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위봉산성 서문. 김선식 기자
계란 프라이를 만들다 노른자가 터진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노른자가 흰자 아래로 쏠려 끝내 흘러버리기 직전의 형상을 기억하는가. 전북 전주시와 완주군이 그런 모양이다. 전주가 노른자, 완주가 흰자다. 완주는 전주를 남서쪽에 두고 에워싸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가려져 있는 건 완주다. ‘한옥마을’로 유명한 전주와 붙어있는 완주는 여행지로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해 여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이 완주를 방문했다. ‘2019 서머 패키지 인 코리아’ 영상과 화보 촬영차였다. 슬슬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소문은 늘 같은 말로 시작한다. “완주가 도대체 어디야?” 지난 7일 둘러 본 완주는 오묘했다. 잘 익은 수란의 흰자처럼 ‘슴슴한’ 듯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여행의 풍미를 돋웠다.
오성 한옥마을 ‘아원’ 고택. 1740년께 지은 경남 진주 고택의 사랑채(오른쪽)와 안채를 옮겨 왔다. 김선식 기자
전주처럼 완주에도 한옥마을이 있다. 소양면 대흥리에 있는 오성 한옥마을이다. 한옥들은 전주나 경북 경주처럼 주택가 게스트하우스촌에 몰려 있지 않다. 한옥 23채가 종남산과 서방산, 위봉산 자락에 파묻혀 있다. 2016년 11월 문 연 ‘아원’은 한옥이 세 채다. 30년 전만 해도 산비탈과 논밭이던 약 3305㎡(1000평) 땅에 터를 잡았다. 아원 맞은편 종남산의 매력에 푹 빠진 전해갑 아원 대표는 한옥을 짓겠다고 마음먹었다. “건축과 조경 등 모든 결정에서 종남산을 중심에 놓았다. 어디에서나 창을 열면 종남산이 품에 있도록 했다.” 전국 각지 고택을 찾으러 다닌 데만 5년, 터 잡고 완공하기까지 12년 걸렸다. 1740년 즈음 지은 경남 진주의 한 고택과 1840년께 세운 전북 정읍의 어느 고택을 옮겨 왔다. 기본 뼈대는 그대로 살리고 서까래와 기와만 교체했다.
밖에서 본 아원은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4m 넘는 돌담 벽 너머 한옥 처마가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들머리 어둡고 좁은 통로를 지나자 텅 빈 정방형 홀이 나왔다. 1층에 있는 현대미술 갤러리 ‘아원 뮤지엄’이다. 1년에 두 차례 현대미술이나 설치미술 초대전을 연다. 현재 ‘만다라’를 주제로 이중희 작가(원광대 명예교수) 초대전이 열리고 있다.(8월 말까지) 좁은 계단을 오르면 한옥 고택들이 나타난다. 체험공간으로도 사용하는 만휴당 창밖으로 초록이 물오른 종남산이 눈부시다. 만휴당과 종남산 사이 갤러리 지붕은 미닫이 지붕이다. 여닫을 수 있다. 그 오목한 지붕엔 찰랑찰랑 빗물이 담겼다. 지붕 한쪽은 잔디밭이다. 전 대표는 “잔디와 빗물은 종남산의 정원이자, 한옥의 마당”이라며 “둘 사이의 경계를 없앤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 오는 날 지붕을 열면 빗물이 갤러리 내부 연못으로 떨어진다. 자연과 한옥, 갤러리는 마당과 빗물을 공유한다.
아원 고택 틈에 현대식 건물 한 채가 있다. 콘크리트로 지은 별채(천목다실)다. 콘크리트 건물이지만 안에 들어서면 한옥에 앉아있는 기분을 준다. 앉아서 창밖을 보면 한옥 담장, 장독대, 감나무가 보인다. 투박한 질감의 디딤돌과 석조 개수대, 도자기, 창호지 바른 여닫이문도 한옥이라는 착각을 일게 한다. 전 대표는 “천장을 2.5m로 낮춰 현대식 건물을 한옥 처마 밑으로 감췄다”며 “한옥과 현대식 건물의 조화를 꾀한 것”이라 말했다.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가 경계를 허문 아원에선 뒤쪽 대나무 숲길도 마당이다. 아원이 생기기 전부터 있던 대나무 숲은 5~10분 편안하게 산책하기 맞춤하다.
동상면 대아리 대아저수지. 대아수목원에 인접해 있다. 김선식 기자
완주에선 자연이 여행지의 경계를 허문다. 그럴 만도 하다. 완주엔 산이 14개(논산시 등 타 시·군 경계에서 공유하는 산 포함), 저수지 또는 호수 8개다. 만경강은 완주 한복판에서 뻗어 나간다. 1박 2일 쉼 없이 차로 이동하는 동안 심심찮게 산과 물을 만난 까닭이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자연을 만나기도 한다. 2015년 10월 문 연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구이면 덕천리)은 술과 관련한 유물 5500점을 전시하는 곳이다. 술의 유래와 재료, 제조과정, 국내외 술의 역사 등을 유물과 모형으로 소개한다. 박물관 앞뜰을 5분 걸어나가면 ‘구이 저수지’다. 경각산과 모악산 사이에 들어찬 이곳은 한 바퀴 돌 수 있는 호반길(8.8㎞)로 이어진다. 숲길과 나무 데크 길을 걷는다. 산이 많은 도시여서일까. 대규모 어린이 모험 놀이시설 ‘놀토피아’(고산면 소향리)의 주요 테마는 ‘암벽 등반’이다.(인공암벽이나 사다리, 계단 등을 보호 장비를 장착하고 이용한다.) 단층 건물 약 1580㎡(478평) 실내에 34개 놀이·휴식 시설을 갖췄다. 코로나 19 사태 전에는 주말 오전 내내 대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직원들이 체험 과정을 직접 관리하므로 최대 150명까지만 수용할 수 있다.
고산면 소향리 대규모 어린이 모험 놀이 시설 ‘놀토피아’ 내부. 김선식 기자
완주의 자연을 온몸으로 만끽하기 좋은 곳은 ‘공기마을 편백숲’(상관면 죽림리)이다. 마을 지형이 밥공기를 닮아 ‘공기마을’이라 이름 붙었는데, 편백 숲 덕에 공기도 좋다. 전남 고흥 팔영산 등 전국에 내로라하는 편백 숲들과 어깨를 견준다. 1976년 약 86만㎡(26만평)에 편백 10만 그루와 잣나무, 삼나무 등을 심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경각산 줄기 한오봉, 옥녀봉에 둘러싸여 있지만 편백 숲 오솔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다. 편백 틈에 나무 평상이 여럿 놓여 쉼터 구실을 한다. 암 환자들이 요양 차 이곳 숲을 찾으면서 들머리 주차장 주변으로 펜션 등 숙박시설이 들어찼다. 숲 오솔길을 걸으면 편백 특유의 마르고 시원한 향기가 끼쳐 온다. 나무 평상에 누우면 편백 끄트머리 가지만 바람에 살랑거린다. 하늘을 에워싼 편백 잎이 태양을 가릴 듯 말 듯 간지럽힌다.
상관면 죽림리 ‘공기마을 편백숲’ 산책로. 김선식 기자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완주 명소’들이 있다. 먼저 위봉산성(소양면 대흥리). 1675년(숙종 1년)에 총 둘레 16㎞, 너비 3m, 높이 4~5m로 쌓은 산성. 비상시 태조 초상화 등을 보관하려고 세웠다. 약 350년 세월이 흘러 동·서·북 세 성문 가운데 서문만 남았고 그조차 문루는 사라졌다. 현재 약 8㎞ 둘레 산성이 남아있다. 위봉폭포는 산성 서문에서 약 1㎞ 거리다. 높이 60m 폭포가 2단으로 굽이친다. 약 5분간 나무 데크를 따라 내려가면 폭포 바로 아래 계곡을 만난다. 대아수목원(동상면 대아리)과 송광사(소양면 대흥리)는 그 규모와 품격을 보면, 입장료·주차료를 받지 않는 게 의아할 정도다. 대아수목원은 전국 최대 규모(약 7만㎡·2만1175평) 금낭화 자생군락지를 보유하고 있다. 전체 부지 규모는 약 150만㎡(45만3750평). 식물 2683종이 자란다. 송광사는 평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물 네 점(대웅전, 대웅전 삼세불, 종루, 천왕전과 소조사천왕상)을 보유하고 있다. 삼례 문화 예술촌(삼례읍 후정리)과 삼례 책 마을은 완주의 문화·예술·지식 ‘창고’로 거듭나고 있다. 일제강점기 만경 평야에서 일제 수탈을 상징하던 양곡 창고들을 개조해 문화예술 공간을 열었다.
방탄소년단이 ‘2019 서머패키지 인 코리아’ 영상과 화보를 촬영한 장소는 크게 여섯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원, 위봉산성 서문, 오성 저수지, 낚시점 용암상회와 뒤쪽 돌다리, 카페 비비낙안, 경각산이다. 소박한 완주에선 슈퍼스타가 그랬듯 여행자들도 빛날 것이다.
완주(전북)/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완주 여행 수첩
교통 서울 용산역~완주군 삼례역을 오가는 무궁화호 기차가 하루 각각 6~7차례 운행한다.(3시간30분 안팎 소요) 열차는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등을 지난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삼례공용버스터미널을 오가는 버스가 하루 10차례 안팎으로 운행한다.(최소 2시간10분 소요)
숙박 오성 한옥마을 안에 있는 ‘아원’(063-241-8195), 삼례읍 삼례리에 있는 ‘그랜드호텔’(063-291-0456) 등이 있다.
식사 ‘원조화심두부’(소양면 화심리 520/063-243-8952)는 지역에서 생산하는 콩으로 조리한 화심 순두부(7500원), 화심 두부(5000원) 등을 낸다. 완주한우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고산미소한우’(고산면 읍내리 887/063-261-4088)는 구이용 한우나 육회를 사 먹을 수 있는 정육점·식당이다. ‘이북할머니 멸치국수’(삼례읍 삼례리 910-18/063-291-9688)는 멸치국수(4000원~), 비빔국수(5000원~), 만두(4000원) 등을 판매한다.
기타 ‘아원’ 관람료는 1만원이다. 갤러리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5시, 고택 관람 시간은 낮 12시~오후 4시. 만 7살 이상 입장할 수 있다. ‘놀토피아’(고산면 소향리 162/070-4100-1100)는 코로나19 사태로 13일 현재 휴관 중이다. 이용요금은 어린이·청소년 8000원, 성인 9000원(주말·1시간 기준). 만 7살 이상 입장할 수 있다.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구이면 덕천리 산240-6/063-290-3842)은 지난 9일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관람료는 성인 2000원.
문의 완주군청 문화관광과(063-290-2624/tour.wanju.go.kr)
김선식 기자
‘대한민국 술테마 박물관’ 앞뜰. 김선식 기자
완주 송광사 종루.(보물 제1244호) 김선식 기자
‘원조화심두부’ 메뉴 중 ‘화심 두부’. 김선식 기자
완주(전북)/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