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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과 연대의 계급 ‘해녀’

등록 2016-10-13 10:51수정 2016-10-13 12:22

[esc/커버스토리] 우리가 몰랐던 제주 해녀의 모든 것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해녀, 공기통도 없이 맨몸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한번에 들숨으로 품은 산소가 제 몸속 마디마디에 다 녹아내릴 때까지 바닥을 더듬어 소라, 전복, 문어를 끌어올린다. 해녀, 그래서 ‘고독의 정령’이다. 물 밖에서 내뿜는 날숨으로, 그들은 살아 있다는 걸 느낀다.

해녀, 육지에도 있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 해녀는, 제주에 산다. 정부와 제주도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해녀도 제주 해녀다. 정확하게 ‘제주 해녀문화’다. 큰 섬에 터 잡고 거친 바다에서 생사를 오가며 물질로 질긴 삶을 이어온 제주 해녀는 독특한 공동체 문화, 양성평등 주체자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제주 해녀를 ‘여성생태주의자’라고 부른다.

기량 뛰어난 상군 지시 따르지만
아파서 못 나온 사람 몫 챙기고
고령자는 전용 ‘할망바당’으로 배려
자기 한계 넘은 욕망은 늘 경계

가난과 싸우고, 일제에 저항하고

제주시 한경면에 거주하는 해녀 박양숙(71)씨. “고향이 없다”고 말한다. 물질 나선 어머니는 배에서 그를 낳았다. 3남5녀의 장녀인 그는 15살에 물질을 시작해 동생들을 키웠다. 결혼 뒤엔 농사짓는 남편의 넉넉지 못한 수입에 힘을 보태려 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

제주 속담에 ‘좀년 애개 나뒹 사흘이믄 물에 든다’(해녀는 아기 낳고 3일이면 물에 든다)는 말이 있다. 제주 해녀의 역사는 곧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가족의 목숨줄 같았던 그들의 물질은 언제 시작됐을까?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녀가 있었다고 본다. 조선시대 물질하는 해녀는 잠녀, 잠수로 불렸다. 남자 잠수부도 있었다. 그들은 포작으로 불렸다.

생계와 진상의 책임이 고스란히 해녀에게 전가된 건 조선 후기다. 조선 후기 군역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서 죽는 남자들이 늘면서 제주의 남자 수는 격감했다. 해녀만 물질을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원래 해녀는 제주도 바깥에서 조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이후 ‘출가물질’(다른 지역에 가 수입을 올리는 물질)이 가능해졌다. 상대국 바다에서 조업할 수 있는 조항이 담긴 이 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제주 바다에 잠수사를 투입했다. 일본이 고용한 잠수사는 금채 기간에도 물질을 멈추지 않았고, 해산물을 싹쓸이했다. 어장은 황폐해졌다. 생계가 불안해진 제주 해녀들은 섬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주 해녀는 1895년 부산에서 처음 출가물질을 했다. 이후 한반도 남쪽, 일본, 중국 다롄과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다. 한창때는 출가물질 해녀가 4천여명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는 독도에서도 물질을 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화약의 원료인 감태를 확보하려고 제주 해녀들을 착취했다. 해녀의 권익을 지키려고 만들어진 해녀조합은 일본과 손을 잡고 해산물 매입 가격을 후려쳤고, 모든 여성을 강제로 조합에 가입시킨 뒤 조합비를 뜯어냈다.

해녀들은 저항했다. 청년 지식인들이 운영하는 야학을 다니며 저울눈금 읽는 법부터 한글, 우리 역사 등 민족교육을 받은 일부 해녀를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시작됐다. 1932년 1월 섬 동쪽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시흥리, 오조리, 우도 등의 해녀 1천여명이 들고일어났다. ‘제주 잠녀항쟁’의 시작이다. 해녀 김옥련 등은 일본의 횡포와 수탈에 맞설 해녀회를 조직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오일장을 이용해 호미와 빗창(전복을 딸 때 쓰는 도구)을 들고 대규모 시위를 이어갔다. 잡혀간 해녀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더욱 커졌다. 모두 238차례, 연인원 1만7천여명의 해녀가 항쟁에 동참했다고 한다. 해녀들의 항쟁은 1930년대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가운데 최대 규모로 기록돼 있다.

해녀의 위기는 1970년대 중반 또 한 차례 찾아왔다. 육지에서 미역 양식에 성공하면서, 목숨을 걸고 채취한 미역의 가치는 크게 하락했다. 수입이 준 해녀들은 감귤밭 일꾼이 되거나 관광업으로 전업했다. 이 무렵 보급된 고무 잠수복은 해녀의 1인당 작업시간을 늘렸지만, 해녀가 줄어드는 걸 막지는 못했다. 1965년 2만3081명(제주 여성 인구의 21.2%)이었던 해녀 수는 1975년 8402명으로 급감했다. 2013년에는 해녀 수가 4574명으로 줄었다.

고령화도 심각하다. 2013년 기준, 50살 이상인 해녀는 전체 해녀의 98%로 조사됐다. 60살 이상인 해녀의 비율도 81.5%에 이른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할망바당, 불턱민주주의, 물숨

해녀들은 고래와 같은 커다란 바다생물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이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그물, 낚싯줄, 닻이다. 몸이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제아무리 노련한 해녀도 해초에 몸이 감기면 혼자 벗어날 방법이 없다. 물안경이 깨지기라도 하면 뭍으로 난 길을 찾지 못한다. 해녀를 구해줄 ‘슈퍼맨’은 동료 해녀밖에 없다. 그래서 해녀는 홀로 물질하지 않는다. 서로 의지하면서 규율이 엄한 공동체 문화를 만든 데는 이런 현실이 영향을 미쳤다.

해녀도 계급이 있다. 숨의 길이와 잠수 깊이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잠수 시간은 보통 1분 이내지만 상군은 2분 이상 숨을 참고 15m 깊이 이상도 내려간다. 상군 중에서도 덕망이 높고 기량이 특출한 해녀는 대상군이라 부른다. 중군은 8~10m, 하군은 5~7m 깊이의 바다가 일터다. 해녀 지망생이나 잠수 능력이 떨어진 늙은 해녀는 똥군이라 하는데, 이들은 수심 5m 이하에서 작업한다.

상군의 지시는 지엄하다. 60대 하군 해녀가 나이를 무기 삼아 40대 상군 해녀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다. 허락 없이 1㎝라도 먼저 바다에 들어가면 벌을 받는다. 6~9월 금채기를 지키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도 마찬가지다. 수확한 해산물도 상군의 지시에 따라 나눈다.

능력 위주의 계급이지만 이들의 관계에는 평등과 약자를 배려하는 철학이 스며 있다. 수확물을 나눌 땐 몸이 아파 물질을 나오지 못한 해녀의 몫도 남겨둔다. 나이 든 해녀가 숨이 짧아지고 체력이 떨어져 똥군이 되면 수심이 얕은 ‘할망바당’으로 간다. 다른 해녀는 이곳에 들어가지 않는다. 할망들이 용돈이라도 벌게 해주려는 배려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해녀들의 ‘불턱 민주주의’는 연구자들에게 흥미로운 소재다. 불턱은 옛날 해녀들이 옷도 갈아입고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던 곳이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 해녀들은 여기서 파도와 수온, 채취할 해산물, 잠수 영역 등을 논의해 정했다. 잠수 기술을 전수하는 장소였고, 1년에 2~3번 하는 바다 청소 ‘개딱이’(갯닦기·개닦이) 날도 이곳에서 정했다. 1985년 이후 현대식 탈의장이 설치되면서 불턱은 점점 사라지면서, 현재 20여곳만 남아 있다.

해녀들이 작업할 때 바닷가를 걸으면 “호이, 호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녀가 물에 떠올라 참았던 숨을 내뱉을 때 내는 ‘숨비소리’, 바다와 육지를 나누는 경계의 소리다. ‘물숨’은 자신의 숨을 넘어선 바다의 숨이란 뜻이다. 해녀가 물숨을 먹으면, 그건 곧 죽음이다. 자기 숨의 한계를 잊고 눈앞의 전복을 하나 더 채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물숨을 먹게 된다. 그래서 제주 우도 해녀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물숨>에는 “욕심을 버리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어미가 밥알을 꼭꼭 씹어 어린 자식 입에 넣어주듯, 늙은 해녀들이 후배 해녀들에게 하는 말이다.

“밭일은 하루 종일 할 수 있다. 하루해가 길다. 해녀는 자유롭다. 예전에는 천하게 여겼지만 이제 높게 평가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까지 있어 더 좋다.” 한림읍에서 만난 해녀 이정선(66)씨는 “다시 태어나도 물질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했다.

제주/글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참고자료 <2016 제주해녀문화아카데미>, <숨비질 베왕 놈주지 아녀-제주해녀 생애사 조사 보고서>, <물숨>, <제주 해녀>

도움말 강권용 제주 해녀박물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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