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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내들의 춤, 탱고를 그리워하다

등록 2017-04-05 20:16수정 2017-04-05 20:26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남미 이민자가 퍼뜨린 탱고····왕가위 감독도 탐한 ‘심장이 추는 춤’
탱고 공연.  노동효 제공
탱고 공연. 노동효 제공
낭만주의 시대도 아닌데 20세기엔 요절하는 이들이 왜 그리 많았을까? 리버 피닉스, 커트 코베인, 프레디 머큐리, 김현식, 유재하, 김광석, 장국영. 불길한 새의 노래 같은 부고가 들려올 때면 가슴이 아팠어. 그랬지만 세월 가니 그날이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계절만 남고 날짜는 까마득히 잊히더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만은 결코 잊히지 않아. 4월1일.

<해피 투게더>를 처음 본 건 1997년 영국 런던이었어. 칸 영화제에서 이미 감독상을 받은 까닭에 극장엔 긴 줄이 늘어서 있었지. 티켓 창구가 열리길 기다리며 <아비정전>의 매표소 장면을 떠올리기도 했어. 왜 그 아비(장국영, 장궈룽)가 수리진(장만옥, 장만위)에게 읊조리던 대사 있잖아. “1960년 4월16일 3시1분. 우린 1분을 같이했어. 난 이 1분을 결코 잊지 않을 거야.”

인터넷이 전세계를 연결하던 시절도 아닌 터라 런던에서 체류하던 내가 아는 정보란 왕가위(왕자웨이) 감독, 장국영·양조위(량차오웨이) 주연. 그게 전부였어. 영화가 시작되면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는 장면이 재빠르게 지나가. 1995년 5월12일. 그러곤 꺼진 침대에 누워 램프에 그려진 이과수 폭포를 보는 사내. 꽁초 수북이 쌓여 있는 재떨이, 찌그러진 맥주캔, 마시다 만 1.5리터 페트병. 등 돌린 채 얼룩진 거울을 바라보는 또다른 사내가 등장하고 첫 대사가 흐르지.

“아휘,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화면이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난 당황스러웠어. 사내들끼리 나누는 베드신. 이게 뭐지? 영화에 몰입할 수 없었어. 게다가 중국어에 영어 자막까지. 옥상 위 두 남자가 있는 포스터를 보고 버디무비를 기대했기 때문일까. 1시간 반 지나 극장 안에 다시 불이 켜지고 내 입에선 불평이 터져나왔어. “사랑은 늘 어긋난다는 거. 그래서 아프다는 거. 동어반복이잖아. 대체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까지 수상한 이유가 뭐야?”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단 말처럼 속은 기분이었어. 그건 그렇고 배경이 왜 홍콩이 아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지?

왕가위가 만든 영화 중 ‘내 멋대로 순위’ 맨 아래로, 장국영 출연 영화 중 ‘내 멋대로 순위’ 맨 아래로 <해피 투게더>를 밀어 넣었어. <해피 투게더>는 정말 ‘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봄빛’처럼 내 생의 저편으로 사라졌어.

<해피 투게더> 처음 본건 1997년
왜 홍콩 아닌 부에노스아이레스일까
천대받던 춤 유럽서 꽃핀 뒤 역수입
만우절에 날아든 장국영 부고 이후
4월이면 다시 찾게 되는 영화로

탱고 공연이 열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페 토르티니’. 노동효 제공
탱고 공연이 열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페 토르티니’. 노동효 제공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은 건 영화를 본 지 20년 뒤. <해피 투게더> 촬영지라는 건 생각지도 않았어. 오직 탱고, 탱고, 탱고! 탱고 때문에 온 터라 첫날부터 탱고를 보고, 탱고를 듣고, 스텝을 밟았어. 우노, 도스, 트레스, 콰트로! 숙소의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면서도 스텝을 밟았지. 신코, 세이스, 시에테, 오초. 한 바퀴 더! 누군가 엘리베이터 시시티브이(CCTV)를 돌려봤다면 참 황당했을 거야. 동양인 사내가 엘리베이터에서 혼자 탱고 스텝을 밟는 꼴이라니!

탱고 공연.  노동효 제공
탱고 공연. 노동효 제공
탱고를 들을 수 있는 탕게리아(탱고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도, 탱고를 추는 밀롱가(탱고 전문 공연장)도 열심히 찾아다녔어. 스텝 연습도 멈추지 않았지. 귀국하면 나를 몸치라 놀리던 친구들에게 “원조의 나라에서 탱고를 배우고 온 사람이야, 왜 이러셔!” 하고 본때를 보여야지 다짐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탱고는 몸으로 추는 게 아냐. 스텝이 아니라 음악이 먼저지. 가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가장 좋아. 탱고 가사는 시거든. 정말 가슴 아픈 시들이지. 음악을 반복해서 듣다가 탱고가 가슴으로 느껴지면 그때 스텝으로 옮겨. 탱고는 ‘네 개의 다리, 하나의 심장이 추는 춤’이라고 해. 즉, 심장이 먼저라고!”

기계적으로 스텝을 밟던 날 보고 숙소 주인 페데리코가 말했어.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듯해서 탱고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의 관문이었던 아르헨티나 보카의 지금 모습. 노동효 제공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의 관문이었던 아르헨티나 보카의 지금 모습. 노동효 제공
“때는 19세기 말, 많은 사람이 아메리카로 왔지.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등.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넘어온 이민자 말이야. 유럽을 출발한 배는 신대륙의 항구에 사람들을 내려놓았어. 북미는 뉴욕, 남미는 리우데자네이루와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들이 첫발을 내디딘 부두를 사람들은 보카(입)라고 불렀지. 여객선은 ‘입’을 벌리고 사람들을 토해냈고, 사람들은 신대륙의 ‘입구’에 첫발을 내디뎠어. 그 무렵 유럽 이민자의 대부분은 사내였지. 뭐가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곳에 여자와 아이를 데려올 순 없잖아. 구대륙에서 생의 종점까지 맛봤을 사람들이 보카에서 새로운 생을 시작했지. 몸뚱이 빼곤 가진 게 없는 이들은 보카 인근에 자리잡고 각종 고된 일에 종사했어. 밤이면 값싼 술을 들이켜다가 울컥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거야. 떠나온 고향이 떠올랐을 테니까. 두고 온 여자가 사무치게 그리웠을 테니까. 사내들은 악사가 켜는 음악을 듣다가 슬픔을 못 이겨 다른 사내를 부둥켜안고 춤을 췄어. 누군가와 춤을 추지만, 저마다 다른 사람을, 지금 곁에 없는 사랑을 떠올렸지. 탱고의 기원이야. 남녀가 추던 춤이 아니라 남남이 추던 춤. 그 뒤 인구가 점점 더 많이 유입되고 서민 거주지가 부두에서 내륙으로 퍼지면서 탱고의 중심은 산텔모로 옮겨갔어. 가난한 예술가, 음악가, 춤꾼, 창녀들이 어울려 살던 거리. 29번 버스를 타면 산텔모 지나 보카까지 갈 수 있을 거야.”

탱고를 즐기는 아르헨티나 시민들. 노동효 제공
탱고를 즐기는 아르헨티나 시민들. 노동효 제공
29번 버스, 보카, 산텔모. 어디선가 본 지명, 어디선가 본 버스 번호. 어디였더라? 순간 내 생의 저편으로 가라앉았던 영화가 떠오르기 시작했어.

홍콩 출신 아휘(양조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 보영(장국영)과 다시 시작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왔지. 이과수 폭포만 보고 홍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두 사람은 길을 잃고, 헤어지게 돼. 아휘는 산텔모에서 직장을 구했지. ‘바 수르’(Bar Sur. ‘남쪽 술집’이란 뜻)라는 밀롱가.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어. 거처는 29번 버스의 종점인 보카. 어느 날 보영이 나타나고 재회를 해. 낡은 아파트에서 할퀴고, 바라보고, 질투하다가 다시 보영이 떠나. 고국으로 돌아갈 여비를 번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지. 떠나기 전 이과수 폭포를 보고서. 보영은 뒤늦게 아휘를 찾아 술집에 갔다가 낯선 사내를 안고 탱고를 춰.

영화 <해피 투게더>에 나오는 술집 ‘바 수르’.  노동효 제공
영화 <해피 투게더>에 나오는 술집 ‘바 수르’. 노동효 제공
그제야 20년 전의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어. “왜 하필 홍콩이 아니라 부에노스아이레스지?” 왕가위가 만든 건 단순히 이성애에서 동성애로 변주한 로맨스가 아니었어. <해피 투게더>는 탱고의 기원·대표곡·정서를 스토리·배경·캐릭터에 모두 담은 작품. 탱고의, 탱고에 의한, 탱고를 위한 영화라고 해도 좋을. 탱고를 알면 <해피 투게더>가 왜 남녀가 아닌 남남의 사랑 얘기를 그리는지, 왜 촬영지가 보카와 산텔모인지, 왜 타국에서 일하는 사내들을 그리는지, 세세한 장면들의 수수께끼가 풀려. 왕가위가 얼마나 꼼꼼하고 치밀한 감독인지도. 20년이 지나, 난 왕가위의 칸 영화제 수상을 수긍했어.

탱고는 그 뒤 남성 이민자의 뒤를 이어 도착한 거리의 여성과 추는 춤으로 인식되면서 퇴폐문화로 낙인찍혔대. 본토에서 탱고는 침체기에 빠졌지만 유럽으로 건너간 탱고는 새로운 문화를 찾던 상류층의 기대에 부응하며 꽃을 활짝 피웠지.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역수입되며 전성기를 맞이했고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춤이 되었어. 탱고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갖춘 유럽인에게 <해피 투게더>는 경이로움을 안겨줬을 테지.

아르헨티나 보카의 지금 모습. 노동효 제공
아르헨티나 보카의 지금 모습. 노동효 제공
“탱고를 한 편의 영화로 만들어 내다니!”

영화의 후반부, 보영이 ‘바 수르’에 갔다가 낯선 사내와 탱고를 추던 장면이 있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려 춤을 추는 게 아냐. 사내는 그곳에 없는 사랑을, 보영은 그곳에 없는 아휘를 그리며 춤을 춰. 탱고의 기원.

2003년 4월1일. 만우절 장난처럼 날아들었던 부고 소식을 기억해. 장국영 사망. 아마도 첫 반응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장난 칠래? 티브이를 켜자 농담 아니라고 속보가 지나가고 있었어. 그날 이후 4월1일은 만우절인 동시에 장국영이 죽은 날로 기억돼. 4월이 되면 그가 출연한 영화를 다시 찾게 되더군. 정작 기일인 4월1일엔 만우절 웃음소리 때문에 한숨 참았다가 4월 첫 주 어느 날을 골라, <해피 투게더>.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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