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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최은희, 그는 보통사람이었다

등록 2020-05-07 09:18수정 2020-05-07 22:17

허지웅의 설거지2
강원도 도계읍에서 태어난 최은희
탄광 일, 미용, 가발업체 영업 등
열심히 살면서 두 아들 키운 사람
악성림프종 발병했지만, 희망 놓지 않은 그
코로나19 치료 스케줄 밀린 후 악화
결국 떠난 보통사람, 그의 삶 남기고파
사진 게티이미지뱅
사진 게티이미지뱅

최은희는 1965년 3월9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에서 태어났다. 4형제 가운데 막내였다. 가장 나이가 많은 큰 언니와는 여덟살 차이가 났다. 동해안 끝자락에 위치해 서쪽으로 태백산맥을 마주하고 있는 도계는 논보다 밭이 많고 밭보다 석탄 가루가 많았다. 본래 탄광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전국적인 탄광읍으로 연간 100만톤의 무연탄을 생산했다.

이 지방이 대개 그렇듯 도계 또한 일교차가 심하고 겨울에 눈이 오면 허리까지 차올랐다. 눈은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전국에서 가장 빠른 첫눈이 매년 이 지역을 찾았다.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몰랐다. 까불고 좋아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어른들은 혀를 찼다.

도계에 사는 사람이라면 광부거나, 광부를 상대로 하는 일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최은희의 부모님도 그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은 건 어머니 혼자였다. 혼자 힘으로 4형제를 먹여 살려야 했다. 어머니는 도계 사람이라면 으레 할 선택을 했다. 그녀는 탄광으로 들어갔고, 그 억세고 꼿꼿한 성품으로 가족을 건사했다.

최은희는 타고나기를 상냥한 사람이었다. 한번 본 사람과도 곧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도계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결혼했다. 당시에는 이른 결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큰 언니의 동창이었다. 소개받자마자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함께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여덟살 차이 신랑과 함께 그녀는 곧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실함에 놀랐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도록 일하기를 거르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한 줄 몰랐으며 주변 사람이 힘들어하면 먼저 나서서 일을 나누어 함께 도왔다. 쉬지 않고 일했고, 그러면서도 상냥함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보며 본으로 삼았다. 근면·성실함은 그녀의 특징이자 특기가 되었다. 그건 일종의 훈장과도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짐이기도 했다.

1986년과 1987년에 두 아이를 얻었다. 둘 다 남자였다. 경사였지만, 마냥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식구가 늘면서 생계가 빠듯해졌다. 특히 둘째는 몸이 약했다. 병원에 가야 했고 약을 먹여야 했다. 당시 남편이 탄광에서 일하는 동안 그녀는 비디오 가게에서 일했다. 바램과는 달리 한국의 탄광산업은 계속해서 사양길을 걷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었다. 도계의 탄광에는 전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일시적인 불경기였다면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황을 모르고 발전 중이던 한국의 다른 분야들과는 달리 탄광업에 한해서만큼은 어떤 종류의 희망 섞인 전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단이 필요했다. 마침내 첫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울산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평생 나고 자라고 먹고 살아낸 곳을 떠나는 일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믿음이 그녀를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터전에서 그녀는 마음을 다시 단단히 잡아 붙들었다.

남편은 울산의 중공업 공장에 들어가 도장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미용실에서 조수로 일했다. 그러면서 밤에는 미용학원에 다녔다. 그녀의 성실함이 여지없이 빛을 발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미용실을 시작했다. 하루하루 바쁜 나날이었다. 그러나 고된 일상에 따른 작은 상찬처럼 삶 또한 안정을 찾아갔다. 부모가 밥벌이에 매진하는 동안 아이들은 봄꽃처럼 자라났다. 큰아들이 몇 번 말썽을 부리기는 했지만 큰 무리 없이 모두 잘 커 주었다.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위기가 찾아왔다. 이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남들 다 하는 이혼이라지만, 그리 가까운 이야기인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삶이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들이 이미 결혼을 한 뒤라 마음에 부담은 덜했다. 그러나 허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 아버지와는 원수가 되어 남남이 되었다.

그녀는 그렇게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은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인생은 이제부터가 전성기였다. 그녀는 미용실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발 브랜드 회사에 입사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일했다. 휴가와 휴일은 그녀에게 없는 단어였다. 남의 일까지 도맡아 성실하게 해냈다. 그녀 없이는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에는 지점장이 되었다. 일반 사원으로 시작해 불과 3, 4년만에 능력을 입증하고 지점장이 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지점장으로 일하는 동안 울산 영업소의 매출액은 여태 단 한 번도 달성해보지 못했던 수준까지 치솟았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걸 직감한 건 2018년 여름이었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게다가 자꾸 코피가 났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단지 나이 탓으로 돌리기에는 문제가 좀 더 커 보였다. 병원에서는 갑상선 관련 질병으로 진단했다. 갑상선의 기능이 저하되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방을 받고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울산의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조직 검사 끝에 나온 정확한 병명은 악성림프종이었다. 혈액암이다. 말기였다.

병원에서는 70퍼센트 이상 완치할 수 있다며 자신을 보였다. 그녀는 의료진의 말을 믿고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다. 3일 동안 입원해서 항암 주사를 맞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4주 동안 안정을 취한다. 이게 치료의 기본적인 과정이다. 경과가 좋으면 여섯번이나 여덟번으로 끝이 난다. 그녀는 이걸 1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했다. 결국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받았다. 그러나 도무지 끝이 날 줄 몰랐다. 암세포가 줄어들지 않았다. 의료진은 말을 바꿨다. 2개월 남았으니 호스피스 병동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손과 다리에서 힘이 다 빠져나갔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고 살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너는 죽는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건 마치 내일 비가 온다는 무미건조한 예보와도 같았다. 해가 뜬다고 하지 않았나. 70퍼센트의 확률로 해가 뜬다고 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의 임상시험에 지원했다. 모든 조건이 맞았다. 그렇게 임상시험에 들어가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건 울산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였다. 이전 병원에서의 항암 약물이 아직 체내에 남아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니까 아쉽지만,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좋다. 하지만 아직은 포기할 수 없다.

내가 최은희씨를 만난 건 이즈음이다. 그녀는 병원을 옮겨서 치료 중이었다. 나와 같은 병이었다. 큰아들이 생면부지 내게 부탁을 해왔다. 부디 병문안을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만난 일에 관해서는 이 지면에 쓴 적이 있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고 나는 기뻤다. 같은 병을 앓았기 때문에 병세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회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가 만난 전후로 병세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마침내 약이 듣기 시작했고, 몸 안에 암세포가 거의 사라졌다. 원수가 되어 헤어졌던 남편을 비롯해 다시 하나로 뭉친 가족이 그녀 곁에 머물고 있었다. 그게 너무 보기 좋았다.

울산으로 돌아가 쉬면서 다음 항암 스케줄을 기다리는 동안 일이 생겼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병원의 일정이 한 주 뒤로 밀렸는데 그 일주일 동안 병세가 악화된 것이다. 여전히 버티고 있던 암세포 하나가 다시 말썽을 부려 온몸에 퍼져 나갔다. 병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일반 병실에서 무균실로 옮겨졌다. 무균실로 옮겨졌다는 건 항암 이후 면역력이 극도로 저하된 상태에서 합병증이 왔다는 의미다. 폐렴이었다.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그녀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최은희씨는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가족과 친지들이 곁을 지켰다. 한마디씩 건네는 동안 그녀는 눈을 뜨거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물을 흘렸다. 발인은 울산의 하늘공원에서 5월 2일 이루어졌다. 그녀의 가족과 직장 동료들이 빼곡하게 모여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그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도 아니고 영웅도 부자도 아니었다. 정파성이 없으면 회색으로 분류되는 지금 시대에 그녀에게는 아무런 색깔이 없었다. 그냥 보통사람이었다. 평생 사사로이 남을 속이지 않고 맡은 일에 성실하며 타인을 배려했던 보통사람이었다. 노력한 만큼 거둔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결코 좌절하는 법 없이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었던 보통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식을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보통의 어머니였다. 보통사람 말이다. 그런 보통사람 최은희의 삶에 대해 꼭 남기고 싶었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최은희님의 명복을 빕니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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