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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겨울을 벗다 향을 입다

등록 2020-02-27 09:31수정 2020-02-27 09:52

신조어 ‘코펙트럼’ 나올 정도로 향수 인기
시향 기록도 ‘큰 재미’로 회자
2000년대 초부터 외국 고급 브랜드 상륙
최근 활짝 열린 ‘니치 향수’ 시장
‘나만의 향수’ 만드는 이들도 늘어
향수 한방울이 우울한 기분을 바꾸기도 한다. 최근 ‘자신만의 향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조향 연구소 ‘살롱 드 느바에’.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향수 한방울이 우울한 기분을 바꾸기도 한다. 최근 ‘자신만의 향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조향 연구소 ‘살롱 드 느바에’.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은은한 물 내음이 나는 과육을 입안에서 뭉그러뜨리면 서늘한 단맛이 번진다. 2010년 무렵, 말리지 않은 무화과를 처음 맛보았다. 과일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익다만 듯한 엷은 향이 나서 오히려 단번에 반했다. 그즈음 배우 고현정이 뿌린다는 무화과 향 향수가 입소문을 탔다. 집들이 선물용(비싸니까!) 고급 향초만 파는 줄 알았던 프랑스 브랜드 딥티크에서 향수 필로시코스를 그렇게 알게 되었다. 매년 무화과 철이면 박스 단위로 무화과를 사서 먹어치우며 ‘무화과 향앓이’를 하다 프랑스 향수 브랜드 라티잔 파퓨머의 프리미에 피기에를 만났다. ‘칙~’ 뿌리면 풀 내음과 갓 꺾은 나뭇가지 냄새가 훅 나고 코코넛 같은 달콤함이 남는다. 이 향수들의 향은 무화과와 전혀 관계없는데 합쳐보면 분명 무화과다! 두 향수를 같은 사람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프리미에 피기에는 조향사 올리비아 지아코베티가 필로시코스보다 2년 앞서 만든 무화과 향 향수다. 무화과는 향을 쌓아 올려 선명한 인상을 창조하는 조향사의 호기심이 반영된 과일이다.

향수 애호가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쓰는 표현 중에 ‘코펙트럼’(코+스펙트럼)이 있다. 다양한 향수를 경험하면서 구분하다 보면 비교할 수 있는 향의 범위도 넓어진다는 의미다. 누군가는 그저 꽃향기, 과일 향으로 표현하는 향수를 백가지 단어로 풀어쓰는 시향기(향수 맡은 후 쓰는 글)들을 읽다 보면 기발한 표현도 만난다. ‘신선한 콩나물 대가리 딸 때 나는 향’ 혹은 ‘콩나물 삶을 때 냄새’가 느껴진다고 해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향수는 또 라티잔 파퓨머, 올리비아 지아코베티의 작품이었다. 이런 표현들은 악평이 아니다. 향에 대한 선호는 사람마다 달라서 딥티크의 탐다오, 르 라보 상탈33 등 이른바 ‘절간 냄새’로 불리는 몇몇 향수도 확고한 마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성별 구분 없이 나도 뿌리고 너도 뿌리는 향수가 있었다. 캘빈 클라인의 시케이원,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쿠아 디 지오, 다비도프 쿨워터, 불가리 라이트 블루가 대표적이다. 향수 미니어처를 모으는 이들이 많았고, 샘플 향수가 패션잡지 부록으로 심심찮게 딸려왔다. 이 무렵을 기억하는 이라면 케이트 모스의 캘빈 클라인 향수 흑백광고와 슈퍼모델 카르멘 카스가 목에 황금 링을 달고 소개하던 디오르의 향수 자도르 광고를 함께 떠올릴 것이다. 패션 브랜드의 라이선스 향수가 주도하던 시절이었다.

최근 국내 향수 시장에 조금 낯선 향수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2003년 크리드(영국), 2007년 아쿠아 디 파르마(이탈리아), 2008년 딥티크, 산타 마리아 노벨라(이탈리아), 2011년 펜할리곤스(영국), 2012년 조 말론 런던(영국)이 차례로 국내에 선보였다. 이 중 딥티크와 조 말론 런던을 제외한 나머지는 역사가 오래된 왕실 납품 브랜드들이다. 7대를 이어온 향수 제조 가문이라거나, 중세 수도사들의 비법 등이 향수에 짝꿍처럼 따라붙는 이야깃거리였다.

2000년대 중반 바이레도(스웨덴)와 딥티크 등을 수입한 신세계인터내셔날이 최근 프리미엄 향수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이른바 ‘니치 향수’(‘틈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소수의 취향을 만족하게 하는 프리미엄 향수)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다. 여기서 잠깐 니치향수라는 용어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과거 ‘니치 퍼퓨머리’(조향 연구소, 향수 제조소)로 분류되던 곳들의 다수가 규모가 커지거나 글로벌 코스메틱 기업에 인수된 현재는 이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난감하다. 거대한 틈새? 원조 니치?

향수를 주제로 취재하며 만난 업계 관계자들은 “원료 향의 고급화와 개성 있고 독창적인 향취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니치 향수 열풍의 좋은 영향”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니치 향수라고 해서 무조건 고급이고 패션 브랜드의 향수보다 우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내 코가 좋아하면 오케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나만의 향수’를 만드는 트렌드섹터도 많다. 자기의 개성을 한껏 향에 투영하려는 그들. 공방도 넘쳐나는 추세다.

겨울옷을 벗고 봄옷을 챙기듯 마음이 설레는 새 향기를 그리는 즈음이다. 겨울의 묵은내를 씻어내는 봄바람은 부디 마스크 없이 한껏 들이마실 수 있기를.

글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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