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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서울시장 선거 뒤, 페라가모는 웃었을까

등록 2021-04-14 17:35수정 2021-04-15 09:49

‘오세훈 구두’로 때아닌 상승세
검색량 치솟았던 페라가모 로퍼
편하지 않지만 편해 보이고
수더분해 보이지만 호사스러운
갑론을박의 주인공 로퍼란 무엇인가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로퍼. 살바토레 페라가모 제공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로퍼. 살바토레 페라가모 제공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날 모 경제신문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뜻밖의 승자는 ‘페라가모’’라는 기사를 냈다. 기사를 요약하면 3월 30일 구글 트렌드 검색량 분석 결과 박 후보가 35, 오 후보가 38의 검색 지수를 기록한 반면, 페라가모는 73까지 치솟았다는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며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한국 홍보 담당자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기사 제목처럼 높은 검색량을 마냥 달가워했을까? 하물며 기사가 정치면에 실렸는데?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유서 깊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이자 구두 디자이너 이름이다. 디자인에 소질이 있던 이탈리아 청년이 1927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구두 매장을 낸 것이 브랜드의 시작이다. 지금은 옷도 만들고 가방을 비롯해 벨트 같은 가죽 제품도 제작하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건 구두다. 질 좋은 가죽을 사용해 전통적인 제법으로 만든 구두는 외관이 고급스럽고 가격이 비싸다. 브랜드의 공식 온라인 매장에 접속하면 제품과 가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지간한 구두 가격이 80~100만원에 형성돼 있다.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2021년 봄 패션쇼에서 모델이 하늘색 로퍼를 신고 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제공
살바토레 페라가모 2021년 봄 패션쇼에서 모델이 하늘색 로퍼를 신고 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제공

“금이라도 둘렀나요?” 이런 류의 질문을 패션 기자 시절 엄청 많이 받았다. 간단히 설명하면, 판매가는 그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재료비+인건비+약간의 이윤=가격’이라는 공식이 늘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임의로 정한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는 사람이 있으면 판매자 입장에선 가격을 낮출 이유가 없다. 없어서 못 판다는 샤넬과 에르메스 가방, 롤렉스 시계의 판매가가 꾸준히 우상향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럼 대체 로퍼는 뭘까? 로퍼는 끈이 없는 구두를 일컫는다. 신고 벗는 것이 편해 ‘게으름뱅이’라는 의미의 ‘로퍼(Loafer)’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신고 벗는 것이 간단하면 과연 편할까? 신고 걸을 때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끈을 묶지 않는 형태이다 보니 신발이 너무 크면 걸을 때마다 들썩여 불편하고, 너무 꽉 끼면 발뒤꿈치가 까질 염려가 있다. 많이 걸어야 하는 직군에서 로퍼를 선호하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꼭 신어보고 구입해야 하고, 가능하면 구두 매장 직원의 조언도 들어보는 것이 좋다.

페니 로퍼. 로크 제공
페니 로퍼. 로크 제공

로퍼의 장점은 편한 것보다는 ‘편해 보인다’는 데 있다. 로퍼의 전통적인 활용법은 양말을 신지 않고 발목을 드러내는 것인데, 면바지나 물 빠진 청바지와 함께 스타일링하면 부드럽고 여유로운 인상을 풍긴다. 반바지와도 썩 잘 어울린다. 양말은 안 신는 편이 낫지만 땀 때문에 거슬린다면 인비저블 양말(발등 중간까지만 덮는 형태로 구두를 신었을 때 보이지 않는 양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바지 길이는 로퍼를 신고 똑바로 섰을 때 발목이 살짝 보이거나 바지 밑단에 주름이 한번 생기면 적당하다. 자글자글한 주름이 지는 긴 바지와 로퍼는 어울리지 않는다.

로퍼라고 다 똑같이 생긴 건 아니다. 발등에 어떤 장식을 넣느냐에 따라 모양과 이름이 달라진다. 만약 누군가의 구두를 보고 브랜드를 유추할 수 있었다면 그건 브랜드 로고가 발등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고로 명품 브랜드임을 드러내는 제품도 있지만, 사실 단순한 모양의 금속으로 장식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이런 로퍼를 ‘체인 로퍼(Chain Loafer)’라고 하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구찌의 효자 상품인 ‘홀스빗 로퍼’다. 홀스 빗(Horse Bit)이란 말의 고삐를 구성하는 금속 요소로, 홀스빗 로퍼의 금속 장식은 이걸 형상화했다.

로퍼를 신으면 보이지 않는 인비저블 양말. 바버샵 제공
로퍼를 신으면 보이지 않는 인비저블 양말. 바버샵 제공

발등에 밴드 장식이 있는 로퍼는 ‘페니 로퍼(Penny Loafer)’라고 부른다. 과거 영국 학생들이 공중전화 요금인 1페니를 밴드에 끼워 넣고 다닌 것에서 유래했다. 1950년대 미국 아이비리그(미국 북동부에 있는 8개의 명문 사립대학을 일컫는 용어) 대학생들에게 크게 유행했고, 동전을 신발에 끼우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소문이 유행에 기름을 부었다. 당대의 미국 명문대 학생 스타일을 ‘아이비 룩’이라는 규정하는데, 이 룩에 필수적으로 꼽히는 물건이 페니 로퍼다.

술이 달린 로퍼는 ‘태슬 로퍼(Tassel Loafer)’라고 한다. 페니 로퍼가 담백하고 수더분한 모양새라면 태슬 로퍼는 한결 멋을 부린 인상이다. 실제로 태슬 로퍼는 헝가리 출신 배우 폴 루카스(1930~1950년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던 배우)가 유럽에서 산 구두를 변형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이 리폼에 관여한 브랜드가 구두 마니아들이 지금도 열광하는 ‘알든’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태슬 로퍼를 페니 로퍼보다 조금 더 격식 있는 신발로 인식했다. 태슬 로퍼는 페니 로퍼 못지 않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실제로 알든이 태슬 로퍼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다른 신발의 생산을 중단했을 정도라고 한다.

태슬 로퍼. 팔러 제공
태슬 로퍼. 팔러 제공

재밌는 건 20세기 초에 나온 구두 디자인과 기술이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어의 법칙을 타고 아이티(IT) 관련 제품들이 폭주하는 2021년에도 말이다. 구두 밑창을 여전히 가죽으로 만드는 것도 과거의 유산이다. 구두가 세상에 등장했던 초창기에는 고무가 없었다. 합성 고무가 최초로 상업화한 것이 1930년대이니 19세기 사람들은 고무를 구두에 사용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밑창을 가죽으로 만들면 여러 단점이 있는데, 고무보다 미끄럽고 폭신하지도 않으며 물에도 약하다. 그렇지만 유수의 제화업체가 전통과 고급스러움을 이유로 여전히 가죽으로 밑창을 만든다. 명성이 높은 구두 브랜드일수록 전통을 실용보다 앞세운다. 마치 이는 관리하기 편한 쿼츠 손목시계(건전지로 구동되는 시계)보다 태엽을 계속 감아야 하고 오차도 발생하는 기계식 태엽 시계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과 비슷하다.

밑창을 가죽으로 만든 구두. 유니페어 제공
밑창을 가죽으로 만든 구두. 유니페어 제공

얼마 전 지인이 수동으로 변속하는 중고차(일명 스틱차)를 샀다. 자율 주행을 코앞에 둔 시점에 스틱차를 산 게 흥미로워 이유를 물었다. “말하자면 승마 같은 취미입니다. 요즘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승마와 경마에 열광하잖아요. 말 한 마리 들였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최신 기술의 집약체인 러닝화를 두고 불편한 구두를 21세기에도 신는 건 대체 불가능한 ‘무엇’이 있어서다. 가죽으로 신발 전체를 두른 호사스러움, 인간의 발 모양을 지나치게 과장하지도 볼품없게 격하하지도 않는 조형미, 신으면서 가죽이 적당히 늘어나 발과 호응을 이루는 친화력 등이 어우러져 구두만의 매력이 생긴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오랫동안 고쳐 신은 구두를 보면 아버지의 구두를 닦고 천원을 받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요즘 아이들은 가계에서 어떤 부수입을 올릴까? 그 돈으로 여전히 과자를 사 먹는지도 궁금하다.

임건(<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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