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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죽은 자들의 잔치

등록 2019-10-31 09:20수정 2019-10-31 19:00

김태권의 지옥 여행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망자의 피투성이 행렬. 죽임당하던 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에, 가슴에 칼을 꽂고 걸어 다닌다. 삐쭉삐쭉 촘촘하게 가시가 돋은 바퀴를 든 이도 있다. 날이 잘 드는 무두질 칼에 가죽이 벗겨져 죽은 사내는 자기 살가죽을 팔에 둘렀다. 목이 잘린 남자는 제 목을 들고, 눈알이 뽑힌 여성은 눈알을 쟁반에 받쳐 들었다. 신기한 것은 이들의 표정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소리를 지르거나 찌푸리기는커녕 즐겁다는 듯 웃고 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려고 길을 나선 인간들 사이에서 이들은 누구인가? 오늘 전 세계 어디에서든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들도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집을 나선 존재인가? 굳이 따지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손에 든 고문 기구니 처형 도구가 정말로 뾰족하고 날카롭다. 남을 놀래주려고 이렇게까지 공들여 분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다, 이 상처는 B급 공포영화를 흉내 낸 핼러윈 분장이 아니다. 진짜로 베고 잘린 상처다. 그렇다고 병원에 연락하지는 말자. 정말 죽은 사람들이니까.

이들은 크리스트교의 순교 성인이다. 평소 천국에 살다가 한 해에 한 번, 10월31일 핼러윈 밤에 이승에 내려온다는 그들이다. 장난을 치거나 사탕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핼러윈 이튿날인 11월1일이 만성절, 즉 ‘모든 성인의 날’이기 때문이다. 핼러윈이라는 이름부터가 ‘성인’(hallow)의 날 ‘이브’(eve 또는 even)에서 왔다. 18세기 무렵 ‘핼로-인’(Hallow-E’en)이라고 쓰다가 지금은 ‘핼러윈’(Halloween)이 됐다. 다음다음날인 11월2일은 만령절 또는 위령의 날. 성인 아닌 모든 죽은 사람을 기리는 날이다.

이렇게 볼 때 핼러윈을 쇠는 원래 취지는 경건한 것이었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조상님 유령을 만나는 날이니 우리가 추석에 차례 지내는 마음이나 비슷했으리라.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죽은 이가 돌아온다는 점이 퍽 두려웠나 보다. 전을 부치고 제사상을 차린다는 극한의 공포(?)가 없어서 그랬을까. 잠이 안 오는 늦가을 밤늦도록 으스스한 이야기를 나누던 전통이 공포영화를 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코스프레’ 잔칫날이 되었다.

오해는 마시길, 핼러윈의 원뜻을 되살려 거룩하게 보내자는 고리타분한 말씀을 드릴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반대다. 크리스트교 성인들 이야기가 눈길을 못 끌면 어쩌나 싶어 흥성흥성한 핼러윈 분위기에 묻어가려는 것이 나의 속셈이다.

천국에 산다는 성인들이 어째 이런 딱한 모습일까. 종교 미술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인 한 명 한 명 이름을 적고 설명을 쓰기 어렵다 보니 어떤 방법으로 처형되었는지 보여주는 도구를 직접 든 모습으로 그린 것이다. 불교 미술의 ‘지물’과 비슷하다고 할까. 아무려나 화가의 편의를 위해 성인이 영원히 고통을 겪게 되었다.

성인의 고통은 이뿐이 아니다. 가톨릭에는 모든 성인을 부르는 기도가 있다. 유명한 성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혹시 빠진 성인이 있을까 봐 “모든 순교 성인이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기도한다. 전 세계에서 24시간 내내 각자 자기네 언어로 민원을 넣는 셈이다. 기도를 드리는 쪽이야 성인이 들어주니 든든하겠지만, 성인 쪽은 감정노동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이다.

성인이 천국에 살면서도 이렇게 아프고 바쁘다. 그렇다면 지옥 생활은 어떨까? 생전에 과로에 시달리던 ‘헬조선’ 사람은 저승에 적응도 잘할까?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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