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구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볼펜, 종이 클립, 수정액, 지우개 달린 연필…. 어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문구들이 서랍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갖자면 끝이 없다. 우리의 일상에 깊게 자리 잡은 문구에도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어떤 문구는 실수에서 탄생했고, 어떤 문구는 필요에서 탄생했다. 문구의 역사,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있는 이야기투성이다. 서랍과 필통 속 문구의 역사 이야기를 ESC가 정리해 봤다.
■
오탈자 해결의 혁명, 수정액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글을 처음 쓸 때 손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잔뜩 들어간다. 연필잡기를 처음 배울 때와 다름없다. 긴장한 채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나가다 보면 쓱 밀리는 펜. ‘다녀왔습니다’를 ‘다너왔습니다’로 썼을 때의 당혹감. 그러나 우리에겐 ‘수정액’이 있다. 왠지 어른이 된 느낌을 주는 문구다. 보통 ‘화이트’라고 일컫는 수정액은 그 역사가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수정액은 ‘오타쟁이’ 비서의 발명품이다. 1950년대 한 은행에서 비서로 일하던 벳 네스미스 그레이엄은 타자를 쳐 문서를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오탈자’는 그의 ‘적’이었다. 자주 오탈자가 있는 채로 문서를 상사에게 제출하자 해고의 위험에 처했다. 혼자 자녀를 기르며 화가로도 활동하던 그레이엄의 생존은 비서 일에 달렸기에 ‘오타쟁이’의 오명을 벗어야만 했다. 화가였던 그는 묘책을 떠올린다. 그림을 잘못 그리면 물감으로 덮듯, 잘못 쓴 글도 덮자! 그는 갖고 있던 흰 물감과 종이 색의 염료를 섞어 수정액을 만들었다. 부엌에서 만든 수정액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몰래 썼다.
동료 비서들에게 입소문이 나자 벳 그레이엄은 본격적으로 수정액을 개선하고 제품화했다. 아이티(IT)업계의 거물들의 첫 사무실이자 연구소로 자주 등장하는 차고가 여기에서도 등장한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집 창고에 작은 생산 시설을 차렸다. 그는 이때까지도 비서로 일했는데, 그만두게 된 사연이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고, 맨 마지막 자신이 일하는 은행의 이름을 넣었어야 했는데 수정액 만드는 회사의 임시 이름(미스테이크 아웃)을 쳐 넣었던 것. 그는 바로 해고됐다. 그 뒤 1958년 벳 그레이엄은 ‘리퀴드 페이퍼 컴퍼니’라는 회사를 세우고, 특허까지 취득했다.
■
잘 붙지 않아 성공했네…접착 메모지
‘실패’는 곧장 ‘좌절’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실패가 그렇다. 그러나 실패의 경험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실패를 혁신을 위한 공공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실패학’도 있다. 그다지 와닿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접착 메모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실패’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접착 메모지의 대명사는 쓰리엠(3M)의 ‘포스트잇’이다. 쓰리엠은 다양한 생활용품을 내놓는 기업이다. 접착제는 쓰리엠에서 생산하는 주요 제품군 중에 하나다. ‘접착제’의 사명은 단 하나다. 강력한 접착력으로 붙인 물건이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쓰리엠의 연구원이던 스펜서 실버는 1970년 ‘실패’했다. 강력 접착제를 만들어야 했는데, 접착력이 약한 접착제를 만들었다. 끈적임도 없었다. 접착제인데 ‘접착’이 되지 않았다. 스펜서 실버는 자신이 만든 실패한 접착제를 사내 세미나에 소개했다. 잊혀가던 실패한 접착제를 되살린 건 스펜서 실버와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던 아서 프라이였다. 그는 교회에서 성가대원이었는데, 부를 곡을 표시해 두려고 찬송가 책 사이에 끼워둔 종이가 사라져 곤란하곤 했다. 그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1977년 스펜서 실버의 접착제를 이용해 붙였다 뗄 수 있는 종잇조각을 개발했다. ‘포스트잇’(개발 당시 이름은 ‘포스트 스틱 노트’)이 탄생한 순간이다. 포스트잇은 처음엔 인기 없는 문구였다. 그러나 아서 프라이는 <포춘> 선정 500대 기업의 비서들에게 견본품을 보내며 제품을 알리는 데 매진했고, 19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문구로 자리 잡았다.
■
두 마리 토끼 잡은 ‘지우개 달린 연필’
필통을 뒤져보면 꼭 있어야 하는데 꼭 없는 게 하나쯤 있다. 기자의 경우엔 ‘지우개’다. 연필을 자주 쓰지 않기 때문에 지우개도 찾을 일이 많지 않지만, 꼭 써야만 하는 그때 ‘지우개’는 없다. 지우개로 생산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면 나 역시 ‘지우개 달린 연필’을 발명할 수 있었을까?
하이멘 립맨은 19세기 중반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그림을 그려 생계를 연명하던 가난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그의 생계 도구는 종이와 연필 그리고 지우개. 부지런하게 그려야 부지런히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우개’를 자꾸 잃어버렸다. 연필로 그린 선을 지우고 다시 그려야 하는데 지우개가 없자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다. 건망증이 심했던 하이멘 립맨의 일상이었다. 결국 그는 실로 꿴 지우개를 연필에 매달았다. 지우개는 잃어버리지 않았지만 너무 불편했다. 모자를 쓰고 또 그림을 그리러 나가려고 거울을 보던 그는 마침내 방법을 찾았다. 연필 머리 부분에 지우개를 씌워보기로 했다. 1858년 지우개 달린 연필을 발명했다. 7년 뒤 그는 이 특허를 10만달러에 팔았다.
■
저항의 상징 종이 클립
종이 클럽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럿이다. 1867년 새뮤얼 페이가 종이 클립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고정하려던 건 ‘종이’가 아닌 옷감이었다. 그 뒤 세계 곳곳에서 종이 클립 관련 특허가 나왔다. 미국, 노르웨이, 영국 등등. 이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노르웨이 이야기다. 노르웨이에는 7미터 높이의 종이 클립 조각상이 있다. 1899년 노르웨이의 발명가 요한 볼레르는 종이 클립을 발명해 특허를 출원했다. 그렇다면 그를 기리기 위해 이런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졌을까?
노르웨이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종이 클립을 옷깃에 달고 다녔다고 한다. 종이 클립이 ‘한데 묶어주는 기능’을 가졌다는 데 의미를 두고 ‘한 데 뭉쳐 나치에 저항하자’의 표시로 클립을 달았던 것이다. 요한 볼레르는 저항의 상징으로 클립을 만든 게 아니었지만 어느새 그는 종이 클립의 아버지이자, 저항 표시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게다가 그가 발명한 종이 클립은 우리가 제일 흔히 쓰는 종이 클립 모양과는 거리가 있다. 오늘날 가장 많이 쓰는 클립은 ‘젬 클립’이라고 불린다. 클립 발명과는 전혀 상관없는, 클립을 많이 만든 영국의 회사인 ‘젬 리미티트’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 볼펜 발명엔 ‘비로 형제’의 활약이
비행기 발명에 라이트 형제가 있다면 볼펜 발명에는 ‘비로 형제’가 있다. 헝가리의 라슬로 비로와 죄르지 비로 형제 이야기다.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던 라슬로 비로는 언론인이기도 했다. 많은 글을 쓰기에 만년필은 적합하지 않았다. 만년필 펜촉이 종이에 닿는 감촉은 그 어떤 필기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확실히 비효율적인 필기구다. 잉크를 묻히거나 채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라슬로 비로는 이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해 필기구 발명에 나섰다. 치과의사로 일하던 형제 죄르지 비로와 함께였다. 1938년 현대식 볼펜을 발명했으나, 적합한 잉크를 만들지 못해 생산에 실패했다. 그러다 형제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했고, 볼펜에 적합한 잉크로 함께 개발해 1940년대 말 볼펜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는 라슬로 비로의 생일인 9월29을 ‘발명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참고도서 <발명상식사전>, <문구의 모험>, <문구의 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