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충남 예산군 광시면 ‘임존성’ 남문지 주변 숲이 초록으로 물들었다. 김선식 기자
충남 예산에 관해서라면, ‘예산 사과’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 막연히 전통과 역사를 되짚는 여행이 될 거라 기대한 건 아마도 이름 첫 글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禮)산. 대표적인 예산 여행지들엔 전통과 역사가 서려 있다. 먼저 북부 신암면에 추사 김정희(1786~1856) 고택과 묘소, 박물관이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이자 서예가인 추사가 나고 자란 곳이다. 서부 덕산면엔 항일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생가, 기념관, 사당(충의사)이 있다. 거기서 약 3㎞ 거리엔 백제 시대에 창건한 수덕사, 그 안엔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은 대웅전(국보 제49호)이 있다. 여행은 종종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이번에도 그랬다. 예산에선 ‘예’(전통과 역사)를 기대했으나 ‘산’에 반하고 말았다. 지난 23일부터 1박2일 충남 예산에 방문한 뒤, 연이어 수해와 코로나19가 전국을 집어삼켰다. 가까운 주말에 ‘또 와야지’했던 기대도 산산이 깨져 버렸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시 찾을 그날을 고대하면서 지난 예산 여행을 정리했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그칠 듯 말 듯 했다. 지난달 24일께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 있는 임존성 남문으로 가는 길이었다. 임존성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 장수 도침, 복신, 흑치상지 등이 3년간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삼은 곳이다. 봉수산(해발 483.9m) 봉우리 6개를 능선 따라 에워싼 산성 둘레는 총 2468m다. 마사리 마을회관을 지나 임도에 접어들어, 한참을 구불구불한 길을 차로 올랐다. 임존성에 차로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임존성은 아스라이 곡선을 그리며 이어졌다. 촘촘한 성벽은 끝내 백제군을 함락한 당나라 군대만큼 견고해 보였다. 성을 에워싼 숲은 유난히 소나무가 우거졌다. 나무들 사이로 운무가 일렁거렸다. 먼 하늘에선 구름이 피어올랐다. 남문에서 오른쪽 성벽을 따라 걸었다. 누각 하나를 지나자 멀리 흘러내릴 듯 다듬어지지 않은 돌무더기가 보였다. 그곳은 “보수 공사를 하지 않은 옛 성벽 그대로의 모습”(이강열 예산군 학예연구사)이라고 했다. 수피(나무줄기 껍질)가 온통 초록색 이끼로 물든 나무들 앞에선 먼 과거가 손에 잡힐 듯 시간 감각을 잃었다. 바로 숲의 정령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하고 신비로웠다.
“여긴 산이 높진 않은데, 깊다.” ‘국립 예산 치유의 숲’(예산읍)에서 만난 강덕호 산림치유지도사가 말했다. ‘국립 치유의 숲’(숲체원, 치유원 등 포함)은 전국에 총 15개, 충청남도엔 ‘국립 예산 치유의 숲’이 유일하다. 숲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면역력을 높이는 명상, 요가, 티 테라피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예산군 동북부 관모산(390.5m)과 용굴산(414m)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4년간 예산읍 부지 134만㎡(중심시설지구 877.69㎡)에 ‘치유의 숲’을 조성했다. 소나무와 참나무 수종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국립 예산 치유의 숲’은 시내 중심지 ‘예산종합터미널’에서 불과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읍내 사람들은 ‘치유의 숲’ 둘레길(1285m)에서 산책을 즐긴다고 한다. 해발 300~400m 낮은 산속 깊은 숲을 느낄 수 있다.
지난달 23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국립 예산 치유의 숲’ 둘레길. 김선식 기자
밀도 높은 숲만큼이나, 고장 내력에 깊이 천착해 조성한 여행지들이 있다. 지난 24일께 문을 연 ‘내포보부상촌’이 그렇다.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북부 지역을 통칭했던 지명 ‘내포’에서 활약한 ‘보부상’이라는 직업군을 주제로 꾸민 전통문화 체험 테마파크다. 지난 4년간 덕산면 일대 부지 6만3695.8m2(약 1만9000평)에 사업비 총 472억2200만원을 들여 조성했다. 수량이 풍부한 삽교천과 무한천 물길이 길게 아산만으로 흐르는 예산 일대는 예로부터 비옥한 농토와 수로 덕분에 농어업, 경제·문화 교류의 중심지 구실을 했다고 한다. 등짐이나 봇짐을 지고 장터를 오가며 물건을 내다 판 보부상들도 ‘예덕상무사’ 등 보부상 단체를 만들 만큼 세력화했다. 자체 규율과 형벌까지 둘 정도였다고 한다. 내포보부상촌 박물관에서 본 보부상 계율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술에 취해 난리를 일으킨 자’는 볼기(태형) 20대, ‘젊은이로서 나이 많은 사람을 업신여긴 자’는 볼기 25대. 보부상을 상징하는 솜 달린 패랭이(대나무 줄기를 엮어 만든 작고 둥근 갓), 촉작대(긴 작대기), 등짐, 신표(신분증명서) 등 유물도 전시했다.
지난달 23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내포보부상촌 박물관에서 본 ‘솜 달린 패랭이’. 김선식 기자
어린이들이 놀 수 있도록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박물관엔 동작 인식 게임들(보부상이 되어 산적이나 호랑이를 피하는 게임 등)과 4디(D) 체험관(임진왜란 당시 보부상들이 모험을 떠나는 내용의 7~8분 분량 4디 애니메이션 상영) 등을 마련했다. 극장 의자가 들썩이고 물방울이 튄다. 야외엔 숲 속 놀이터, 물놀이터(바닥 조명 분수), 체험마당, 대형 슬라이드(미끄럼틀), 간이 집라인(짚라인) 등을 갖췄다.
‘황새 공원’에선 예산의 깊은 자연과 역사가 만난다. 예산군은 1960~70년대에도 황새가 번식했다고 전해진다. 대술면 궐곡리엔 ‘황새번식지’임을 알리는 두 개의 비석이 남아 있다. 각각 1930년대 조선총독부와 1960년대 문화재국(지금 문화재청)에서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국내 텃새 황새는 1994년 10월 절멸했다. 이후 한국교원대학교 황새복원연구센터가 황새 인공증식에 성공했다. 문화재청은 2009년 공모를 거쳐 예산군을 ‘황새 마을’로 선정했고, 2015년 6월 예산 황새 공원이 문을 열었다. 광시면 일대 13만5699㎡(약 4만1049평)에 생태습지와 문화관 등을 조성했다. 숲 해설가인 ‘황새사랑’ 강희춘 대표는 “예산은 하천과 연결된 바다, 넓은 평야 등 황새가 서식할 만큼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다”고 설명했다. 황새 공원은 “현재(지난달 23일 기준) 예산 황새 공원에서 사육하는 황새는 118마리, 야생 방사·증식한 황새는 79마리”라고 설명했다. 국제자연보전연맹이 멸종위기종으로 분류한 황새는 전 세계 총 2000~3000마리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지난달 23일 광시면 황새 공원 ‘황새오픈장’에서 본 황새. 김선식 기자
황새 공원 ‘황새오픈장’에선 황새를 관찰할 수 있다. 눈 주위, 다리는 붉고 긴 부리는 검다. 습지와 농경지 얕은 물에서 먹이를 찾는다. 높은 나무에 둥지를 튼다. 유서 깊은 고장, 깊은 자연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 있는 추사 고택 전경. 김선식 기자
충남 예산군 대흥면 봉수산 수목원에 있는 ‘금도끼 은도끼’ 조형물.
내포보부상촌 박물관에서 본 기지시 줄다리기를 형상화한 전시물. 김선식 기자
예산(충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