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육수가 일품인 ‘퍼 호아 파스퇴르’의 쌀국수. 이정국 기자
최근 한국은 베트남 쌀국수 열풍이다. 오래된 얘기가 아니냐고? 숙주나물과 초절임 양파를 잔뜩 넣은 미국식 프랜차이즈 쌀국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른바 베트남 현지의 맛을 구현한다는 쌀국수 가게가 생겨나면서 기존에 먹던 미국식 쌀국수와 다른 맛에 대중들은 열광하고 있다. 서울 동대문이나 경기 안산 다문화거리에서나 볼 수 있었던 베트남 현지 맛을 재현한 쌀국수 식당들은 광화문, 신사동, 홍익대 인근 등 임대료가 비싼 서울 시내 중심가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에머이’, ‘분짜라붐’ 등 베트남 본토 맛을 추구하는 프랜차이즈 외식업체들도 생겨났다. 밥때가 되면 이들 가게 앞은 항상 긴 줄을 선 인파로 북적인다. 미국식 쌀국수 가게들이 위축돼 보일 정도다. 왜 한국인들이 베트남 현지 쌀국수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베트남 호찌민에서 쌀국수를 먹어보기로 했다.
베트남에서 쌀국수(퍼)를 언제부터 먹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산업화가 시작된 100여년 전에 공장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고기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기 시작했다는 주장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수프 ‘포토푀’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최근엔 프랑스 식민지설이 유력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예부터 농경국가였던 베트남은 노동 수단이었던 소를 잘 먹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배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베트남 쌀국수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 게 된 것은, 베트남 북부 지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1950년대 중반부터다. 정치 노선 차이로 인해 남부 지방인 사이공(현재 호찌민)이나 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인들이 북부 음식이었던 쌀국수를 퍼뜨린 것이다. 원래 북한 음식인 냉면이 실향민에 의해 남한으로 퍼져 나간 과정과 비슷하다.
여기까지가 호찌민에 가기 전 문서로 습득한 쌀국수에 대한 정보다. 하지만 음식을 글로 배우는 건 ‘연애를 글로 배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 직접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쌀국수를 말할 수 있을까.
지난달 18일, 좁디좁은 비행기 이코노미석에 몸을 구겨 넣고 5시간을 참은 뒤 베트남 호찌민에 도착했다. 일부러 기내식도 먹지 않았다. 내리자마자 쌀국수를 먹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공항과 시내는 매우 가까웠다 택시 타고 30여분도 걸리지 않아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자마자 바로 호텔 근처에서 도보로 30여분 떨어진 쌀국수 집으로 향했다. 거리에 가득한 오토바이 풍경이 낯설었지만 쌀국수를 먹을 생각에 속보로 걸었다. 첫번째 목표로 삼은 쌀국수 집은 ‘퍼 호아 파스퇴르’다. 파스퇴르는 식당이 위치한 거리 이름이다. 이곳은 최근 호찌민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쌀국수 맛집이다. 여행정보 누리집인 트립어드바이저에 등록된 2907곳의 호찌민 식당 가운데 51위를 기록할 정도다.(퍼 전문점 2위)
가게가 가까워지자 벌써 이국적인 향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입에는 침이 돌고, 위산이 분출됐다. 오후 3시라는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식당 안은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붐볐다. 가게에 들어가는 순간 ‘미끌미끌’한 느낌이 발에 와닿았다. 바닥이 온통 기름이었다.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소기름의 흔적이었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인데.’ 그랬다. 이건 서울의 노포 곰탕집 하동관이었다. 미끈거리는 바닥과 식탁하며, 누린내도 비슷했다. 차림표엔 다행히 영어 설명이 있어 주문에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다. 양지, 차돌, 도가니 등 다양한 소고기가 들어 있는 ‘퍼 닥 비엣’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문했다. 번역하면 ‘쌀국수 특’이란 뜻이다. 가격은 7만5000동(베트남 화폐 단위)으로 한국 돈으로 3800원 정도다.(참고로 노점 쌀국수는 한국 돈으로 1000원인 2만동 정도로 훨씬 싸지만, 굳이 추천하진 않는다. 관광객들에겐 두배를 받는 곳도 있다.)
식탁 위에는 향신 채소와 라임이 가득하다. 이정국 기자
식탁 위를 보니 ‘풀’이 가득했다. 소나 양 같은 되새김 동물이 뜯어먹는 풀 말이다. 하나는 난초처럼 생겼고, 하나는 넓적한 고무나무 잎처럼 보였다. 흔히 알고 있는 고수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길쭉한 잎이 고수를 대신하는 쿨란트로라는 향신 채소였다. 맛은 고수와 비슷했다. 넓적한 것은 타이 바질(허브의 일종)이었다. 이건 정말 화공약품 맛이 났다. 한쪽엔 반으로 잘린 라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주문한 쌀국수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동관 ‘이오공’(2만5000원짜리 특곰탕)보다 고기가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라임을 살짝 짜 넣은 뒤, 기름이 번질번질한 국물을 한 숟갈 떠 입으로 넣자 진한 고기의 향이 느껴졌다. 느끼해질 순간, 라임의 산미가 느끼함을 없애줬다.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주는 묘한 향신료의 향이 비강 속을 감돌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젓가락으로 국수를 떴다. 마치 흰 비단옷을 입은 선녀가 나비처럼 승천하는 것마냥 하얀 쌀국수가 올라왔다. 소기름을 한껏 머금은 부드러운 쌀국수는 입술과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씹을 사이도 없었다.
“아.” 탄식이 나왔다. 이거였다. 이거 때문에 5시간 동안 온몸의 몸살을 참아가며 비행기를 탄 것이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문화적 충격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먹은 쌀국수는 무엇이었는가. 단지 국수를 쌀로 만들었다고 해서 쌀국수가 아니었다.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까지 전달되는 듯한 풍부한 한 끼였다고나 할까.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입맛을 쩝쩝 다셨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호텔 조식 뷔페에서도 쌀국수를 먹었다. 한국에서 먹었던 만원짜리 쌀국수보다 맛있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고기를 풍부하게 사용해 국물을 정성껏 뽑아낸 데에 있었다.
‘퍼 레’ 쌀국수의 두툼한 소고기. 이정국 기자
퍼 호아 파스퇴르와 함께 호찌민의 쌀국수를 양분하는 곳도 방문했다. ‘퍼 레’라는 곳이다. 이곳의 트립어드바이저 순위는 47위다.(퍼 전문점 1위) 퍼 호아 파스퇴르와 함께 막상막하라고 보면 된다. 앞선 곳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곳이라면 퍼 레는 현지인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베트남 퍼의 자존심”이라고 베트남인이 후기를 달아놓을 정도다.
전반적인 식당의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국물이나 고기에서 조금 차이가 있었다. 국물에 훨씬 기름이 많았고, 고기도 두껍게 썰려 나왔다. 한국에서 수육을 먹는 것보다 두꺼운 양지와 차돌박이가 덩어리째 들어 있어 감동적이었다.
반면 맛은 퍼 호아 파스퇴르보다 부드러웠다. 더 순하다고 해야 할까. 보기와는 딴판이었다. 한국의 냉면으로 치자면, 퍼 호아 파스퇴르는 진한 육수의 우래옥이었고, 퍼 레는 육수가 맑은 을지면옥이나 필동면옥이었다.
이번엔 식탁 위 향신료를 듬뿍 담아서 먹어보기로 했다. 쿨란트로와 타이 바질을 한주먹 집어 국수에 넣었더니 지나가던 식당 종업원이 갑자기 손을 흔들었다. ‘뭐가 잘못됐나’ 했더니, 종업원이 이파리를 하나하나 잘게 뜯어서 국수에 넣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해야 향이 더 잘 살아나고 먹을 때 식감이 좋다고 했다.
향신료를 듬뿍 넣은 쌀국수는 또 다른 맛이었다. 이국적인 향이 강화되면서, 부드러운 쌀국수에 아삭한 식감을 더해주었다. 두 식당 모두 식탁 위에 한국 쌀국수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칠리소스와 해선장이 있었지만 먹는 사람은 없었다. 숙주나물도 나오긴 했지만, 손을 대는 이가 드물었다. 고기와 국물, 그리고 부드러운 면발 자체를 즐기는 듯했다.
‘퍼 레’ 입구에 진열된 다양한 재료들. 이정국 기자
베트남엔 이런 국물이 있는 쌀국수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가 올라가는 일종의 비빔국수인 분짜와 매운 쌀국수인 분보후에도 먹어보았지만, 확실히 ‘오리지널 퍼’가 가장 맛있었다. 냉면도 가장 기본적인 평양식 물냉면이 물리지 않고 맛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에서 호찌민 현지 쌀국수 맛과 가장 비슷한 맛을 꼽으라면, 하동관 곰탕이다. 곰탕 국물에 고수 약간 넣고 쌀국수를 말아 먹으면 거의 비슷할 듯싶다.
한국에 돌아온 뒤 한 달이 됐지만, 아직 쌀국수를 먹지 않았다. 소기름이 번질번질한 바닥과 향신 채소와 라임이 상마다 그득한 쌀국수 집을 발견하기 전까지 쉽게 가지 못할 듯하다. 아, 차라리 곰탕을 포장해 와서 만들어 먹는 게 더 빠를 수도!
호찌민(베트남)/글·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소니 RX100M5로 촬영
베트남 쌀국수 고르는 법
베트남어 자체가 생소하기 때문에 베트남 쌀국수를 주문할 때 애를 먹는 당신을 위해 초간단 베트남 쌀국수 용어 정리를 해보았다.
일단 ‘퍼’(pho)라는 용어를 기억해두자. 퍼는 쌀국수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약간 넓적한 모양의 쌀국수를 말한다. 그다음으로 기억할 것은 ‘분’(bun)이다. 분 역시 쌀국수 종류다. 얇은 원통형의 쌀국수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소면을 떠올리면 쉽다.
이 두 개만 기억하면 다양한 쌀국수 조합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쇠고기인 ‘보’를 붙여 ‘퍼 보’라고 하면 쇠고기 쌀국수를 말한다. 닭고기(가) 쌀국수는 ‘퍼 가’고, 돼지고기(런) 쌀국수는 ‘퍼 런’이다.
그렇다면 ‘분보후에’는 뭘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분은 소면 형태의 국수고, 보는 쇠고기다. 후에는 베트남 중부지역을 말한다.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먹던 쇠고기 쌀국수인 셈이다.
비빔국수의 일종인 ‘분짜’는 분과 짜가 합쳐진 말이다. 짜는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 완자를 말한다. 돼지고기 완자와 함께 먹는 쌀국수란 얘기다. ‘분짜조’도 있다. 짜조는 베트남식 튀김만두인데 이것도 함께 먹는 쌀국수를 분짜조라 한다. 이런 비빔쌀국수에 쓰는 소스를 ‘느억맘’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액젓이라고 보면 된다.
Noodles
국수. 밀, 쌀, 감자 등 곡물을 가루 내 반죽한 뒤 가늘고 길게 만든 음식. 다양한 재료로 만든 국물 또는 소스와 함께 먹음. 동양권에서는 긴 형태 때문에 장수의 상징으로 여김. 기원전 6000~5000년 전부터 인류가 먹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동서고금 최고의 인기 음식.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