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못 알아볼 뻔했다. 저들이 개그우먼이라고? 패션모델인 줄 알았다. 쑥스러운 듯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장도연(33), 귀엽고 깜찍한 박나래(33), 고혹적이면서도 여성스러운 허안나(34). 요즘 가장 ‘자~알’나가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스타일리스트와 개그우먼. 뭔가 부자연스러운(?) 이 조합의 인연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낙지집에서 처음 만났지?”, “오빠 덕분에 패션쇼도 가봤잖아.” 여자 셋과 남자 한 명이 마주 앉으니 이야기꽃이 끊이지 않는다.
‘패션 넘버 5’, 우리 최고의 작품
김성일(이하 김) 너희 셋을 만난 게 참 신기해. 개그맨 중에는 예능 하는 유재석·신동엽 이런 친구들하고만 친했는데, 너희들을 만날 줄이야! 심지어 공개 코미디를 하는 ‘본격 개그맨’이잖아.
박나래(이하 박) 진짜? 우리야말로 진짜 신기하지. 오빠를 알게 된 거. 인터뷰도 하고. 하하하.
장도연(이하 장) 우리가 케이블방송 <프로젝트 런웨이> 특별 게스트로 출연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간호섭 교수(홍익대 패션디자인과)님 생일파티에서 오빠랑 만났잖아. 패션계 유명한 분들도 다 있어서 너무 신기했어.
박 우리도 그분들이 신기했고, 그분들도 우리를 신기하게 생각했지. 서로의 합이 잘 맞았어.
김 개그와 패션은 통하는 게 많아서 그래. 독창적인 순발력이 생명이잖아. ‘본격 스타일리스트’와 ‘본격 개그우먼’의 만남이네! ‘본격’, 이 말 너무 멋지지 않아?
허안나(이하 허) 완전 영광! 영광! 영광!
처음부터 속사포가 터졌다. 말도 빨라 제지(?)가 좀처럼 안 됐다. “얘들아~ 좀 천천히! 기자님 힘드셔~~ 평소처럼 얘기하면 안 돼.” 김성일씨의 당부에 “네~에, 알~겠~습~니~다. 돼~어~었~지~요?” “하하하. 이거 진짜 재밌다!”
김 셋이 <개그콘서트> ‘패션 넘버 5’ 통해 친해졌지? 개그우먼으로서도 그 작품이 터닝포인트 같은데, 누구 아이디어?
허 나와 나래. 거기에 ‘기럭지’가 되는 도연이 합류했지. 벌써 6년 전이네.
박 그거 안 했으면 난 지금 영농후계자 됐을걸? 안 뜬 개그우먼 7년차라 귀촌하려고 했다가 도연과 안나한테 묻어갔지. 하하하.
김 박나래한테는 최고의 작품이었네?
박 에잇, 무슨 소리~(손을 내저으며) 수혜자는 도연이지. ‘등 굽히는’ 오버스런 포즈, 지금도 ‘핫’ 하잖아. 심지어 외국에서도 엄청 유명해.
김 아~. 그 자세? 우스꽝스럽지만, 패션모델들이 즐겨 해. ‘보그 포즈 넘버 3’쯤?
허 모델들의 포즈가 죄다 도연이 자세와 비슷했던 것 같다~.
박 혜진 언니(패션모델 한혜진) 말로는 그 포즈 싫어서 절대 안 한다던데?
김 왜? 송경아도, 한혜진도 다 했거든. 도연인 이후 패션 프로그램 출연도 했지? 티브이 홈쇼핑 게스트도 하고.
장 개그 인생 11년 통틀어 가장 재밌을 때였어. (공개 코미디 외에) 이런 (예능) 쪽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가르쳐준 작품이랄까? 이후 ‘투잡’ 생활화. 하하.
허 나래와 도연이 그 이후 반짝 치고 나갔다면 나는 못 쳤지. 그래서 지금 난 ‘스리잡’, ‘포잡’도 마다 안 해.
박 안나 언니도 곧 (잘될 거야)….
장 안나 언니 눈 밑에 눈물 보여. 하하하하.
허 내 걱정들 그만하시고. 오빠! 도연이 이참에 모델로 좀 발굴해서 키워주면 안 돼?
김 나이가 많이 찼어. 모델도 10대 때부터 키운다.
허 그럼 여기 10살짜리 어때? 신체적 발달 10살인 나래. (나래, 갑자기 모델 포즈를 취한다!)
모두 푸하하핫.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허안나, 박나래, 장도연.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무대 없어지는 현실…“더 웃기고 싶어”
김 지금은 아닌데, 셋을 만나긴 전엔 ‘개그우먼=생또라이’ 같았거든. 끼 많은 거 타고난 거야?
박·장·허 푸핫하하. 오빠, 완전 웃기는 거 알지?
허 ‘생또라이’가 아니라 ‘색또라이’라고 해줘~. 우리가 얼마나 섹쉬한데~.(모두 박장대소)
김 내가 이래 뵈어도 한 웃김 한다니까. 알지?
박 그럼. 오빠가 (김)지민 언니한테 ‘느낌 아니까’, ‘느낌 참 좋다’ 유행어 줬잖아.
허 ‘느~낌 참~ 좋~다’는 사실 오빠가 나한테 준 건데, 안 물었지. 흑흑. 난 술 좋아하는 엄마 피를 물려받은 거 같아. 술도 좋아하지만. <개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그거 엄마 술 취한 목소리 흉내냈던 거였거든. 완전 대박 났잖아.
장 난 특이할 게 없어.
박 나도 딱히 타고난 끼 없어.
김 그래서 그런가. 개그맨들 평소 땐 방송 모습과 참 달라. 낯가리고, 조용하고. 도연이도 그렇잖아?
박 맞아, 그런 분 많지. 정주리도 낯 엄청 가리잖아.
허 (김성일을 보며) 우린 어떤데?
박 개차반? 하하하. 나는 낯 안 가리는 스타일이거든.
허 낯가림이 있었는데, 하락세 겪으면서 이젠 낯 안 가려.
박 난 ‘지구는 둥그니까 앞으로 나가면 다 친구가 된다’ 주의였는데, 요즘 조금씩 낯을 가리네~.
김 개그맨들은 평소에도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 갖고 있지 않아?
박 응. 힘들어. 우리는 웃기는 사람이지, 우스운 사람이 아냐. 근데 막 대하는 분들을 만나면 상처가 돼. 그래서 낯가림이 생겼나?
김 모르는 사람이 무턱대고 ‘한번 웃겨 보세요!’ 하면 진짜 열 받을 거 같아. 내 경우 처음 본 사람이 ‘어떻게 입으면 좋겠어요?’ 하면 당혹 그 자체거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속마음이 터져 나왔다. 절대 ‘우울·심각’ 모드는 아니었지만. “언제 어디서든 우울해져 있으면 안 될 거 같아.”(장) “우울할 때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박) “모임에서 분위기 다운되면 눈치 보이고, 내 탓 하고….”(허) 이때 김성일씨가 해결사로 나섰다. “사람 웃기는 일이 가장 힘들어서 그래.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가 왜 나왔는 줄 알아? 그만큼 웃기는 일이 힘든 거야. 힘내! 너희는 지금 아주 잘하고 있어. 멋져! 진짜 멋진 녀석들.”
방송에서 개그맨들의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문화방송>이 오래전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을 없앤 데 이어 최근 <에스비에스>도 ‘웃찾사’를 폐지했다. 지상파 방송에서 유일하게 개그맨들이 설 무대는 <한국방송> ‘개그콘서트’뿐이다. 이들은 말했다. “‘기자님, 그녀들이 일제히 눈물을 흘렸다’고 써주세요!” 지금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살짝(?) 엄숙해졌다. “야야, 그만~. 우리한테 이런 건 안 어울려!”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한 커피숍에서 김성일과 만난 장도연, 박나래, 허안나.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우리도 ‘여자~ 여자~’랍니다”
김 셋 모두 싱글이다. 혼자 있을 때, 어떻게 지내?
박 나는 누구보다 싱글 라이프를 잘 즐긴다고 자부해. 들어는 봤나? 욜로족. 멍때리고 있는 거 정말 싫어! 뭔가를 계속 해야 하는 성향이야. 술 마시면 다음날 퍼지긴 하지만. 호호홍. 전날 술 안 마신 날엔 아침 일찍부터 프랑스 자수, 꽃꽂이, 디제잉, 필라테스, 요리 같은 걸 해. 인테리어에 관심도 많고, 식물도 많이 키운다구~.
허 나도 꽃꽂이 배우는 중이야. 개그우먼이라는 직업은 특성상 ‘여성성’을 갖기 힘든데, 꽃꽂이를 하면 나도 여자구나 싶어.(웃음)
김 에잇, 뭔 소리? 나래, 도연, 안나는 여성성이 풍부하지. (가수) 황보에 비하면 정말 그래.
박·장·허 정말? 하긴 우리가 ‘한’ 여자여자~ 하지.
박 꽃꽂이가 힐링도 되고, 정신 수양에도 참 좋아.
허 글치 않아도 선생님이 2년 하면 차분해진다고 그러더라. 하하하.
장 쉬는 날 나는 딱 3가지만 해. 아침에 일어나 영화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걷고, 맥주 마셔. 최근 개봉한 화가 모드 루이스의 실화를 다룬 <내 사랑>이라는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어. 완전 대박! 정말 강추하고 싶어.
허 도연이는 정말 공감능력이 뛰어나. 근데 영화를 보면 왜 자꾸 졸아?(웃음)
박 나랑 공포영화 볼 때도 그랬어. 영화 시작할 때 ‘이거 진짜 무서울까?’ 물으려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쿨쿨.
장 진정성 없어 보이게…(왜 그런 소리를?) 나 기면증 있어. 아픈 사람 놀리면 안 돼! 내가 그래서 영화를 혼자 본다구~.
김 각자 기억에 남는 영화나 추천할 영화가 있어?
박 나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년 개봉한 일본 미스터리 영화).
김 나도 그거 완전 좋아. (탤런트) 김남주한테 디브이디 선물했지.
장 궁금한데?
김 꼭 봐. 완전 강추야!
허 <비포 선 라이즈> 시리즈가 좋았어. 음~ 진정성 있는 사랑? 나이 들어도 사랑이 있다! 오빤 어떤 영화가 좋았어?
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그리고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하이힐>. 대중 스타 엄마와 딸의 애증을 다룬 작품인데, 너희들이 보면 딱 좋을 거 같아. 다 딸들이잖아. 정말로 딸의 사랑은 엄마의 사랑에 절대적으로 못 미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지. 오에스티도 좋고.
‘외롭다고?’ 강박관념부터 버려라
김 30대가 훌쩍 지났는데, 외로울 때 없어?
허 외로움? 까짓것 묻어둬~ 묻어둬~. 난 모른 척하는 편이야. 외롭다 싶을 땐 뭔가를 막 하지.
장 좀 외로우면 어때? 난 외로움을 즐겨. 요즘엔 ‘왜 행복해야 하지?’ 그런 생각도 해. ‘인간은 늘 불행한 게 당연하다’고 영화 <꿈의 제인>(2016년 개봉한 한국영화)에서도 그랬어. 참 와닿더라.
박 도연, 혹시 염세주의자?
허 도연이 뭐 어때서? 나도 도연 생각에 100% 동감! 행복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버리면 불행도 없어. 행복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절대 불행하지도 않지.
김 다들 초긍정 마인드네.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그래서 우리가 찰떡궁합? 앞으론 어떻게 살래?
박 지금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즐겨야지. 뭐, 김숙·송은이 선배처럼 마흔 넘어서도 활발하게 활동했음 하지. 공개 코미디도 계속 하고 싶고.
허·장 나도 나도.
장 23살 때 개그우먼으로 데뷔해 4~5년차까지 못 떴어. 근데 지금은 바짝 일을 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 같아. 최선을 다하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김 셋 너무 멋져! 정말 최고야. 지금 같은 전성기가 앞으로도 계속될 거다. 분명해!
허 나는 (전성기) 아닌데? 지금 못 나가고 있다고.
김 야, 전성기가 인생에 한 번만 있는 줄 알아? 제2, 제3의 전성기가 또 온다. 걱정 마. 업다운이 없으면 인생이 재미없는 거 알지? 안나의 전성기, 또 온다. 두고 봐.
허 오빠, 나래랑 도연이 너무 착하지 않아? 내가 지금 ‘못 나간다’고 하니까, 눈가 촉촉해진 거 봐. 아~ 웃겨!
박·장 하~지~마~(오나미 말투)
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어. 우리 모두 지금을 즐기자! 후회 없이!
장 맞아 맞아. 인생 뭐 있어? 즐겨!
박 그래. 이거 끝나고 뭐 하지?
장·박·허 술 마시러 갈까? 근데 남자가 없잖아?
인터뷰가 진행된 날은 7월14일, 금요일이었다! ‘불금’. 그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함께 술을 마실 친구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정리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