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리브레’ 서필훈 대표가 추출한 ‘무산소발효 커피’. 박미향 기자
지난달 10일. 서울 종로구 트윈트리빌딩 16층에 25명이 모였다. 저녁 7시. 코로나19 사태에도 1m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모인 이들의 공통점은 ‘커피’. 비알미디어가 운영하는 블루리본아카데미가 세미나 ‘스페셜티 커피, 비즈니스로 성공하기’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총 7회 중 첫 번째 강사는 한국 커피의 대표 주자인 서필훈 ‘커피 리브레’ 대표다. 한 커피점 사장이 묻는다. “아나에어로빅(무산소발효) 커피가 요즘 대세다. 커피업계 유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런데 해야 하나?” 서 대표가 답했다. “와인 방식을 접목한 셈인데, 독특한 향미와 새로운 맛이 특징이다. 일반 커피에 견줘 가격이 비싼 편이다.” 코로나19로 커피업계도 비상이다. 스타벅스는 매장을 테이크아웃 중심으로 바꾸고, 드라이브스루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영세업자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무산소발효 커피’ 바람이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 무산소발효 커피? 처음 들어봐!
지난달 11일 오후 2시. 마포구 연남동에 있는 ‘커피 리브레’ 본사. 말이 본사지 스타트업 창고 같은 협소한 공간이다. 서필훈 대표가 정성스럽게 커피를 추출했다. 하얀 김이 올라갈수록 추출 병엔 까만 커피가 찰랑거렸다. “(과거 커피업계는) 발효를 맛과 관련해 활용한 적이 없다. 발효란 관점에선 생두 가공 방식은 대략 내추럴, 워시드, 허니 방식 정도로 나뉜다. 무산소발효(anaerobic·아나에어로빅) 방식은 새로운 가공 장르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맛을 원하고, 그런 점을 파고든 게 무산소발효 방식이다.”
‘커피 리브레’ 서필훈 대표가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박미향 기자
무산소발효 커피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이는 서필훈 대표. 국내 커피업계는 서 대표의 ‘커피 리브레’ 전과 후로 나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그의 행보는 주목의 대상이었다. 스페셜티커피(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가 시행하는 품질 평가에서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 받은 높은 등급 커피) 붐을 일으킨 것도 그다.
아시아나항공 선임사무장이자 커피 칼럼니스트인 심재범씨에 따르면 현재 웬만한 스페셜티커피 판매 전문점엔 무산소발효 커피가 있다고 한다. 그는 “해외 커피 농장 대부분이 이 방식을 병행하고 있고, 해외 커피업계에서도 화두다. 무산소발효 커피는 커피 유행의 최전선이다. 국제대회인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에서 아나에어로빅 커피로 우승을 노리는 바리스타가 늘고 있다”며 “이전엔 게이샤 등 커피 품종 위주였다면 생두 가공 방식(프로세스)이 화두가 된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지난해 한국인으로 최초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전주연 바리스타가 있는 ‘모모스 커피’ 차림표에도 무산소발효 커피가 있다. 도대체 무산소발효 커피란 뭘까?
커피 추출법이 아니다. 커피나무에서 열매 ‘커피 체리’(커피콩)를 따면 생두를 추출하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그중 하나다. 과거엔 내추럴(Natural), 워시드(Washed), 펄프드내추럴(Pulped Natural·일명 허니) 방식 정도였다. 내추럴 방식은 커피 체리를 껍질째 말린 다음 탈곡해 생두를 얻는 식이다. 껍질을 까면 생두를 싼 점액질이 드러난다. 점액질을 물에 담가 자연 발효로 씻어내고 말린 다음 생두를 추출하는 게 워시드 방식이다. 전자는 자연 그대로 향미가 생두에 스며드는 게 장점이지만, 이물질이 섞이면 고약한 냄새가 날 수 있다. 후자는 이물질이 섞일 확률이 낮고 깨끗하게 처리하기에 내추럴 방식보다 선호하는 농장주가 많다. 펄프드내추럴 방식은 이 둘을 섞은 프로세싱이다.
‘엘카페’의 ‘무산소발효 커피’인 ‘‘인도 아티칸 아나에어로빅’. 박미향 기자
서 대표는 “사실 워시드나 내추럴 방식에서 발효가 안 일어나는 게 아니다. 무산소발효란 그런 의미에서 발효가 아니라 인위적인 환경을 만들어 발효하는 것”이라며 “발효 탱크 안 압력이나 온도, 발효 시간 등을 조절하거나 특정 효모나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는 등 생산자의 의도를 과정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양분을 더 주기 위해 사탕수수, 주스, 과일 껍질, 꿀 등을 넣기도 한다.” 와인 제조 과정과 얼추 비슷하다. 와인 메이커처럼 생두 메이커란 직업이 생길지 모를 일이다.
이런 방식을 최초로 시도한 이는 코스타리카에 있는 농장 ‘엘 디아만테’(El Diamante)의 루이스 캄포스다.(현재 그는 다른 농장에서 일한다.) 대략 6년 전이다. 그는 그해 ‘컵 오브 엑설런스’(COE·Cup of Excellence·각국 커피 농장에서 출품한 커피를 엄격한 심사를 통해 그해 최고의 커피로 선정)에서 자신의 무산소발효 커피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과정이 조리법처럼 복잡하니 생두 가격은 일반 생두에 견줘 3~4배 비싼 편이다. 정체된 전 세계 커피 시장에 혁신이라는 평가를 받는 배경이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고부가가치 상품이 탄생한 것이다. 서 대표는 “스페셜티커피 기준 80점 아래 생두도 이 방식을 적용해 가격을 높일 수 있으니 어려운 농장들 입장에서 환영할 만하다”고 평한다. 하지만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 맛이 관건이다. 심재범 칼럼니스트는 “바리스타 실력에 따라 맛 차이가 크다”고 말한다. 마치 요리처럼 다양한 맛의 변주가 가능한 무산소발효 커피. 어쩌면 인공지능 바리스타와 전자동 머신이 곧 판칠 커피업계에서 바리스타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은 생산자에게도 해당한다. 생산자마다 레시피(가공 방식)가 다를 수 있다.
‘커피 리브레’ 서필훈 대표가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박미향 기자
지난달 서 대표의 솜씨로 맛본 무산소발효 커피 맛은 한마디로 정의가 어려웠다. 서 대표가 추출한 커피는 니카라과의 한 농장의 ‘300시간 무산소발효’ 커피였다. 냉장실에 넣어 온도를 시간마다 달리하는 식으로 생산한 원두였다. 캄포스의 무산소발효 커피를 맛본 많은 바리스타가 시나몬 맛이 난다고 했다지만(시나몬은 넣지 않았다고 한다), 시나몬 향은 맡을 수 없었다. 둥근 보디감이 쫙 퍼지는 듯하더니 뾰족한 이별이 떠올라 처연해지고, 말린 과일의 은은한 단맛이 혀를 감싸는 것 같더니 단단한 쓴맛이 튀어나왔다. 코냑 같더니 이내 주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삼국지> 유비의 부드러움, 장비의 격렬함, 관우의 딴딴함이 섞이더니 더없이 지혜로운 제갈공명으로 변신했다. 더 신기한 건 몇 분 뒤였다. 식은 뒤 마신 커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한 잔의 복잡한 요리였다.
하지만 커피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거리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다. 음식물 썩는 냄새가 날 수도 있는데, 굳이 왜 마시냐는 이도 있다. 심지어 서 대표는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방식을 적용하면 커피 떼루아의 특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심 칼럼니스트는 “확장 가능성은 무한대”라고 강조한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엘카페’. 박미향 기자
▣ 어디서 어떻게 맛보지?
대략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남이 내린 커피를 마시거나 내가 내려 마시거나. 스페셜티커피를 주력으로 내세우는 전문점엔 대부분 있다지만, 이름난 몇 군데 골라 다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커피 리브레’, 을지로의 ‘커피인쇄소’, 강동구에 있는 ‘커피 몽타주’,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디폴트벨류’, 영등포구의 ‘엘카페’, 망원동의 ‘딥블루레이크’, 성북구에 있는 ‘바스크’, 부산의 ‘모모스 커피’ 등을 말이다.
이 중 지난 16일 방문한 엘카페는 양진호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전문점이다. 양 대표는 “되도록 품질이 안정적인 무산소발효 커피를 내놓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는 “기존 커피와 다른 맛과 향이 특징”이라며 “보통 약배전을 하지만 우리는 강배전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이날 마신 무산소발효 커피는 ‘인도 아티칸 아나에어로빅’(6000원). 까만 밤하늘을 오려 컵에 담은 것처럼 진한 색이다. 맛은 더 진하고 묵직하다. “커피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망원시장 앞에 있는 딥블루레이크는 온통 파란색이다. 이철원 대표는 “5년 전부터 무산소발효 커피를 내놨는데, 손님들이 ‘너무 특이하고 맛있다’고 한다. 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약배전한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이들 커피점은 자체 누리집을 통해 원두 온라인 판매를 한다. 누리집이나 에스엔에스를 통해 종류를 공지한다. 생두 가격이 때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원두 가격도 변동이 있다. 파는 때도 규칙적이지 않다. 이철원 대표는 “무산소발효 커피는 대부분 소량 입고하기에 금방 소진된다”고 한다.
무산소발효 커피 원두를 구매하면 집에서 어떻게 추출하는 게 맛있을까? 서필훈 대표는 “물 온도는 94~95도가 적당하고, 내릴 때 빠르게 하는 좋다”고 조언한다. 직접 분쇄할 때는 통상보다 조금 굵게 갈면 산미가 더 풍부하다고 말한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