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미륵산성 동문지 주변 성벽. 김선식 기자
어느덧 세밑을 향해 간다. 한해는 왜 그리 빠르게 지나가는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가 했다는 말이 비수를 꽂는다. ‘사람들은 보통 1년간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10년간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 1년 전 소박한 꿈을 안고 새해를 맞았다. 하지만 연초부터 창궐한 바이러스가 한해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잃어버린 1년”이라며 자조했다. 유난히 빨리 흘러간 한해, 이제 정리할 시간이다.
옛 왕국이 남긴 흔적을 찾아 떠났다. 허망하고도 찬란한 역사 앞에서 큰 울림보다는 평정심을 구하려 했다. 빛바랜 유적이 견뎌 온 세월 앞에서 올 한해가 정지화면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전북 익산시는 사비 백제(538~660년) 후기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 백제 30대 무왕 집권기(600~641년) 익산(옛 금마저)에서 재도약을 꿈꾼 흔적이다. 지난 26~27일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미륵산성에서 백제의 마지막 숨결을 느꼈다.
미륵사지 동쪽 연못지에서 바라본 풍경. 김선식 기자
키 큰 석탑 하나가 허허벌판을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 있다.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 들머리 ‘왕궁리 오층 석탑’(국보 제289호·높이 8.5m)이다. 그 너머 너른 터는 백제 무왕이 세운 왕궁이 있던 자리다. 약 1400년 전 왕과 왕후, 왕족과 신하, 장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그때도 누군가는 매일 나라를 걱정하고, 누군가는 금 공예품 만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을 것이다. 무왕은 익산에서 왕권 기반을 닦으려 했다. 앞서 백제는 554년 성왕이 전사한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대패했다. 그 뒤 왕권을 물려받은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은 왕권의 위기도 함께 물려받았다.
궁궐을 돌아다녔다. 흔적만 남은 빈터다. 여백은 상상으로 채워야 한다. 넓이는 남북 490m, 동서 240m가량, 궁궐을 에워싼 담장은 폭 3m 정도였다. 왕궁은 크게 둘로 나뉜다. 남쪽엔 거주 구역, 북쪽엔 정원과 후원(뒤뜰)을 뒀다. 건물터는 총 43기 발견됐다. 자갈돌과 조경석으로 꾸민 정원은 수조에서 연못으로 물이 흘렀다고 한다. 백제 왕궁에서 정원의 전모가 밝혀진 첫 사례다. 대형 수로(길이 450m, 너비 3~7m)가 후원을 감싸며 흘렀다. 왕궁 서남쪽엔 부엌을 뒀다. 2015년 8월 그곳에서 철제 솥, 토기, 항아리, 숫돌 등을 발굴했다. 서북쪽엔 장인들이 일하던 공방이 있었다. 거기서 백제 문화를 꽃피웠다. 매일 심혈을 기울여 금·유리 공예품 등을 만들었을 것이다. 근처 대형 공동 화장실 터도 발견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삼국시대 화장실이다. 구덩이에 분뇨가 차면 물길 따라 성 밖으로 배출하는 구조였다고 한다. 총 3곳 중 가장 큰 화장실은 길이 10.8m, 너비 1.8m, 깊이 3.4m로 추정한다. 나머지 2곳은 당시 화장실 모형을 만들어 놨다.
왕궁리 유적에 재현한 백제 시대 대형 화장실 모형. 김선식 기자
왕궁리 오층 석탑은 무왕 사후(백제 말~고려 초) 쌓았다고 추정한다. 석탑은 왕궁이 사원으로 변모한 흔적이다. 석탑 뒤 금당 터와 강당 터 돌기둥이 그루터기처럼 남았다. 사원은 통일신라 시대 이후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유칠선 전북 문화관광해설사는 “저녁 석양에 비치는 왕궁리 오층 석탑은 마치 말 못할 설움을 끌어안은 것처럼 애잔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왕궁리 유적’ 한쪽에 2008년 문 연 전시관이 있다. 수막새(목조건축 지붕의 기왓골 끝에 사용한 기와), 대형 항아리, 금 도가니, 토기, 등잔, 금·유리 공예품 등 당시 유물들을 살펴볼 수 있다. 유네스코는 2015년 7월 익산, 공주, 부여 유적 8곳(백제역사유적지구)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익산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2곳이 있다.
지난해 복원 완료한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김선식 기자
미륵사지는 백제 최대 사원이다.(사적 제150호·약 남북 134m, 동서 172m) 백제 무왕은 미륵사지에 꿈을 심었다. <삼국유사>에는 미륵사 창건 설화가 기록돼 있다. 백제 무왕과 왕후가 미륵산 중턱 사자사로 가다가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봤다. 부인 소원에 따라 연못을 메우고 세쌍의 탑과 법당을 지었다. 동원, 중원, 서원 3원에 각각 1탑, 1금당을 세웠다. 당대로선 독특한 가람 배치였다. 약 1400년 세월이 흘러 탑 하나만 남았다. 서원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다. 국내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됐다. 허물어져 6층까지 일부만 남은 석탑을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단일문화재 중 최장 기간(1998~2019년) 수리·복원한 결과다. 높이 약 14.5m, 폭 12.5m, 무게 약 1830t 석탑엔 목조건축 기법이 녹아 있다. 층마다 모서리 기둥이 살짝 높고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끝은 하늘을 향한다.
국립 익산 박물관에 전시한 금동제 여래입상과 청동방울.(국보 제123호) 왕궁리 오층 석탑에서 발굴했다.
2009년 1월, 해체·복원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중심기둥(심주) 1층 중앙에서 사리를 넣은 구멍(사리공)을 발견했다. 판유리 깐 바닥에 영롱한 금제 사리외호(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사리외호 주변엔 청동합, 유리구슬, 은제관식 등 공양품을 넣었다. 거기서 금판 앞뒤로 총 193자를 새긴 금제 사리 봉영기도 나왔다. 사리 봉안 경위를 적었다. 639년 사리를 봉안했고 당시 왕후는 백제 귀족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기록했다. 그와 함께 왕실의 안녕과 중생의 성불을 기원하는 바람을 담았다. 사리외호 안엔 유리구슬과 사리내호를 넣었고, 사리내호 안에 사리를 담은 유리 사리병을 넣었다. 사리는 2015년 12월 석탑에 재봉안했다.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발굴한 백제 시대 금동 신발. 국립 익산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김선식 기자
미륵사지 들머리에 두 연못(각 너비 40~50m가량)이 있다. 해 질 녘 당간지주(깃대를 지탱하는 돌기둥) 2기와 미륵사지 석탑, 동원 9층 석탑(터와 부재 일부만 남은 동원 탑 자리에 1992년 새로 세운 탑· 높이 27.8m)이 서쪽 연못에 비친다. 중원 목탑은 터만 남았다. 통일신라 후기 화재로 사라졌다고 추정한다. 임진왜란 이후 미륵사도 사라졌다. 석탑 뒤로 금당, 승방지, 강당지, 공방지 흔적만 남았다. 고대 왕국의 꿈을 간직한 절터는 해가 지면 조명이 석탑과 당간지주를 비춘다. 올해 1월 증축 재개관한 국립 익산 박물관은 미륵사지 가장 낮은 곳에 자리 잡았다. 현대식 건물을 뒤로 물려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풍경을 연출하려고 한 것이다. 미륵산 산세 닮은 들머리 삼각 외벽 뒤로 낮고 길게 뻗어 있다. 옛 왕국이 남긴 빛나는 유물을 지하 깊숙이 고이 모셔둔 형상이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한 금제 사리내호(보물 제1991호), 왕궁리 오층 석탑에서 발견한 금동제 여래입상과 청동방울(국보 제123호), 입점리 고분에서 발견한 금동 신발 등 당대 사리 장엄구, 공예품과 생활 도구 등을 전시한다.
낮고 길게 건축한 국립 익산 박물관. 김선식 기자
옛 성벽엔 슬픔이 감돈다. 치열처럼 고르고 단단한 성은 역설적으로 망국을 상징한다. 미륵사지를 안은 미륵산에 미륵산성(총 둘레 1776m, 높이 5m 안팎)이 있다. 기자조선(은나라가 망한 후 기자가 고조선에 망명해 세웠다는 나라) 마지막 왕인 준왕이 쌓은 성이라는 설과 백제 무왕이 쌓은 성이라는 설 등이 분분하다. 성에서 발견한 명문와(글씨 새긴 기와)에 ‘금마저’(백제 때 익산 지명)라고 쓰여 있었다. 백제 때 처음 쌓고 통일신라 때 대대적으로 개축했다는 추정에 힘이 실렸다. 미륵산성 동쪽 성벽에 오르면 절벽처럼 산을 따라 오르는 성이 장엄하게 이어진다. 옛 왕국 사람들은 그처럼 드라마틱한 나라의 부흥을 꿈꿨을 것이다.
옛 왕국이 남긴 터를 지나 신비로운 풍경을 간직한 숲으로 향했다. 미륵산성 아래 구룡마을 대나무 숲이다. 마을 한복판에서 자생한 대나무 숲은 조선시대부터 그 자리를 지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국내 최대 대나무 군락지(약 16만5289.㎡·5만평)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대나무 숲을 생금밭으로 불렀다. 강경 5일장에 죽제품을 내다 팔아 지역 경제 주요 소득원이 됐다. 한낮에도 대나무 숲은 어둡다. 빼곡히 들어 찬 대나무뿐인 숲이다. 빛이 댓잎 사이로 간신히 새어 들어왔다. 뱀이 기어 다니는 것처럼 대 뿌리가 울룩불룩 튀어나온 바닥을 걸었다. 댓잎이 바람에 날리다가 정적이 일고, 날아오르는 산새가 정적을 깼다. 어두컴컴한 대나무 숲도 대나무 줄기 사이는 훤히 비어 있다. 아무도 없는 대나무 숲에서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 둔 비밀과 앙금을 털어내고 싶었다. 깊은 한숨만 토했다.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옛터를 거쳐 다다른 대나무 숲에서 모처럼 고요하고 평안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익산/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SC] 익산 여행 수첩
이용 정보 왕궁리 유적 전시관은 오전 9시~오후 6시 개관한다.(매주 월요일 및 1월1일 휴관/입장료 무료/왕궁면 궁성로 666) 국립 익산 박물관은 오전 10시~오후 6시 개관한다.(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휴관/입장료 무료/금마면 미륵사지로 362)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시간당 최대 120명까지 관람 예약제를 운용하고 있다. 예약 인원이 미달하면 현장에서 바로 관람할 수 있다.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해가 진 뒤에도 열려 있다. 미륵산성 동문지까지는 임
도 들머리(금마면 신용리 181-25)에서 도보 약 20분 거리다. 구룡마을 대나무숲 입구(금마면 신용리 533-3)는 ‘대솔 한증막’ 옆이다.
식당 ‘한일식당’(황등면 황등로 106/063-856-4471)은 ‘황등비빔밥’(육회 비빔밥·9000원)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신생대반점(중앙로 12-47/063-855-1533)은 춘장과 된장을 일정 비율로 섞은 짜장을 비벼 먹는 된장짜장(8000원)을 낸다. 담백하고 구수하다. 익산역 주변에 피순대 전문점이 여럿이다. 남부시장 골목 ‘삼양 웰빙 순대’(평동로13길 18/063-855-8341)는 현지 주민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다.(순댓국 6000원, 순대 모둠 7000원, 막창 전골 9000원)
숙소 ‘웨스턴라이프호텔’ 등 호텔, 모텔 등이 익산역과 익산시청 주변에 몰려 있다.
문의 익산 미륵사지 관광안내소 063-859-3873, 왕궁리 유적 안내소 063-859-4799.
익산/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