (오른쪽) 질스튜어트 스웨이드 소재 트렌치코트
이런 다양한 디자인 속에서도 ‘대세’는 오버사이즈 핏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맥시 트렌치코트다. 빈폴레이디스의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는 무난한 디자인이어서 편안하고 캐주얼하게 입을 수 있다. 남성도 예외가 아니다.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한층 여유롭고 트렌디한 느낌을 강조할 수 있다. 이수진 실장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쉬운 연출법은 긴 기장의 트렌치코트 안에 긴 원피스를 입고 펌프스힐로 마무리하는 것”이라며 “중성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을 땐 와이드 팬츠나 약간 통이 있는 정장바지, 스니커즈로 마무리하면 뉴요커 못지않은 패션감각을 뽐낼 수 있다”고 말했다.
(왼쪽) 이자벨 마랑 레드컬러 트렌치코트, (가운데) 지방시 호피무늬 트렌치코트, (오른쪽) 앳코너 트렌치코트
소재와 디자인, 색상에 과감한 변주를 준 트렌치코트도 눈에 띈다. 실크, 태피터, 텐셀, 코튼 등 가벼운 소재로 제작한 제품이 대거 출시되어 ‘트렌치코트는 무겁다’는 인식을 바꿔놓고 있다. 이런 제품들은 부드럽고 몸을 따라 흐르는 듯한 실루엣을 연출할 수 있어 멋스러우면서도 활동감이 뛰어나 활용도가 높다.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가죽, 스웨이드, 데님은 물론 레이스, 비닐 등을 소재로 한 제품들도 있다. 애나멜 가죽처럼 보이는, 이자벨 마랑의 광택 나는 빨간 트렌치코트, 셀린느의 파란 양가죽 트렌치코트, 앳코너의 데님 소재나 질스튜어트의 스웨이드 소재 롱트렌치코트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색상 역시 전통적인 베이지나 검은색, 감색 등 무난한 계열이 아닌, 파스텔톤의 분홍색과 카키, 강렬한 빨강, 파랑, 녹색, 카멜 등으로 다양하게 나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평소 패션에 자신이 있거나 과감한 스타일을 즐긴다면 현란한 색상과 소재로 무장한 트렌치코트에 도전해보자.
(왼쪽) 아크네 스튜디오 트렌치코트, (오른쪽) 알렉산더 왕 트렌치코트
워낙 다양한 스타일의 트렌치코트가 나온 탓에 스타일링에도 변화와 감각이 필요하다. 개성만점 트렌치코트를 소화하면서도 단정함과 우아함을 살리고 싶다면 원피스나 치마를 추천한다. 특히 아래로 딱 떨어지는 느낌의 트렌치코트와는 넓게 펼쳐지는 플레어보다 에이치(H)라인 혹은 에이(A)라인처럼 간결한 모양의 치마가 낫다. 요즘처럼 일교차가 큰 날씨에는 얇은 티셔츠와 청바지의 기본 조합에 오버사이즈나 맥시 트렌치코트를 연출해보자. 편안하면서도 시크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 간결하고 중성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다면 벨트를 생략해볼 만하다. 최근 다시 유행하는 부츠컷 청바지에는 슬림한 스타일의 트렌치코트로 세련미와 여성스러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트렌치코트의 팔뚝 부분을 없앤 트렌치베스트도 개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유용하다. 한경애 코오롱인더스트리 상무는 “디자인·색깔·소재 등을 변형한 트렌치코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개성 연출이 가능하다”며 “단색이나 줄무늬 셔츠에 청바지나 치마와 함께 입으면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나만의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각 업체 제공.
클래식 트렌치코트 200% 활용법
트렌치코트는 전통적인 디자인만으로도 충분히 세련된 느낌을 준다. 색다른 소재와 디자인에 자신이 없다면 가장 기본적이고 고급스러운 제품을 고를 것을 추천한다. 가죽 소재의 가방, 갈색 계열의 워커를 매치하면 단순하면서도 멋스러운 스타일링이 완성된다.
■ 스카프나 머플러를 매치하라. 색깔은 코트와 비슷한 계열이 무난하다. 너무 다른 색은 키를 작아 보이게 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 남성이라면, 페도라 스타일의 중절모나 비니로 개성을 연출하라. 그게 부담스럽다면, 평소 쓰던 안경테와 가방을 다른 것으로 바꿔보자.
■ 여성이라면, 트렌치코트의 허리띠를 묶어 허리를 강조하라. 날씬해 보이면서 여성스러운 느낌을 강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