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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호텔 열차’ 타고 시공간을 탈출하다

등록 2019-09-26 10:15수정 2019-09-26 20:14

여행

‘레일 크루즈’ 해랑 타고 1박2일 여행
맥주·와인 먹다 승무원 난타·마술쇼 보고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샤워하고 침대에 잠들고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목적지는 열차였노라
지난 20일 충남 서천군 김인전 공원에서 바라 본 해랑. 김선식 기자
지난 20일 충남 서천군 김인전 공원에서 바라 본 해랑. 김선식 기자
‘호텔 열차’ 해랑을 탄다고 하니 주변에선 두 단계의 반응을 보였다. 처음엔 ‘너무 신기하다’고 했고, 가격을 얘기하면 ‘너무 비싼 거 아니냐’고 했다. 두 가지 반응에 모두 수긍했다. 여느 ‘호캉스’(호텔+바캉스)나 ‘1박2일 패키지여행’과 비교하면 둘 다 그럴 만했기 때문이었다. 1박2일을 해랑에서 보낸 뒤 깨달았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해랑의 미덕은 호화로움이나 편리함이 아니라 ‘이질적인 시공간’이었다. 열차 안에서 쇼를 관람하다가 덜컹거리는 객실 안에서 샤워했고, 객실 침대에 누워 터널을 통과했다. 그조차 무료하면 무한정 제공하는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기착지 전북 군산, 전남 여수, 충남 서천 여행지를 둘러봤지만, 해랑 여행의 목적지는 늘 모든 일정 끝에 향하는 곳, 열차 객실이었다. 지난 19일 오전 9시, 서울역 9번 탑승구에서 ‘해랑’에 올랐다.

‘하우 젠틀 이즈 더 레인(How gentle is the rain)~.’ 1997년 개봉한 영화 <접속> 주제곡(a lover’s concerto)이 객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이어 안내 방송. “해랑 고객 여러분, 곧 열차가 출발합니다. 열차는 서울역을 출발해 군산역에 오후 1시10분 정차할 예정입니다. 1박 2일 동안 편안한 여행하시길 바랍니다.”

해랑은 2008년 11월 운행을 시작했다. 열차 무궁화호를 개조한 ‘호텔 열차’다. 침대가 들어 있는 객실이 23~24개다. 원래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남북공동응원단을 육로를 통해 중국에 실어 나르려고 탄생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그 꿈이 깨졌다. 대신 ‘해와 함께 전국을 누빈다’는 뜻의 관광 열차 ‘해랑’으로 재탄생했다. 현재 동력차를 제외하고 여덟량짜리 열차 두 대(해랑 1호, 해랑 2호)가 11년째 운행 중이다.

해랑 1호 디럭스룸 내부. 김선식 기자
해랑 1호 디럭스룸 내부. 김선식 기자
1호 차 101호는 디럭스룸이다. 해랑은 총 네 종의 객실(디럭스, 스위트, 스탠더드, 패밀리)이 있다. 2인실 디럭스룸 안에는 더블베드, 티브이(TV), 간이 책상, 거울, 인터폰이 있다. 객실 안에 작은 화장실과 샤워실이 딸려 있다. 침대 매트는 평범했고 이불은 푹신하고 깔끔했다. 침대에 눕자 익숙한 진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쿵쿵다다 쿵쿵다다’. 고향 갈 때 무궁화호 좌석에 몸을 맡기고 잠들며 들었던 바로 그 진동 소리다. 회상에 잠길 틈도 없이 안내 방송이 또다시 흘러나왔다. 5호 차에서 승무원들이 공연할 예정이란다. 해랑은 1~3호 차와 6~8호 차는 객실, 4호 차는 카페(선라이즈룸), 5호 차는 이벤트룸(포시즌룸)이다. 카메라를 들고 포시즌룸으로 향했다.

지난 19일, 해랑 안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김유리 승무원. 김선식 기자
지난 19일, 해랑 안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김유리 승무원. 김선식 기자
먼저 국악을 전공한 김유리 승무원이 가야금을 켰다. 승무원 다섯명이 호흡을 맞춘 아카펠라 공연이 이어졌다. 단연 백미는 난타 공연이었다. 승무원 넷이 북채를 들고 북을 두드려대는 본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삽시간에 객차는 환호성과 북소리와 기차 소리가 뒤범벅되어 들썩거렸다. 김수정 승무원은 “해랑으로 수학여행 와서 장기자랑 시간에 난타 공연을 한 초등학생들이 인상적이어서 그 선생님에게 두 차례 난타를 배우고 연습했다”고 말했다. 난타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승객들에게 무제한 제공하는 맥주와 와인을 한 잔 두 잔 비웠다. 어느덧 출발 4시간 만에 군산역에 도착했다.

지난 19일, 해랑에서 난타 공연 중인 승무원들. 김선식 기자
지난 19일, 해랑에서 난타 공연 중인 승무원들. 김선식 기자
역전에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해랑은 정차역마다 전용버스에 승객을 태워 현지 여행지와 식당을 돈다. 군산역에서 6㎞ 거리 군산 근대역사박물관에 갔다. 1930년대 가옥, 잡화점, 고무신 가게, 인력거조합, 주조회사 등을 재현한 전시실부터, 해양 물류와 독립운동 역사를 기념하는 전시실 등을 둘러봤다. 다시 3㎞ 떨어진 경암동 철길마을로 갔다. 1944년 4월부터 2008년 6월까지 화물열차가 다니던 철길을 따라 마을이 들어선 곳이다. 오전에만 두 차례, 열차가 지나갈 땐 역무원들이 열차에 올라타 호루라기를 불고 고함을 쳐서 주민들 통행을 제지했다고 한다. 그러면 주민들은 밖에 널어놓은 고추나 살림살이, 그리고 풀어 놓은 강아지들을 안으로 들였다고 한다.

지난 19일, 전북 군산시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교복을 빌려 입고 사진 촬영 중인 여행객들. 김선식 기자
지난 19일, 전북 군산시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교복을 빌려 입고 사진 촬영 중인 여행객들. 김선식 기자
이젠 기차가 오지 않는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중고등학생부터 중년 여성들까지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 1970년대 교복을 빌려 입고 있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쪽 다리를 철로에 올린 채 사진을 찍고 즐거워한다. 철길 따라 교복 대여점과 옛 ‘불량식품’ 가게들이 한 집 건너 한 집이다. 한 좌판에선 소다와 설탕을 구워 납작한 황갈색 과자를 만드는 모습을 여행객들이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다.

경암동 철길마을에 있는 ‘불량식품’ 가게. 김선식 기자
경암동 철길마을에 있는 ‘불량식품’ 가게. 김선식 기자
다시 열차에 오를 시간이다. 해랑은 다른 열차들과 사전에 이동 시각을 조율하므로 시간을 어길 수 없다. 해랑은 여수엑스포역을 향해 달렸다. 여수 해상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저녁 8시30분, 8인승 케이블카를 타고 약 1.5㎞ 거리 바다를 건넜다. 어둠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놀아 정류장 전망대’. 거북대교와 장군섬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다. 바다를 물들인 휘황찬란한 불빛 때문이었을까. 이곳에선 밤하늘이 더 새까맣게 보인다. 전망대에서 1시간 정도 머물면서 새까만 여수 밤바다를 마음에 담았다. 밤 9시30분, 다시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충남 서천군에 있는 장항역으로 향했다.

지난 19일 ‘놀아 정류장 전망대’에서 바라 본 여수 밤바다. 김선식 기자
지난 19일 ‘놀아 정류장 전망대’에서 바라 본 여수 밤바다. 김선식 기자
모두 잠들 시간, 달리는 열차 객실 안에서 샤워를 했다. 수압은 낮았고 가끔 덜컹거릴 땐 벽을 붙잡아야 했다. 열차는 싣고 다니는 물탱크 수량이 한정돼 있어서 물을 아껴 쓸 수밖에 없다고 한다. 흔들리는 몸으로 평소보다 오래 물을 뿌리는 샤워는 ‘열차 호텔’에 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아도 객실은 깜깜했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부드럽게 추나요법(삐뚤어진 뼈 맞추는 법) 시술을 받는 것처럼 앞뒤로 흔들리는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7시, 잠에서 깨어보니 장항역이었다. 해랑은 새벽 1시부터 장항역에 정차해 있었다고 한다.

지난 20일, 충남 서천군 장항 송림. 김선식 기자
지난 20일, 충남 서천군 장항 송림. 김선식 기자
아침 식사를 하고 장항역에서 6㎞ 거리 장항 송림으로 갔다. 전용버스에 나연옥(63) 서천군 문화관광해설사가 동승했다. 나 해설사는 “장항 송림에는 소나무 13만 그루가 심어져 있다”고 했다. 보랏빛 맥문동 꽃이 막 지기 시작한 풀밭엔 수령 50~60년 소나무가 빼곡했다. 소나무 사이를 10여분 걷자 바다와 솔숲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고공 산책길(스카이워크)이 나왔다. 높이 15m, 길이 250m ‘스카이워크’에서 서해와 금강 하구, 송림, 백사장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고소공포증으로 바닥만 보며 걷던 이들도 스카이워크 꼭짓점에 닿으면 아찔한 풍경을 기꺼이 마주했다.

‘장항 스카이 워크’에 오른 여행객들. 김선식 기자
‘장항 스카이 워크’에 오른 여행객들. 김선식 기자
다시 약 10㎞ 거리 국립생태원으로 향했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온실 ‘에코리움’은 전 세계 5대 기후(열대관, 사막관, 지중해관, 온대관, 극지관) 생태를 재현해 2400여종 동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야외 습지와 숲까지 더하면 약 30만평 규모에 총 5400여종 동식물이 살고 있다. ‘작은 지구’라 불러도 손색없는 생태계의 보고다. 어린이 여행객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열대관 ‘코뿔이구아나’, 사막관 ‘미어캣’과 사막여우, 극지관 펭귄, 모형 북극여우, 모형 북극곰 앞에 유독 어린이들이 붐볐다.

지난 20일, 충남 서천군 국립생태원 ‘에코리움’ 전경. 김선식 기자
지난 20일, 충남 서천군 국립생태원 ‘에코리움’ 전경. 김선식 기자
다시 열차로 돌아갈 시간, 장항역에서 해랑에 올랐다. 전 일정을 동행한 승무원들이 마지막 공연을 열었다. 김수정 승무원이 홀로 팝송 ‘이즌 쉬 러블리’(Isn’t she lovely)를 열창하며 간주 땐 ‘카주’(아프리카 서식 동물 소리 본떠 만든 피리) 연주를 뽐냈다. 이어 송창현 승무원이 마술쇼를 시작했다. 10종 가까운 마술에 마음을 빼앗긴 관객들은 한 가지 마술이 끝날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이쯤 되자 너도나도 해랑 승무원 채용 자격조건을 궁금해했다.

지난 20일 해랑에서 ‘마술쇼’ 공연 중인 송창현 승무원. 김선식 기자
지난 20일 해랑에서 ‘마술쇼’ 공연 중인 송창현 승무원. 김선식 기자
모든 일정을 마치고 장항역에서 서울역까지 약 3시간이 남았다. 객실로 돌아가 창문 블라인드를 내렸다. ‘여독이나 풀어야지’ 생각하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달리는 기차 안 홀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시간, 시공간을 잊을 만큼 단절된 그 시간이 아까워 잠은 잘 오지 않았다.

해랑/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해랑 여행 수첩

해랑 이용정보 ‘해랑’이 새로운 여행상품을 내놨다. ‘가을 단풍 테마’라는 이름의 서울-단양-안동-대구-청도-순천-서울(2박3일·디럭스룸 2인 기준 263만원) 코스와 ‘힐링 트레인’이라는 서울-순천-대구-경주-정동진-평창-서울(2박3일·디럭스룸 2인 기준 263만원) 코스다. ‘가을 단풍 테마’는 10월22일, 11월5일, 11월12일 출발하고, ‘힐링 트레인’은 10월29일 출발한다. 기존 전국 일주 상품(서울-순천-부산-경주-정동진-동해-태백-서울·2박3일·디럭스룸 2인 기준 244만원), 동부권 일주 상품(서울-단양-영월-경주-서울·1박2일·디럭스룸 2인 기준 160만원), 서부권 일주 상품(서울-전주-순천-서천-군산-서울·1박2일·디럭스룸 2인 기준 160만원)도 판매한다. 각 상품은 해랑을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현지 식사비, 현지 여행지 입장료와 체험비, 가이드, 열차 내 와인·맥주·음료 및 다과 등을 포함한 가격이다. 한국철도공사는 “해랑은 효도 관광 상품으로 많이 팔리지만 최근엔 가족 여행 상품으로도 인기가 많다”며 “재구매율이 30% 이상”이라고 밝혔다.(문의 1544-7755/railcruise.co.kr)

식사 해랑 여행은 여행지마다 현지 음식을 제공한다. 충남 서천군 ‘강변횟집’은 ‘생복지리탕’(1인당 2만5천원)을 주문하면 푸짐한 해물·생선회가 같이 나온다.(마서면 장산로 714/041-956-8874) ‘일송횟집’은 4인 단체상(12만원)을 주문하면 생선회와 매운탕, 박대구이와 떡갈비, 새우튀김 등을 낸다.(장항읍 장산로 626/041-956-5733)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해랑/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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