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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게가 아니라 계, 탔어요”

등록 2020-02-23 10:23수정 2020-02-23 10:25

울진 대게 여행
‘대게의 고향’ 왕돌초 해역 인근 울진
앞바다 물색은 피카소도 울고 갈 풍광
불영사계곡·솔숲·성류굴 등 볼거리 만발
장날 만난 뻥튀기 아재, 나물 할머니 등
회국수도 별미지만 대게가 진짜 맛나
간 김에 들르는 온천은 보너스
동해에서도 물빛이 곱기로 소문난 울진 바다는 풍요롭기까지 하다. 사진 이우석 제공
동해에서도 물빛이 곱기로 소문난 울진 바다는 풍요롭기까지 하다. 사진 이우석 제공

“게를 찔 때는 요래 배때기를 우로 올리가 쌓아야 됩니더. 찌모(게)장이 대번에 아래로 쏟아지니더. 그나저나 걱정이니더. 오늘 대게 한 마리 경매가가 만사천원이니더. 이래사 축제고 머고 하겠니껴”

이달 초 울진 후포리에서 만난 ‘후포 대게상인회’ 사무장 임효철(52)씨는 솥에 게를 찌며 노래 대신 푸념을 쏟아냈다. 설 연휴에 이은 풍랑 탓에 대게잡이 배가 며칠째 출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에서 내린 대게 더미는 옹색했지만, 풍랑이 잦아들어 출어 준비를 하는 항구는 공연히 평온해 보인다. 울진의 대게잡이 배들은 대부분 연근해인 왕돌초 해역으로 출항한다. 여의도의 2배 면적인 15㎢에 이르는 수중 거대 암초인 왕돌초는 대게가 서식하기 좋은 곳으로 이른바 ‘대게의 고향’으로 불린다. 후포 해안선에서 약 23㎞ 떨어져 있다.

결국 축제(울진대게와 붉은대게 축제)는 열리지 않았다. 대게 가격 탓은 아니고 ‘코로나19’ 확산방지 차원에서 전격 취소된 것. 덕분(?)에 축제에 쓰지 못할 물량으로 울진은 당분간 대게 풍년(?)을 맞을 전망이다. 대보름이 지나면 대게 다릿살도 꽉꽉 들어찬다. 사람들은 또 자연의 섭리를 굳게 믿고 배를 먼바다로 띄운다.

겨울에 더 좋은 울진 여행

멀어서 더 좋은 곳도 있다. 그래서 여행이니까 말이다. 음식 맛까지 좋으면 더할 나위 없다. 멋진 풍경과 쉴 곳까지 있다면? 제아무리 ‘결정 장애’에 시달리는 이라도 선택이 쉬워진다. 새해 뭔 일을 하느라 좀이 쑤시더니 급기야 ‘바다 결핍증’까지 생겼다. 주저 없이 울진을 떠올린 것은 그 바닷속 맛난 먹거리 때문이다.

경상북도 울진. 서울로부터 아득히 먼 곳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에스비에스>(SBS) 프로그램 <백년손님>에 등장한 ‘후포 남서방’처럼 연고가 있거나 뭔가 좀 안다는 사람만 이곳을 찾았다. 그래 봤자 경북이니 직선거리 상으론 더 먼 지역도 많겠지만, 산 어깨를 이리저리 감아치던 라면 가락 같던 길이라 행차가 오래 걸렸다. 그저 고불고불하니 썩 좋지 않았던 길을 쭉 펴니 이젠 많이 편해졌다. 이젠 꽤 알려져 많은 이들이 울진에서 쉬어간다. 특히 평창 겨울올림픽 덕에 강릉까지 고속열차가 생겨, 강릉역에서 차를 빌려 타고 해안풍경을 감상하며 내려와도 좋다. 그야말로 눈부신 바다 풍경이 내내 일정에 동행한다.

푸르디푸르다. 무려 112㎞의 울진 앞바다 물색은 그야말로 ‘파랑의 정석’이다. 마티스, 고흐, 피카소의 푸른색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이어진다. 수채와 유채, 파스텔의 블루 톤이 이토록 절묘하게 덧입혀진 바다가 또 어디 있을까. 제주도라 해도 긴장할 판이다. 파랑의 바다와 짙은 하양의 눈을 이고 늠름히 선 태백산맥, 길은 그 가운데를 꿴다. 이 울진 해안도로는 진주목걸이를 빼닮았다. 그저 바람과 색을 즐기며 액셀러레이터에 발만 얹어놓으면 된다.

‘캔디바’ 색으로 밀려와 물보라를 일으키는 울진 앞바다. 사진 이우석 제공
‘캔디바’ 색으로 밀려와 물보라를 일으키는 울진 앞바다. 사진 이우석 제공

울진(蔚珍). 이름처럼 진귀한 보배가 무성한 곳이다. 자연적인 것은 물론, 역사·문화적, 때론 미각을 자극하는 보배들도 수두룩하다. 자연만 꼽아 봐도 그렇다. 바다, 강, 계곡, 산, 숲, 천연동굴, 온천 등 없는 게 없다. 한국의 그랜드캐니언으로 불리는 불영사계곡을 위시해, 금강송 명품 솔숲과 성류굴 등이 명승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까닭이다.

요새 사람들이나 ‘서울, 서울’ 하지만 예전엔 살기 좋은 곳에 모여 살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울진 땅엔 많은 이들이 모여 살았다. 후포리 등기산에는 구석기 선사 유적이 있다. 신라, 고려, 조선 모두 울진에 관청을 두고 관리했다. 특히 울릉도를 관리하는 수토사(搜討使)들이 순풍(順風)을 기다리던 대풍헌(待風軒)도 울진 구산에 있다. 대풍헌 인근 월송정은 경주 남산 못잖은 곰솔숲으로 유명하다. 대낮의 풍경도 눈이 시릴 만큼 좋아, 감지덕지 고마울 따름이다.

월송정 앞에 커피숍이 생겼다. 고가(古家)를 개조한 고즈넉한 카페 문틈으로 커피 향이 비집고 나와 알싸한 솔향과 어우러지니 더욱 향기롭다.

월송정 곰솔숲은 바다와 이어진 서정적 풍경을 자랑한다. 사진 이우석 제공
월송정 곰솔숲은 바다와 이어진 서정적 풍경을 자랑한다. 사진 이우석 제공

울진, 맛을 만나는 ‘맛남의 광장’

눈이 즐거우니 배도 금세 꺼진다. 죽변항 어느 중국집에서 ‘비빔짬뽕면’을 주문했다. 대구 경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메뉴다. 매콤하게 조려낸 해물 소스를 면과 비벼 먹는 방식인데 끈끈이라도 부어넣었는지 입에 착착 붙는다. 짬뽕이 아니라 오징어 볶음을 닮았다. 맛은 진하고도 강렬하다. 스스로 대견할 만큼 눈 깜짝할 새 해치웠다. 종업원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이 집은 ‘과도한 셀프서비스’ 방식이라 만날 수 없었다.

죽변 제일반점의 비빔짬뽕밥. 사진 이우석 제공
죽변 제일반점의 비빔짬뽕밥. 사진 이우석 제공

마침 가던 날이 장날이었다. 울진장이 섰다기에 찾아갔다. 선질꾼(立負商)이 다니던 그 장이다. 19세기 초 봉화와 울진을 잇는 십이령길이 트이자, 당시 일제에 의해 해체된 보부상 대신 선질꾼이 생겨나 관동 관서 지역의 물류를 유통했다. 선질꾼은 진귀한 물건을 파는 봇짐장수인 보상(褓商)보다는 생필품을 취급하는 등짐장수(負商)에 가깝다. 서서 지는 지게로 작은 물품을 나른대서 붙은 이름이다. 바지게꾼이라고도 불렀다.

“뻥이요~” 파열음보다 더 큰 목소릴 내는 뻥튀기 아저씨, 종일 한 봉지도 못 팔 것 같은 푸성귀를 광주리 넣고 앉은 할머니, 장치·도치·가자미 등 동해를 한 바구니 퍼 깔아놓은 아줌마 등 낯선 해안 도시민의 치열한 삶과 마주할 수 있다.

울진 시장 한쪽엔 전국 어느 곳의 칼국수와도 비슷하지 않은, 그래서 더욱 인상 깊은 국수를 삶아 파는 곳이 있다. 시원한 멸칫국물과 부드러운 면발의 칼국수, 그리고 새콤달콤한 양념에 생선회를 무쳐 먹는 회국수가 인기인 집이다. 2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회를 수북하게 썰어준다. 믿을 수 없는 가격이다.

회도 좋지만 사실 이 계절의 주인공은 바로 대게다. 대게를 먹어야 한다는 것은 울진에 온 사람의 의무이며 운명이다. 후포항에서 대게를 만났다. 깊은 바다를 떠나온 대게와 붉은대게(홍게)가 밥상에 올랐다. 딱히 설명할 것도 없다. 껍질이 꽃게보다 얇은 대게는 다리를 하나씩 뜯어 쭉 마디 사이를 뽑아내면 탱탱한 ‘맛살’ 같은 살이 나오는데 그냥 입에 넣고 빨아들이면 된다.

커서 대게가 아니다. 다리가 대나무 마디를 닮았대서 울진대게다. 사진 이우석 제공
커서 대게가 아니다. 다리가 대나무 마디를 닮았대서 울진대게다. 사진 이우석 제공

대게 다리의 2~3번째 마디 부분(사람으로 치자면 종아리와 발목)은 바로 먹지 않고 모아둔다. 그도 그럴 것이 대게는 보통 여럿이 함께 먹는 요리다. 끝부분까지 알차게 먹느라 힘을 빼면 ‘경쟁’에 뒤진다. 살이 많은 첫 번째 부분(허벅지)을 먹고 나중에 동이 나면 그제야 모아둔 떨거지를 꼼꼼히 챙겨 먹는다. 몸통 부분 하얀 살은 조금 귀찮지만 나름의 방법이 있다. 긁개로 살살 긁어 딱지 장에 모아놨다가 단번에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입에 한 보따리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자면 게가 아니라 ‘계’를 타는 느낌이다.

붉은대게는 풍미가 더욱 진하다. 현지에선 대게보다 더 비쌀 때도 있을 정도로 귀한 몸이지만 도시에선 이미지가 나빠 좀 억울하다. 예전에 물게(거의 살이 없는 물렁게)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찌고 못 팔면 다음 날 또 쪄다 팔았던 탓이다. 보통 다리에 살이 없어 빨대처럼 텅텅 빈 게를 먹었던 좋지 않은 기억이 남은 탓이다. 단맛은 덜하지만 짭조름하고 특유의 향이 강해 유독 붉은대게만 찾는 이도 많다. 특히 탕을 끓이면 더욱 맛이 살아난다.

후포항 아침 경매에 나온 붉은대게(홍게). 사진 이우석 제공
후포항 아침 경매에 나온 붉은대게(홍게). 사진 이우석 제공

이름조차 낯선 홑게도 있다. 껍질을 탈피한 지 얼마 안 되는 대게로 몇 마리 잡히지 않는 까닭에 주로 선장이나 어민들이 쓱싹 먹어버려 외지에 알려지지 않았다. 산채로 다리를 뜯어 회로 먹는데, 찰떡처럼 졸깃하고 차진 맛이다. 처음부터 단맛이 확 퍼지는데 이게 끝까지 간다. 늘 나오는 게 아니라서 귀하디귀한 몸이다. 후포항에서도 한참을 수배해서 겨우 맛볼 수 있었다.

배가 터져도 게딱지 볶음밥만큼은 먹어야 한다. 이미 껍질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대게의 여운을 포만으로 간직할 수 있는 만찬의 종신보험 격이다. 탕은 또 어떠랴. 현지에선 겸손(?)하게 생선국이라 부르지만 어엿한 탕으로 손색없다. 시원하니 맑은 탕에 밥도 챙기고 해장도 할 수 있으니, 전날 술을 안 마시면 손해다. 이중 곰치국은 해장에 으뜸이다. 소화하기 어려운 속사정에도 그저 들이마시면 그만이다. 순두부가 물고기 모양으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1814년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서조차 ‘살이 아주 연하고 맛이 싱거우며 곧잘 술병을 고친다’고 했다. 흑산도 살던 정약전이 동해엔 언제 왔을까 싶지만 고금이 딱 들어맞는 말이다. 물곰 또는 곰치라 부르지만 사실 곰치(Moray eel)가 아니라 꼼치(Glassfish)다. 물론 콧물도 아니다. 뱀장어목 곰치과에 속하는 길쭉한 심해어종이 진짜 곰치다. 우리가 먹는 것은 쏨뱅이목 꼼치과에 속하는데 이름을 혼동하고 있다. 남해안에서 주로 사는 물메기나 포항 미거지(Snailfish)도 꼼치의 다른 종류다.

아찔한 유리바닥으로 이어진 등기산 스카이워크. 사진 이우석 제공
아찔한 유리바닥으로 이어진 등기산 스카이워크. 사진 이우석 제공

탕은 또 있다. 울진 기세 좋은 산세가 품은 온천 탕(湯)이다. 울진엔 관동팔경만 둘이 아니다. 물 좋기로 소문난 온천 단지가 두 곳(덕구와 백암)이나 있다. 겨울 여행의 백미로 몸을 녹이고 여유도 찾을 수 있다. 그렇지, 여행은 이런 것이다. 강아지 이름을 닮은 덕구온천은 응봉산 기슭에 있다.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한 주유소에서 주는 덕구온천 티켓 덕에 이름을 아는 이들이 많다. 산마루에서 저절로 뿜어 나오는 국내 유일 자연용출천이 덕구온천이다. 용출온도 42.4도의 약알칼리성 물이 탕치 효과가 좋다고 한다. 신경통, 류머티스성 관절염, 근육통 등에 좋단다. 아무래도 땅속에 아스피린이나 홍삼정이 들었나 보다.

경북(울진)/글·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 소장

울진 맛집 정보

왕돌초와 가까운 후포항은 유명한 대게 집산지다. 후포여객터미널 앞 ‘왕돌회수산’은 가마솥에 ‘미디엄’으로 쪄낸 대게와 붉은대게, 강도다리, 문어 등 지역 제철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집이다. 잘되는 대게 집이란 싱싱한 게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게 찌는 기술도 좋아야 한다. 사장님 손맛이 좋아 한상 가득 깔리는 반찬도 좋고 매운탕도 기가 막힌다.

죽변 ‘제일반점’은 ‘비빔짬뽕밥’을 잘한다. 칼칼하고 고소한 양념에 계란부침과 함께 밥을 쓱쓱 비비자면 침이 꼴깍 목을 타넘는다.

직관적이고 단호하게도 이름도 ‘칼국수 식당’이다. 밀가루를 한없이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시원하고 걸쭉한 멸치 국물이 마치 입맛을 희롱하듯 입에 붙는다. 주문하기 황송할 정도로 저렴한 회국수나 회밥은 배부르다고 안 먹으면 왠지 손해나는 느낌이다. 울진시장 안에 있다.

이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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