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창작 놀이를 하는 릴리쿰. 사진 고승범
차림표에 적힌 요리명은 틀림없는 ‘회로 피자’였다. ‘화로 피자’나 ‘화덕 피자’가 아니었다. 피자는 피자인 것 같은데 ‘회로’라니, 도대체 무슨 회로일까? 설마 청소기나 선풍기에 들어 있는 회로일까? 가변저항이니 전도체니 하는 전기회로? 중·고등학교 물리 수업 시간 이후로는 당최 볼 일이 없었던 바로 그 회로? 아니나 다를까 ‘릴리쿰’의 선윤아(36)·박지은(37)씨는 말했다. “전기회로가 토핑된 피자예요. 밀가루로 반죽한 도 위에 감자와 레몬을 섞어 만든 무스를 올리고, 무스 사이에 배터리와 엘이디(LED) 전구를 꽂아요. 전구에 불이 켜지면 피자가 완성된 거예요.”
이때 피자소스 대신 감자·레몬 무스를 바르는 이유는 감자와 레몬이 전류를 잘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흔히 쓰는 식재료를 전선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컨덕티브 팬케이크’를 만들 때는 요구르트를 뿌리는데, 이 역시 ‘통전’(전류가 흐름)으로는 최고인 재료다. “요리 재료로 전기회로를 만들어보면 그 원리가 더 재밌게 이해되지 않을까요? 요구르트를 이용한 ‘컨덕티브 팬케이크’는 완성되면 소리가 나는 요리였어요. 전구 대신 버저를 올렸거든요.”
이미 여러 권이 나온 <월간 실패>. 사진 고승범
선윤아씨와 박지은씨를 포함한 다섯명이 이런 식으로 고안해낸 ‘전자요리’들은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했다. ‘곰(젤리)고문 샐러드’, ‘소리 지르는 자몽 디저트’, ‘노래하는 바나나’, ‘압전 보드카 식전주’ 등. 지난 27일, 서울 연남동의 한 차고를 개조한 ‘릴리쿰’에서 만난 선씨와 박씨에게 “처음에는 ‘전자요리’가 ‘3분 카레’ 같은 전자레인지 요리를 뜻하는 줄 알았다”고 하자 박씨가 웃으면서 답했다.
“요리할 때 간장이 없으면 소금을 치잖아요. 회로도 요리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응용하고 조합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것들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초기 멤버 한명이 아이디어를 냈어요.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전자를 요리처럼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전자요리’의 레시피와 키트는 그렇게 탄생했다.
릴리쿰의 벽에는 감성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가 걸려있다. 사진 고승범
섣부른 오해를 막기 위해 일찍이 말해두자면, ‘릴리쿰’은 용산구 이태원에 첫 둥지를 튼 4년 전부터 ‘전자요리’ 워크숍을 꾸준히 열고 협력기관의 의뢰에 맞춘 키트를 소량 제작해 오면서도, ‘전자요리’를 제대로 유통하거나 상품화하지는 않았다. ‘전자요리’는 그저 ‘릴리쿰’이 시도하는 다양한 실험의 하나일 뿐이다. ‘릴리쿰’은 바느질이든 목공예든 실크스크린이든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 하는 곳이며, 실제로 그들의 아지트에는 재봉틀과 목공기구는 물론 레이저커터와 3D프린터에 이르기까지 없는 장비가 없었다.
“일반적인 디아이와이(DIY)공방과 다른 점이요? 디아이와이공방이 대개 하나의 제작기술에 집중하거나 제품을 상품화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면, 저희는 다양한 기술에, 기술을 대하는 태도에, 기술을 활용한 확장성에 관심이 있어요.” 그랬다. 애초에 ‘소셜디자인’(사회적·환경적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을 염두에 둔 디자이너들이 생업을 ‘때려치우고’, ‘4대 보험’이 없는 삶을 자처하며 모인 곳이 바로 ‘릴리쿰’이었다. 그들이 고심 끝에 축약한 ‘릴리쿰’의 정체성은 이런 것이었다. “제작·놀이·실험의 아지트요.”
지난해 <손의 모험>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한 ‘릴리쿰’이 손을 쓰는 작업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삶에서의 주체성 회복’이다. “사람들이 만들어진 제품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삶 외에도 다른 ‘옵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좋겠어요.” ‘릴리쿰’의 모든 작업에는 이런 염원이 담겨 있으며, ‘전자요리’도 예외가 아니다. “어릴 때는 알전구 같은 걸 연결해보며 놀다가도 성인이 되면서는 그런 기술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잖아요. 전기, 전자는 사실상 일상과 가장 밀접한 기술인데도 말이에요. 이걸 다시 삶 속으로 끌어오고 싶었어요.”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릴리쿰’의 면면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릴리쿰’이 해온 활동들은 실로 기발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재치가 넘쳐흐른다. 레고블록으로 조명 만들기, 핀란드 요리 먹으면서 1박2일 실크스크린 작업하기, 딱지치기 해부하기, ‘혐오 칵테일 바’ 운영하기, 흙놀이 캠핑, 전자소꿉놀이 워크숍, 공공놀이터 ‘킁킁말랑말랑쿵쿵’ 등. 호기심이 샘솟는 건 순식간이다.
릴리쿰을 만든 선윤아(사진 오른쪽)씨와 박지은씨.
“‘딱지를 ‘덕질’ 하는 전시를 기획한 적이 있었는데, 딱지의 기원과 역사부터 종류, 접는 법, 놀이법까지 낱낱이 해부하는 전시였어요. 어떤 재료로 어떻게 접어야 공격률과 방어율이 높아지는지도 탐구해봤고요. 그때 딱지대회도 같이 열었는데 장마철이어서 그랬는지 아무도 안 왔어요.(웃음)” 선씨의 말을 박씨가 되받았다. “아냐, 아기들 왔잖아, 아기들. 하지만 ‘딱지광’이 되겠다는 애들은 없었어요.(웃음)” 딱지를 접을 줄 알았을까? “아뇨. 딱지를 ‘던질 줄 아는’ 애들이었어요.(웃음) ‘우와, 내가 더 멀리 던질 거야!’ 하더이다.”
재기발랄한 아이디어의 비결이 뭐냐고 묻자 박씨가 말했다. “드립(즉흥적 발언)력? 그냥 저희끼리 드립을 많이 쳐요.” 재기발랄하기로 따진다면 몇년 전 기획했던 ‘혐오 칵테일 바’도 빼놓을 수 없다. ‘혐오 칵테일’의 메뉴는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여성과 스타벅스’를 섞으면? ‘된장녀 칵테일’. ‘여성과 톰보이’를 섞으면? ‘레즈비언 칵테일’. ‘게이와 연애’를 섞으면? ‘항문섹스 칵테일’. ‘레즈비언과 판타지’를 섞으면? ‘포르노 칵테일’. 세상에, 혐오를 풍자와 유희로 승화시키다니, 이 얼마나 멋진 아이디어인가!
“사람들이 주문하는 걸 힘들어했어요. ‘된장녀 칵테일’ 같은 건 그래도 쉽게 말하는데, ‘항문섹스 칵테일’은 그렇지 않았죠. ‘항, 항, 항문섹스 주세요’라고 더듬거리고(일동 웃음), 게임에서 지면 벌칙처럼 주문했어요.”
핀란드 요리를 먹으면서 1박2일 실크스크린을 완성하는 워크숍을 하고 난 뒤에는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전문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은’ 워크숍이었지만, 뭔가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좁은 곳에 모여 복닥복닥 밤을 새우고, 그걸 결국 해냈다는 게 값지다”고 말이다. 선씨와 박씨는 말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워크숍이 전문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을 때가 많긴 해요.(웃음) 전문적인 장비가 부족해서기도 하지만, 저희는 했던 걸 또 안 하고, 매번 새로운 걸 하거든요. 노하우가 쌓일 만하면 또다시 새로운 걸 시도하니까요.”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결코 ‘장인정신’이 아니다. 그들은 차고 넘치는 재능을 가진 전공자들임에도 ‘아마추어리즘’을 지향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쓸고퀄’(쓸데없이 고퀄리티)과 ‘놀이 정신’이야말로 ‘릴리쿰’의 기조라고 말한다. “‘릴리쿰’이라는 단어의 뜻은 라틴어로 ‘나머지’, ‘잉여’라는 뜻이에요. ‘릴리쿰’의 놀이분과에 속하는 활동 이름은 ‘땡땡이 공작’이고요. 모든 사람이 다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잖아요. 아마추어도 뭐든 놀이처럼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릴리쿰에서 이뤄지는 여러 가지 창작활동에 쓰이는 재료들. 사진 고승범
<월간 실패>는 ‘릴리쿰’의 이런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독립출판물이다. 실패는 누구나 달갑지 않을 것이며, 감추고 싶을 것이라는 편견이 무색하게도 ‘릴리쿰’은 그동안 겪은 실패담을 <월간 실패>에 담아왔다. <월간 실패>는 이제 60권이 넘는다. “지난 4월부터는 아트북 형태로만 볼 수 있던 <월간 실패>를 포털 다음의 콘텐츠 유통채널 ‘브런치’로도 발행하기 시작했어요. ‘릴리쿰’의 활동을 처음부터 볼 수 있는 아카이빙(압축보관)이에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하면서도 유쾌함을 잃지 않는 사람들과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다. 두 시간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앞으로는 뭘 하고 싶은지 물었다.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재밌는 걸 계속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계속해서 재밌으면 좋겠어요.”
강나연 객원기자 nalotos@gmail.com, 사진 고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