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커버스토리] 우리가 몰랐던 제주 해녀의 모든 것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아파서 못 나온 사람 몫 챙기고
고령자는 전용 ‘할망바당’으로 배려
자기 한계 넘은 욕망은 늘 경계 가난과 싸우고, 일제에 저항하고 제주시 한경면에 거주하는 해녀 박양숙(71)씨. “고향이 없다”고 말한다. 물질 나선 어머니는 배에서 그를 낳았다. 3남5녀의 장녀인 그는 15살에 물질을 시작해 동생들을 키웠다. 결혼 뒤엔 농사짓는 남편의 넉넉지 못한 수입에 힘을 보태려 물질을 다녔다. 그렇게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 제주 속담에 ‘좀년 애개 나뒹 사흘이믄 물에 든다’(해녀는 아기 낳고 3일이면 물에 든다)는 말이 있다. 제주 해녀의 역사는 곧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가족의 목숨줄 같았던 그들의 물질은 언제 시작됐을까? <삼국사기>, <고려사> 등에 ‘섭라(제주)에서 야명주(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해녀가 있었다고 본다. 조선시대 물질하는 해녀는 잠녀, 잠수로 불렸다. 남자 잠수부도 있었다. 그들은 포작으로 불렸다. 생계와 진상의 책임이 고스란히 해녀에게 전가된 건 조선 후기다. 조선 후기 군역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거나 바다에서 죽는 남자들이 늘면서 제주의 남자 수는 격감했다. 해녀만 물질을 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원래 해녀는 제주도 바깥에서 조업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이후 ‘출가물질’(다른 지역에 가 수입을 올리는 물질)이 가능해졌다. 상대국 바다에서 조업할 수 있는 조항이 담긴 이 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제주 바다에 잠수사를 투입했다. 일본이 고용한 잠수사는 금채 기간에도 물질을 멈추지 않았고, 해산물을 싹쓸이했다. 어장은 황폐해졌다. 생계가 불안해진 제주 해녀들은 섬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제주 해녀는 1895년 부산에서 처음 출가물질을 했다. 이후 한반도 남쪽, 일본, 중국 다롄과 칭다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진출했다. 한창때는 출가물질 해녀가 4천여명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는 독도에서도 물질을 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화약의 원료인 감태를 확보하려고 제주 해녀들을 착취했다. 해녀의 권익을 지키려고 만들어진 해녀조합은 일본과 손을 잡고 해산물 매입 가격을 후려쳤고, 모든 여성을 강제로 조합에 가입시킨 뒤 조합비를 뜯어냈다. 해녀들은 저항했다. 청년 지식인들이 운영하는 야학을 다니며 저울눈금 읽는 법부터 한글, 우리 역사 등 민족교육을 받은 일부 해녀를 중심으로 생존권 투쟁이 시작됐다. 1932년 1월 섬 동쪽 하도리, 종달리, 세화리, 시흥리, 오조리, 우도 등의 해녀 1천여명이 들고일어났다. ‘제주 잠녀항쟁’의 시작이다. 해녀 김옥련 등은 일본의 횡포와 수탈에 맞설 해녀회를 조직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오일장을 이용해 호미와 빗창(전복을 딸 때 쓰는 도구)을 들고 대규모 시위를 이어갔다. 잡혀간 해녀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더욱 커졌다. 모두 238차례, 연인원 1만7천여명의 해녀가 항쟁에 동참했다고 한다. 해녀들의 항쟁은 1930년대 제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가운데 최대 규모로 기록돼 있다. 해녀의 위기는 1970년대 중반 또 한 차례 찾아왔다. 육지에서 미역 양식에 성공하면서, 목숨을 걸고 채취한 미역의 가치는 크게 하락했다. 수입이 준 해녀들은 감귤밭 일꾼이 되거나 관광업으로 전업했다. 이 무렵 보급된 고무 잠수복은 해녀의 1인당 작업시간을 늘렸지만, 해녀가 줄어드는 걸 막지는 못했다. 1965년 2만3081명(제주 여성 인구의 21.2%)이었던 해녀 수는 1975년 8402명으로 급감했다. 2013년에는 해녀 수가 4574명으로 줄었다. 고령화도 심각하다. 2013년 기준, 50살 이상인 해녀는 전체 해녀의 98%로 조사됐다. 60살 이상인 해녀의 비율도 81.5%에 이른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앞바다에서 물질을 해 소라, 전복 등을 따는 해녀들. 2000년대 초 풍경이다. 사진 해녀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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