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제주탐나라공화국 ‘황금지’ 앞. 김선식 기자
아득한 옛날 화산섬 제주의 탄생을 상상해 본다. 180만 년 전, 수심 100m 얕은 바다에서 마그마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화산재가 쌓여 바다 위로 섬이 생겼다. 여기저기 크고 작은 화산들이 80여 차례 분출하면서 한라산과 360여개 오름을 만들었다. 온통 검은 현무암으로 뒤덮인 땅에는 어디선가 씨앗 하나가 날아왔을 것이다. 한 포기 풀이 두 포기가 되고, 한 그루 나무는 숲이 되어 검은 땅을 푸르게 뒤덮었다. 그걸 오래도록 지켜본 누군가는 생각했을 것이다. ‘초록 얼굴을 한 생명의 신이 드디어 검은 용암을 물리쳤구나.’ 잡초와 나무만 무성한 돌덩어리 땅에서 인간이 처음 시작한 일은 ‘땅 파는 일’이었을 것이다. 돌을 깨고 땅을 파서 집부터 짓고, 흙을 모아 밭을 일구고, 온갖 이유로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어야 했을 테니까. 가끔 심심하면 돌에 무늬를 새기고, 돌을 녹여 그릇을 만들고, 돌을 쌓아 괴상한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서귀포시 안덕면 상창리 ‘파더스가든’ 야자수 길에 핀 핑크뮬리. 김선식 기자
2019년 제주엔 제주의 근원과 태생을 들추는 ‘불온한’ 자들이 있다. 6년째 현무암 돌빌레(땅에 묻힌 넓적한 바위를 뜻하는 제주 사투리)를 깨고 땅을 파고 있다. 맨살이 드러난 지하 현무암 바위 위로 깨진 돌을 다시 쌓았다. 성과 오름과 동물상이 예술품처럼 우뚝 솟아 있다. 마치 ‘모두 이걸 보라. 제주는 애당초 돌이었다’고 말하는 듯. 어차피 돌 뿐이었던 땅, 버릴 것 하나 없다며 온갖 쓰레기를 모아다가 현무암 바위에 무늬를 입혔다. 이상하게도 검은 현무암에 생명력이 생긴다. 제주에 화산 문화만큼 소중한 건 없다며 화산석으로 커피 농사를 짓는 이도 있다. 커피 재배만으론 성에 안 차는지 화산수에 커피 생두를 발효하고 화산송이(화산이 분출하면서 공기에 닿아 굳은 가벼운 돌)를 넣어 숙성해 와인과 코냑을 만들었다.
제주는 씨앗이 움트고 나무가 자라 태어난 땅이라는 듯 지금도 쉼 없이 씨앗 뿌리고 나무를 심는 이들도 있다. 서귀포 중산간에서 지난 53년 동안 2대에 걸쳐 나무만 심어 온 한 집안은 보란 듯이 3만평(9만9천㎡) 정원을 외부에 공개하기로 했다. 한 철학자는 제주 온실에서 희귀 열대 식물 씨앗을 뿌려 수만 그루 나무를 키운다.
탐나라공화국, 제주 커피 수목원, 파더스가든, 야자나라. ESC는 ‘화산과 나무의 섬’ 제주에 있는 ‘별난 여행지’ 네 곳을 찾아 떠났다. 단지 돌 파고 씨앗 뿌린 그곳에선 자연이 예술을 만났고 인간은 자연을 만났다. 태곳적 제주 화산 터에서 그랬듯이.
제주/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참고서적 <한반도 자연사 기행>(조홍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