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 ‘유배 문화 공원’에 있는 한옥 숙박 시설(유배 체험 공간). 김선식 기자가 사리 마을에서 묵은 숙소다. 사진 박재길 전 사리 마을 이장 제공
‘유배’를 자처한 기자는 발을 동동 굴렀다. 거센 풍랑에 배를 띄울 수 없다고 했다. 섬에 도착한 지 이틀째, 육지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외딴 섬마을로 떠난 자발적인 ‘유배 여행’은 점점 ‘강제 유배’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지난 20일 오전 10시께 전남 흑산도 흑산항에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센 풍랑을 피해 항구에 정박한 어선 선원(40·인도네시아인)이 위급했다. 증상은 두통, 구토, 의식불명이었다. 배로는 큰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 흑산면 보건지소는 급히 닥터 헬기를 불러 환자를 목포 한국병원(권역 외상센터)으로 이송했다. 섬사람들은 아침부터 헬기를 보고 환자가 생긴 걸 직감했다. “보시오, 이게 섬사람들 일상이지라.”
흑산도 본섬(부속섬 제외)에만 인구 2336명이 거주한다.(지난 10월31일 기준) 그 안에 동네의원 1곳, 보건지소 1곳, 보건진료소 1곳이 있다. 초등학교 1곳, 중학교 1곳 있다. 고등학교는 없다. 이발소 1곳, 미용실 1곳, 카페 3곳이 있다. 흑산도를 한 바퀴 도는 일주도로는 1996년 개통했다. 도로포장은 2010년에야 완공했다. 일주도로가 없던 시절 흑산도 사람들은 학교와 일터에 갈 때 산을 넘어야 했다.
전남 신안군 흑산면 비리에 있는 상라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열두 굽잇길’. 김선식 기자
전통적인 유명 여행지 ‘홍도’(흑산면 홍도리)는 흑산도 부속 섬이다. 단체 여행객들은 홍도를 둘러보고 나서 짬을 내 흑산도에 들른다. 주객이 바뀐 셈이다. 관광버스 타고 주요 코스를 도장 찍듯 돈다고 한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상라산 정상, ‘최익현 유배지’, ‘유배 문화 공원’, ‘고래 공원’, ‘지도 바위’ 등이다. 그중 ‘유배 문화 공원’은 흑산도 동남쪽 사리에 있다. 아담한 돌담과 포구가 정겨운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76세대, 125명)은 대부분 어업과 농업에 종사한다. 그 마을에서 조선 후기 문신 정약전(1758~1816)이 신유사옥 이후 약 7년간 유배살이 했다. 흑산도는 고려·조선 시대 죽임을 면한 중죄인들을 유배한 섬으로 전해진다. 신안군청이 2009~2014년 사리에 ‘유배 문화 공원’을 만든 까닭이다.
‘고래 공원’ 근처에 있는 ‘흑산도 아가씨’ 동상. 김선식 기자
한해 마지막 달을 앞두고 사리로 떠났다. 자칫하면 뱃길이 막힐 수도 있는 외딴 섬마을에서 2박3일 머물기로 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어둡고 적막한 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 안성맞춤이라고 여겼다. 그곳에선 현란한 불빛과 소음, 뉴스, 영상을 피할 수 있었다. 저녁 시간 방 안에 감도는 정적을 만끽했다. 볼 것도, 들을 것도, 할 것도 없는 시간이었다. 자발적인 ‘유배 여행’은 나와 옛 유배자들과, 섬사람들을 생각하는 여행을 권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자발적 유배’라는 이름으로 유배를 자처하는 여행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바쁘고 어수선한 일상에서 한 발 떨어져서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는 것이다. 이왕 가는 ‘유배 여행’ 행선지를 옛 유배지들로 정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 전남 강진, 추사 김정희 유배지 제주도 서귀포시가 대표적이다.
흑산항 주위를 서성이는 쇠재두루미. 김선식 기자
흑산항에는 쇠재두루미 한 마리가 서성였다. 국내에선 역대 5번째로 발견된 희귀종이라고 한다. 몽골 내륙 등지에서 번식하고 히말라야 산맥을 무리 지어 넘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다. 대오에서 낙오해 동아시아 지역 외딴 섬 흑산도에 홀로 날아든 것으로 보인다. 새는 한참 바다를 바라보다가 깃털 손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 또한 뱃길이 막혀 하릴없이 흑산항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집에 돌아갈 날을 셈해 봤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저물어가는 한 해를 붙잡고 외딴 섬에서 나 홀로 오롯한 시간을 즐길 수밖에 없었다.
흑산도(전남)/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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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고요하고 쓸쓸해서 좋더라…흑산도 ‘유배 여행’
푸른 어둠과 거의 완벽한 무소음의 세계
손암 정약전 유배지 사리마을에서 2박3일
지난 19일 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 포구. 김선식 기자
애초 계획한 일정은 2박3일이었다. 지난 17일 낮 12시50분, 목포항에서 쾌속선 ‘뉴 골드스타 호’에 올랐다. 전남 신안군 1004개 섬 중에서도 남서쪽에 외따로 떨어진 흑산면 흑산도로 가는 길이었다. 흑산항(예리)까지 약 2시간, 항구에서 흑산도 동남쪽 ‘사리’까지 차로 20여분 달렸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자 조선 후기 문인 손암 정약전(1758~1816)이 유배 생활한 마을이다. 정약전은 1801년 신유사옥 당시 신지도(완도)와 우이도(당시 소흑산도)를 거쳐 흑산도로 유배됐다. 신유사옥은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면서 노론 벽파가 시파와 남인 세력을 몰아내려고 벌인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신안군청이 사리에 만든 ‘유배 문화 공원’에 유배인 거주지를 재현한 숙소들이 있다. 전통 한옥을 본떠 초가지붕과 툇마루를 세우고 문에 창호지를 발랐다. 그곳에 조용히 머물 참이었다.
‘유배 여행’ 이튿날 오후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해상 기상이 나빠져 배가 묶였다. 흑산항엔 여객선이 오지 않았다. 먼바다에서 풍랑을 피하려는 어선들만 몰려들었다. 자발적인 유배 여행은 점점 ‘강제 유배’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반나절이 멀다 하고 섬 주민들에게 물었다. “설마 내일은 배가 뜨겠죠?” 조바심 내는 육지 사람이 유난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흑산면사무소 박상혁 계장이 점잖게 응대했다. “가만~히 기다려보소.” 파도를 잠재우는 건 하늘에 달린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느긋하게 ‘유배 여행’을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고려 시대 해적들을 가둔 섬으로 전해지는 흑산면 진리 ‘옥섬’. 김선식 기자
‘자산은 흑산이다. 난 흑산에 유배 왔다. 흑산이란 이름은 검고 어두워서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집안사람들은 편지를 쓸 때 흑산을 늘 자산이라고 썼다. 자는 흑과 같은 뜻이다.’ 정약전은 1814년 흑산도에서 집필한 ‘국내 최초 바다 생물 백과사전’ <자산어보> 서문에 이같이 썼다. 섬 주민들도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다는 뜻”이라고 흑산도를 설명했다.
‘유배 문화 공원’ 한옥 숙박 시설(유배 체험 공간) 방 내부. 김선식 기자
마을도 까맸다. 저녁 7시, 사리는 이미 밤이었다. 숙소 길목을 잠시 헤맸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집을 찾았다. 신발을 벗고 어둠 속을 더듬어 무릎보다 높은 툇마루에 올랐다. 가방을 내려놓고 키보다 낮은 창호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을 드나들 때마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어둠은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차 소리, 사람 소리, 티브이(TV) 소리,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완벽한 무소음의 세계’였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도 괜히 조심스러웠다. 소리 크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을지언정 아주 천천히 물을 내렸다. 할 일이 없었다. 이미 흑산항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사리엔 식당이 없다. 볼 것도 들을 것도 없는 시간, 스마트폰도 내려놓았다. 오랜만에 소리도, 영상도, 뉴스도 없는 저녁 시간을 즐겼다. 책을 읽다가 공상에 빠졌다가 절절 끓는 방바닥에 앉아 졸았다. 다시 깨서 생각에 잠겼다. 정약전도 200여년 전 어둡고 적막한 이 마을에서 온갖 상념에 빠졌을 것이다. 그는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당장 끼니를 걱정했고, 낯선 땅을 두려워하다가 새로운 공간에 호기심을 품었다.
흑산도는 속살도 검다. 이튿날 오전 내내 흑산도 칠락산(271.8m)에 머물렀다. 소사리~큰재~마리재(약 5km) 숲길을 걸었다. 난대림 숲 특유의 ‘푸른 어둠’에 파묻혔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군락은 숲에 길 하나만 허락했다. 무성한 잎은 길에 지붕을 만들고, 유려한 줄기는 철창살처럼 빼곡히 늘어섰다. 멀건 회갈색 줄기 덕에 짙푸른 동백 잎이 더욱 빛나 보였다. 짐승 털 같은 콩짜개덩굴은 줄기를 뒤덮었다. 청미래덩굴(맹감)과 민달팽이, 동백꽃만 유난히 붉었다. 숲은 적막했다. 바람 이는 소리도, 산새 지저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푸드덕푸드덕’. 지척에서 놀란 산새가 날아올랐다.
소사리에서 큰재로 이어지는 칠락산 탐방로. 김선식 기자
칠락산 능선 길에서 바라 본 바다와 흑산도 부속섬 ‘장도’ 풍경.
능선에 오르기까지 긴장했고 헐떡였다. 오랜만에 있는 힘껏 숨을 내쉬었고, 온 힘을 다해 펌프질하는 심장을 느꼈다. 몇 차례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평탄한 능선 길을 만났다. 하늘 아래 드넓은 바다 풍경이 장쾌했다. 구름은 멀리 저수지에 그림자를 띄웠고, 구름 뚫은 햇빛이 흑산도 부속섬 영산도에 금테를 둘렀다. 해무는 부속섬 대장도 쪽으로 서서히 밀려났다. 오래 기다린 능선에서 오래 머물 순 없었다. 여기선 바람이 거세고 숲은 요란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굉음을 냈다. 바람을 피해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밧줄을 잡고 바위를 오르고, 길인지 바위틈인지 모를 험준한 길을 지났다. 또다시 바다가 보이는 능선 길이다. 그렇게 약 4시간가량 숲길을 걸었다. 마리재쪽 일주도로로 나와 400m 떨어진 상라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꼬부랑 도로 ‘열두 굽잇길’이 바다를 향해 내려간다.
‘큰재 삼거리’ 지나 칠락산 능선에서 바라본 흑산항 앞바다. 김선식 기자
정약전도 그처럼 굴곡진 삶을 살다 갔다. 그는 1797년(정조 21년) 성균관 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정6품)을 지냈다. 1801년 그와 형제들은 신유사옥으로 평지풍파를 겪었다. 그해 봄 서학(천주교)을 퍼뜨렸단 명목으로 동생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참수당했다. 그와 동생 정약용은 서학에 심취한 이들과 교류했단 이유로 신지도(완도군 신지면)와 장기현(포항 장기면)으로 유배당했다. 가을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졌다. 정약전 조카사위 황사영이 중국 베이징 주교에게 신유박해에 개입하도록 청원하는 밀서를 전달하려 했다는 사건이다. 황사영은 참수됐고 정약전, 정약용은 다시 투옥돼 국문을 받고 흑산도와 전남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814년 동생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난다는 소식을 듣고, 정약전은 흑산도보다는 육지와 가까운 우이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거기서 동생을 기다렸지만, 끝내 상봉하지 못했다. 그는 1816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리 ‘유배 문화 공원’에 있는 옛 유배인들을 소개하는 비석. 김선식 기자
정약전은 자신을 유폐하는 대신 섬사람들과 어울리며 유배살이에 적응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섬 친구들과 흑산도를 유람하며 섬 생활을 즐긴 생활상이 그가 남긴 시들에 등장한다. 칠락산 탐방로 입구가 있는 소사리 근처 숲으로도 놀러 갔나 보다.
‘해산이 마치 거미와 같아/ 산줄기가 사방으로 달려가네/ 골짜기는 각각 조수를 머금고/ 마른 흙은 다만 봉우리들뿐/ 집에 있어도 배를 탄 듯/ 고개 들면 물리도록 아득한 물/ 접때 내가 바라본 소사는/ 자못 괴로운 마음 풀어줄 만했지/ 마침내 계고재 노인과 기약을 해서/ 향기로운 이곳에 유람 왔다네(이하 생략)’(‘소사미 술회’ 中, <손암 정약전 시문집>)
사리 ‘유배 문화 공원’에 있는 손암 정약전 동상. 김선식 기자
정약전이 쓴 희대의 역작 <자산어보>도 섬사람에게 빚졌다. 그는 흑산도 부속섬 대둔도 주민 장덕순(창대) 도움을 받아 바다 생물을 연구했다. 책은 종종 장창대의 말을 인용한다. ‘장창대는 “영남산은 청어의 등골뼈가 74마디고, 호남산은 등골뼈가 52마디입니다”라고 했다.’(<자산어보>·정명현 옮김)
확인은 안 되지만, 정약전이 장창대 말에 감읍했는지, 그 많은 청어 등뼈를 한 줄씩 세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바닷바람 잔잔한 바위틈에 앉아 하염없이 뼈 개수를 꼽았을지도 모르는 200여년 전 사람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해진다.
사리 ‘유배 문화 공원’에 있는 사촌서당(복성재) 입구. 김선식 기자
사리 ‘유배 문화 공원’은 옛 흑산도 유배인들을 기억하는 공간이다. 정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친 ‘사촌서당’, 유배 문화 체험장(한옥 숙박 시설), ‘자산어보원’, 정약전 동상, 손암정(정자), 야생화원, 사리 성당 등이 있다. 자산어보원엔 정약전, 최익현 등 고려~조선 시대 흑산도 유배인들과 각종 바다 생물을 소개하는 비석을 세웠다.
예정한 일정은 이틀이나 지나 버렸다. 풍랑은 바닷길을 내주지 않았다. 흑산항 밤하늘엔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흰 무리가 떠돌았다. 불 밝힌 어선들에 몰려든 갈매기 떼였다. 파도처럼 일렁이던 고립감도 잠시 누그러졌다. 이왕 유배를 자처한 여행, 그 적막하고 신비로운 시간을 좀 더 끌어안기로 했다.
흑산도(전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SC] 흑산도 유배 여행 수첩
교통 목포항에서 흑산항까지 하루 3차례 여객선을 운항한다. 오전 7시50분, 낮 12시50분, 오후 3시30분 출항. 소요시간 2시간, 가격은 성인, 주말 기준 편도 3만7600원. 흑산항에서 목포항으로 가는 여객선도 하루 3차례 여객선을 운항한다. 오전 9시, 11시10분, 오후 4시10분 출항.(동절기 운항 시각 변동 가능성 있음) 흑산도 일주도로에 신안군 공영버스가 다닌다. 동쪽 방면으론 하루 3차례, 서쪽 방면으론 하루 10차례 운행한다. 막차는 예리에서 오후 5시40분에 출발한다.(동절기 기준) 막차는 짝숫날엔 동쪽 방면으로 홀숫날엔 서쪽 방면으로 간다. 예리, 진리, 읍동, 마리, 비리, 곤촌, 심리, 암동, 사리, 소사리, 천촌리, 청촌리 등 12개 정류장에 정차한다. 예리~소사리는 동쪽, 서쪽 방면 거리가 비슷하다. 요금은 1000원. 현금을 준비해야 한다. 공영버스를 이용할 계획이라면 미리 시간표와 정류장 위치 등을 확인하는 게 좋겠다. 흑산도에 콜택시는 총 7대다. 한 콜택시 기사에게 문의한 결과, 사리~예리 편도 2만5000원, 일주도로 한 바퀴(주요 관광지 사진촬영 시간 포함) 6만원. 렌터카 업체는 없다.
숙소 현재 사리 ‘유배 문화 공원’에서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은 3개 동이다. 나머지 2개 동은 수리 중. 외관은 한옥, 내부는 현대식이다. 각 동에 온돌방 2개, 실내 화장실 1개가 있다. 난방과 온수 시설, 침구류를 갖췄다. 세면도구는 지참해야 한다. 다만 여느 소박한 여행지 숙소나 자연휴양림처럼 벌레나 곰팡이를 만날 수도 있는데,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이런 불편함은 ‘유배 여행’의 또 다른 얼굴이다. 가격은 1개 동 1박 기준 5만원.(문의 박준호 사리 이장 010-9435-5348) 그 밖에 흑산도 호텔, 모텔, 여관 등은 예리와 진리에 몰려 있다.
식당 흑산도는 삭히지 않은 홍어회, 장어간국(말린 바닷장어를 넣고 끓인 국)이 별미다. 태양식당(예리2길 45-2/061-275-9239)은 장어 또는 우럭간국 4만원부터, 홍어회 4만원부터. 대림수산식당(흑산일주로 20/010-5205-2045)은 홍어회 3만원부터, 장어 또는 우럭간국 5만원부터(4인 기준).
칠락산 탐방로 소사리 버스정류장 근처 탐방로 입구에 안내판이 있다. 약 900m 걷다가 갈림길에서 다리를 건너면 군부대가 나온다. 군부대 옆길이 탐방로 초입이다. 표지판을 보고 계속 마리재 방향으로 걸으면 된다. 두 차례 갈림길이 나온다. 큰재 삼거리에서 마리재 방향으로, 마리재와 미술관 갈림길에서도 마리재 방향으로 가면 된다. 마리재에서 상라산 정상 들머리까지 약 400m는 도로 갓길로 걸어 올라야 한다. 상라산 정상은 약 160m만 오르면 된다. 마리재, 상라산에서 가까운 버스 정류장은 마리 정류장과 읍동 정류장이다. 마리재 탐방로 출입구에서 마리 정류장까지는 일주도로 따라 약 1㎞, 상라산 들머리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에서 읍동 정류장까지는 일주도로 따라 약 2㎞ 거리다. 탐방 이후엔 버스보단 콜택시를 이용하는 게 낫겠다.
기타 여행지 ‘자산 문화 도서관’은 정약전 생애와 저작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 겸 도서관이다.(흑산일주로 5) 옥섬은 고려 시대 해적들을 가둔 섬으로 전해지는 작은 섬이다. 연륙교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진리 산4) ‘신들의 정원’은 소나무와 초령목 등 나무가 무성한 당숲이다. 바다까지 자연관찰로가 이어진다. 들머리에 마을 사람들이 번영과 무사고, 풍어를 빌던 진리당과 용왕당이 있다.(진리 산77) 고래 공원은 1960년대 후반까지 흑산도에서 고래파시(어판장)가 열린 곳이다. 주변에 과거 고래 어판장이었던 폐건물도 남아 있다.(예리 1길 162-5) 그 밖에 철새전시관(흑산일주로 212/코로나 19로 휴관 중), 박득순 미술관(진마을길 53),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예리 521) 등이 있다.
문의 흑산항 관광안내소 061-246-5191, 목포 여객터미널 1666-0910.
김선식 기자
‘신들의 정원’ 들머리에 있는 진리당. 김선식 기자
흑산도 ‘고래 공원’이 있는 자리에선 1960년대 후반까지 고래 파시(어판장)가 열렸다고 전해진다. ‘자산 문화 도서관’에 걸려 있는 ‘고래 사진’ 액자. 김선식 기자
대림수산식당에서 파는 삭히지 않은 홍어회. 김선식 기자
흑산도(전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