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색상의 아크릴로 제작된 해턴의 ‘멜로우 콜렉션’ 꽃병. 사진 해턴 제공
계절의 변화는 달력보다 사람의 마음이 더 정확하게 알아챈다. 문득 꽃이 생각나고 집 안에 들이고 싶어진다면 그건 봄이 곧 온다는 분명한 증거다. 하지만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요즘 계절과 상관없이 꽃에 관심 갖는 이가 늘고 있다. 화사한 꽃은 다소 삭막한 집 안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주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꽃병 수요도 증가하고 있다. 같은 꽃이라도 꽃병을 달리하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예전 유행하던 꽃병은 원형이나 사각형 등 단순한 형태였다면, 이제는 콘솔이나 보조탁자에 그냥 두기만 해도 세련미가 넘칠 만큼 색과 형태가 다양해졌다. 꽃병 자체만으로 훌륭한 장식품이다. 헤이(Hay)의 ‘스플래시 베이스’(Splash Vase)는 이름 그대로 물감들이 꽃병 표면에 튀거나 떨어진 것 같은 디자인으로, 꽃병이 아니라 예술 작품 같다. 국내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디자인 그룹 해턴(HATTERN)의 ‘머지(Merge) 베이스’는 유리나 도자기가 아닌 아크릴 소재로, 각기 다른 모양의 아크릴이 겹치면서 다른 색과 면이 나타나는 조형적인 꽃병이다. 이 브랜드의 ‘멜로우(Mellow) 베이스’는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색채분할법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꽃병이다. 여러 색이 섞이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예술 작품 같은 헤이의 ‘스플래시 베이스’. 사진 이노메싸 제공
이탈리아 브랜드 아티피코(Atipico)의 ‘스트라이프(Stripe) 베이스’는 모듈 각각이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든 감각적인 꽃병인데, 모듈을 분리해 촛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 그 자체로도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독특한 제품이다. 영국 디자이너, 톰 딕슨(Tom Dixon)이 디자인한 ‘스월’(Swirl) 컬렉션 꽃병은 버려진 대리석 분말과 안료, 수지를 섞은 재활용 블록으로 만들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대리석이지만, 자연 대리석 특유의 패턴과 중량감, 고급스러운 느낌은 그대로 살아있다. 그 자체로 묵직한 조각품 같다.
하이메 아욘이 디자인한 프리츠 한센의 ‘이케바나 베이스’. 사진 프리츠 한센 제공
요즘 또 다른 꽃병 트렌드는 한두 송이 꽃만 꽃아도 매우 아름답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제품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하이메 아욘(Jamie Hayon)이 디자인한 프리츠 한센(Fritz Hansen)의 ‘이케바나(Ikebana) 베이스’가 대표적이다. 일본어로 ‘꽃을 살린다’는 뜻을 담은 일본 전통 꽃꽂이에서 이름을 딴 이 꽃병은 윗부분에 구멍이 있는 황동 덮개가 있는데, 구멍마다 꽃을 꽂으면 다발이 아니어도 풍성한 느낌이 든다. 꽃꽂이에 서툰 사람도 작품처럼 꽃을 꽂을 수 있다. 최근에는 비슷한 콘셉트의 ‘이케루’(Ikeru)가 출시됐는데, 꽃을 꽂을 수 있는 메탈 기둥 여러 개로 이루어진 모양새가 건축 같은 느낌마저 든다. ‘로낭 & 에르완 부훌렉’(Ronan & Erwan Bouroullec) 형제가 디자인한 비트라(Vitra)의 ‘누아지(Nuage) 베이스’는 프랑스어로 ‘구름’이라는 뜻인데, 이름처럼 다양한 길이의 알루미늄 기둥이 모여 구름 같은 모양을 형성한 디자인이다. 이 제품 역시 구멍이 뚫린 각각의 기둥마다, 혹은 기둥 하나에만 꽃을 꽂아도 매우 아름답다. 네덜란드 리빙 브랜드인 ‘스튜디오 마쿠라’(Studio Macura)의 ‘라바(Lava) 베이스’도 꽃병 중앙에 작은 구멍이 뚫린 화산암이 들어있어 적은 양의 꽃과 식물만으로도 완벽한 꽃꽂이를 완성할 수 있는 제품이다.
메탈 기둥 여러 개가 결합한 비트라의 ‘누아지 베이스’. 사진 짐블랑 제공
꽃병이 디자이너의 이름을 대표하는 아이템이 될 때도 있다. 핀란드의 국민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Alvar Aalto)가 1936년께 디자인한 ‘이딸라’(Iittala)의 ‘알토(Aalto) 베이스’가 그런 경우다. 특유의 수려한 곡선은 알바 알토가 핀란드의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것이다. 알토 화병 한개를 만들기 위해 이딸라 유리 공예 장인 7명이 매달린다고 한다. 무려 30시간 동안 제작 과정 12단계를 거쳐 세상에 태어나는 꽃병이다. 이 제품은 헬싱키 사보이 레스토랑이 대량 구입해 사용하면서 유명해져서 일명 ‘사보이(Savoy) 꽃병’이라는 별칭도 생겼다. 2020년엔 100% 재활용 유리로 제작한 리사이클 에디션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제품마다 활용한 유리의 색과 소재가 조금씩 달라서 더욱 특별하다.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알토 베이스’. 사진 이딸라 제공
최근에는 빈티지 꽃병을 찾는 사람도 많다. 빈티지 꽃병 대부분은 1000년이 넘는 세계적인 유리 공예 역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작은 섬, 무라노에서 제작된 것이다. 모두 유리공예가들이 직접 입으로 부는 ‘핸드 블로운’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모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특별한 꽃병을 소장하고 싶은 사람들이 마치 작품을 고르듯 빈티지 꽃병을 선택한다. 흔히 빈티지 가구나 그릇을 판매하는 숍에서 빈티지 꽃병도 판매하는데, 특히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위치한 빈티지 숍 ‘빅슬립’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독일, 체코, 슬로베니아 등에서 수입한 1970~80년대 빈티지 꽃병들을 살 수 있다. 빅슬립의 대표는 빈티지 꽃병의 매력에 대해 “꽃이나 식물을 꽂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워 오브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면서 “빈티지 꽃병은 여느 꽃병에 견줘 장식적이고 화려한 디자인이 많아 보관할 때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다양한 빈티지 꽃병을 구경할 수 있는 ‘빅슬립’. 사진 빅슬립 제공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알토 베이스’. 사진 이딸라 제공-
오늘부터 일상 공간에 꽃 몇 송이를 들여놓는 건 어떨까? 이른 아침 꽃 도매시장이나 늦은 퇴근길 동네 꽃집을 찾아도 좋다. 평범한 공간에 특별한 꽃병이 더해진다면 지루한 일상에 생기가 좀 더 넘치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윤주(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국내 디자이너 그룹 해턴의 ‘머지 베이스’. 사진 해턴 제공
프랑스어로 ‘구름’이라는 뜻인 비트라의 ‘누아지 베이스’. 사진 짐블랑 제공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알토 베이스’. 사진 이딸라 제공-5
영국의 국민 디자이너 톰 딕슨이 디자인한 ‘스월 베이스’. 사진 르위켄 제공
여러 모듈을 분리하거나 합칠 수 있는 아티피크의 ‘스트라이프 베이스’. 사진 짐블랑 제공
여러 모듈을 분리하거나 합칠 수 있는 아티피크의 ‘스트라이프 베이스’. 사진 짐블랑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