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큐레이터 임지선씨가 지난 24일 전남 고흥군 연홍도에 설치된 ‘은빛물고기’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국 기자
일본 남단 시코쿠 가가와현의 나오시마는 ‘예술의 섬’으로 알려진 곳이다. 한때 구리 제련소가 있어 돈과 사람이 몰리던 섬이었지만 제련소가 없어지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볼거리도 없는 면적 7.80㎢의 작은 섬에 관광객이 올 리가 없었다. 섬은 점점 황폐화됐다. 이런 나오시마에 1990년대 들어 예술인들이 손을 대기 시작했다. 섬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섬 예술화 사업이 진행된 것이다. 예술인들은 섬 전체를 거대한 미술관으로 바꿔 나갔다.
버려진 섬 나오시마가 예술섬으로 탈바꿈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오시마와 인근 이누지마, 메기지마, 오기지마 등 섬에서 3년에 한번 열리는 ‘세토우치 국제 아트 페스티벌’이 열리는 해엔 한 해 100만명 이상이 섬을 찾는다. ‘호박’ 조형물로 유명한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과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 이우환미술관 등이 들어서 있는 나오시마는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가보고 싶은 섬이 됐다.
한국에도 나오시마 같은 섬이 나올 수 있을까. 전남 고흥군의 작은 섬 연홍도가 그 도전을 하고 있다. 연홍도는 여러모로 나오시마와 닮았다. 면적 0.41㎢의 작은 섬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또 연홍도는 과거 ‘돈 섬’이라 불릴 정도로 돈이 몰리던 곳이었다. 1980년대까지 성행했던 김 양식 때문이다. 섬에서 만난 주민들은 “돈이 하도 많아서 개도 5000원짜리를 물고 다녔다”고 말했다. 품질이 좋았던 연홍도 김은 대부분 일본으로 수출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김 양식장 증가 등으로 더 이상 김 양식은 돈이 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김 양식을 대부분 접자, 사람들도 빠져나갔다. 아이들도 줄었다. 1993년 유일한 초등학교였던 연홍초등학교(폐교 당시 금산초등학교 연홍분교)가 문을 닫았다. 한때 1000명이 넘던 인구는 현재 80여명이 불과하다.
별다른 구경거리도 없던 연홍도에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건 2015년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되고 나서부터다. 가고 싶은 섬 사업은 관광자원 개발을 위한 전라남도의 브랜드 사업이다.
지난 24일 찾은 연홍도는 ‘지붕 없는 미술관’이란 별명답게 섬 전체가 아기자기한 미술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흥군 금산면 신양선착장에서 배로 3분 거리에 불과해, 육지와 가까운 섬처럼 느껴지지만 원래는 육지에서 먼 섬이었다. 2008년 고흥과 소록도를 연결하는 소록대교와, 2011년 거금도와 소록도를 연결하는 거금대교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한번에 오는 배가 없어 갈아타야 할 정도로 오기 힘든 곳이었다.
배가 섬에 닿기 전부터 알록달록한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예술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지붕들도 파랑과 빨강 색으로 바꾼 것이다. 눈이 시릴 정도의 파란 하늘이 캔버스 역할을 해 마치 선명한 유성물감을 찍은 것 같았다.
선착장에 내리면 바로 큰 소라 조형물이 보인다. 소라가 특산물이기 때문이다. 그 옆으로 빨간색 파이프로 된 사람 모양의 조형물이 이어진다. 선착장 인근 집의 벽은 타일 벽화로 장식돼 있다. 고흥 출신인 축구선수 박지성의 그림, 타일에 붙인 프로레슬링 선수 김일의 사진은 웃음을 자아낸다. 마을 사람들의 사진을 타일에 만들어 붙인 ‘연홍 사진박물관’도 있다. 하지만 예술의 섬이라고 하기엔 뭔가 조악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동행한 독립큐레이터 임지선(31)씨가 “처음 예술화 사업을 위한 사업자 선정을 하는데 (전남) 광주의 타일 업체가 선정됐다. 아무래도 건축자재로 쓰는 타일을 제작하는 업체라서 예술적 작품 제작에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12월 정식 개관 예정인 ‘예술섬 연홍도 현대미술전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질적인 예술작품들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예술작품을 수급하고자 하는 도 차원의 사업이다.
‘지붕없는 미술관’을 표방하는 연홍도의 다양한 미술 작품들. 이정국 기자
하지만 연홍미술관으로 가는 연홍 골목길에 들어서자, 예술섬다운 풍경이 묻어 나왔다. 낮은 담장엔 갖가지 벽화와 ‘정크 아트’(쓰레기나 고물 등을 재활용해 만드는 예술작품) 작품이 줄을 이어 설치돼 있었다.
약 400m의 연홍골목길을 빠져나오면 반대편 해안이 나온다. 철제 조형물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앞선 작품들보다 완성도가 높다. 여러 작가의 재능기부를 통해 마련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을 따라 400m를 가면 연홍미술관이 나온다. 2005년 폐교였던 연홍초등학교를 미술관으로 바꿔 운영해온 선호남 관장의 손길이 묻어 있는 곳이다. 그는 이곳의 예술작품 상당수를 손수 제작하고 동료 작가들을 불러 모아 섬의 예술화 작업을 진행한 일등 공신이다. 미술관 앞 해변에는 프랑스의 설치미술가 실뱅 페리에의 ‘은빛 물고기’와 ‘탈출’이라는 작품이 눈에 띈다. 지난해 10월 섬에서 합숙을 하며 만들었다.
‘은빛 물고기’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해변에 설치해 민물 때는 반쯤 잠겨 있다가, 썰물 때는 몸을 온전히 드러낸다. 스테인리스 소재가 햇볕과 파도에 반사된 빛을 받아 유난히 더 반짝이게 보인다. 좀 떨어진 해변에 있는 ‘탈출’은 철거 예정이었던 폐창고를 재활용해 만들었다. 창고 벽에 ‘ESCAPE’(탈출)라고 크게 쓰여 있는데 마치 바다 쪽으로 탈출하고 싶은 심경이 느껴진다. 임지선 큐레이터는 “이 섬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미 사진 찍는 곳으로도 유명해졌다. 물고기라는 주제와 연홍도라는 섬의 콘셉트가 잘 맞아떨어진다. 탈출의 경우도 폐창고를 버리지 않고 활용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연홍미술관에서 만난 선 관장은 ‘우려 반 기대 반’의 심경을 내비쳤다. “갑자기 섬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들이 미술과 예술을 느끼고 가는지는 의문이다. 관광버스로 와서 쓱 둘러만 보고 가는 경우도 많아 좀 안타깝다”고 했다. 군청에 따르면 평소 한달에 200~500명 정도 외지인이 섬을 찾았는데, 본격적인 예술섬 출발을 알린 올 5월 이후 한달에 3000~4000명이 섬을 찾고 있다고 한다.
선 관장은 “예술은 기본적으로 현지인들과 호흡해야 한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외지에서 제작한 작품을 설치하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옆에서 이를 듣던 임 큐레이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흔들고 배웅하는 선 관장을 뒤로하고 해안도로를 쭉 따라가자 작은 몽돌 해변이 나왔다. 아직 본격적으로 가꾸진 않아 관광객이 찾진 않지만, 정비를 하면 꽤 수영을 할 만한 곳으로 보였다. 나오는 배를 타기 전 시간이 남아 마을 협동조합에서 만든 마을 식당을 찾아 음료로 목을 축였다. 마침 담소 중인 마을 주민들이 젊은이들이 왔다며 반겼다.
“원래 이 섬에 돈이 많았다면서요.”
“워메, 젊은이가 그걸 우째 알아쓰까.” 그들의 얼굴엔 기특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에어컨을 켜고 있지 않다가 기자 일행 때문에 에어컨을 켠 것이 미안해, 잔돈 받는 것을 거절했더니 “이러면 안 되는디” 하며 기어이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아직은 관광지 같지 않은 순수함이 더 매력적이었다.
‘은빛물고기’는 밀물 때 물에 잠기면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이정국 기자
섬을 나오는데 연홍도의 전경이 보였다. 연홍도는 원래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연(鳶)과 같다 하여 연홍도(鳶洪島)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행정구역 정비를 하면서 이을 연(連) 자로 바꾸었다. 연홍도가 예술이란 바람을 타고 다시 연처럼 날 수 있을까. 섬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고흥/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지붕없는 미술관’을 표방하는 연홍도의 다양한 미술 작품들. 이정국 기자
“자연에 대한 사색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임지선 큐레이터 인터뷰
임지선 큐레이터는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에서 공모한 문화예술지원사업의 연홍도 프로젝트 총괄책임자로 선정돼 연홍도 예술작품의 정비 및 전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통일전망대 기획전’, ‘박찬호 기념관 전시회’, ‘그라운드바 전시회’ 등 다양한 기획을 해온 촉망받는 큐레이터다.
-처음 섬에 방문했을 때 느낌이 어땠나?
“아름다운 섬이었다. 오래된 섬의 느낌도 났다. 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예술섬 조성사업에 뛰어든 것도 흥미로웠다. 다만 일부 작품의 완성도나 콘셉트는 조금 아쉬웠다.”
‘지붕없는 미술관’을 표방하는 연홍도의 다양한 미술 작품들. 이정국 기자
-연홍도를 어떤 섬으로 바꾸고 싶은가?
“12월 예정된 전시회 명칭이 ‘프로젝트 아일랜드: 환생, 사라지는 자들과 절대적인 것’이다. 연홍도의 잃어버린 것들과 그것을 보존하고 재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다. 관람객이 오면 자연에 대한 진지한 사색을 해보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
-참조한 사례들이 있나? 일본의 나오시마도 있는데.
“물론 나오시마도 참조했다. 하지만 가장 영향을 받은 건 독일의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다. 1977년에 공공미술을 이해하려는 프로젝트로 출발했는데 10년 주기로 조각·설치미술 페스티벌을 연다. 현재 세계 3대 예술제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난개발이 아닌 주제와 규칙을 바탕으로 도시 재생과 활성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연홍도가 참조할 점이 많은 것 같다.”
-주로 어떤 작품들이 새로 제작될 예정인가?
“김도엽(벽화), 김서량(사운드 및 설치) 작가 등 현대 미술작가 6~7명이 섭외됐다. 이들이 설치미술과 벽화, 조각 등의 작품을 제작할 예정이다.”
-바라는 점은?
“이러한 프로젝트가 단발성이 아닌 영속성을 가졌으면 좋겠다. 연홍도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완성이 아닌 예술섬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연홍도 가는길
연홍도를 가기 위해선 전남 고흥군 녹동항이나 신양선착장에서 배를 타야 한다. 고흥문화관광 누리집(tour.goheung.go.kr)에서 미리 배 시간을 확인하는 게 좋다.
자동차로 서울에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고흥IC→우주항공로를 거쳐 신양선착장으로 가면 된다.(5시간30분~6시간 소요)
열차 이용 땐 서울 용산역에서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순천역에 내려 녹동항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면 된다.(3시간30분 소요) 고속버스의 경우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 고흥터미널에 내려 녹동항으로 가는 군내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약 5시간30분 소요)
‘지붕없는 미술관’을 표방하는 연홍도의 다양한 미술 작품들. 이정국 기자
Island: 섬. 바다나 호수, 강 등의 물에 둘러싸여 있는 땅. 바다의 경우 만조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는 땅을 말한다. 사람이 정착해 경제활동을 지속하느냐 여부로 유인도·무인도를 구분한다. 경작지만 있거나 등대지기만 근무하는 섬은 무인도로 분류한다.
고흥/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