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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어허!” 돼지에게 바치는 레퀴엠

등록 2021-04-16 05:00수정 2021-04-16 09:35

순댓국. 클립아트코리아
순댓국. 클립아트코리아

지난 연재에서 순대 얘기를 했다. 열화와 같은 댓글이 10만개쯤 달렸다. 특히 순대를 훔쳐 먹다가 손에 화상을 입은 정태를 걱정하는 고마운 글이 많았다. 대한민국 댓글러는 정이 넘친다. 녀석은, 지금도 가끔 만나면 그때를 떠올린다. 아주 회고록을 쓸 기세다. 뉘 며느리, 손자들도 볼 텐데 잘 써봐.

“그때 순대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어. 뜨거운데 놓칠 수 없더라고. 말랑하고 탄력 있는 거.”

같이 앉은 중늙은이 동창들이 말했다.

“야, 그때 순댓값 물가인상 쳐서 돌려드려. 신문기자도 불러서 사진 한 방 찍고.” “미담 났네. 미담 났어.” 정태는 썰지 않은 똬리 순대를 맨손으로 으적으적 씹어 먹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훔친 통순대니까 당연히 썰고 자시고 할 게 없었다.) 통순대가 정말 맛있지, 암. 김밥도 그렇게 먹으면 맛있는 이유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알다시피 돼지 부속이 아주 비싼 나라다. 특히 족발, 등뼈는 세계 평균값의 열 배는 되는 것 같다. 원래는 싸서 먹었는데, 인기 폭발해서 값이 올라간 경우다. 족발이 대중화된 건 1980년대이고, 등뼈 값 올린 주범(?)인 감자탕도 그렇다. 족발과 감자탕 안주 스토리는 다음에 한 번 풀어보련다. 오늘은 뒷고기다.

뒷고기가 유행이다. 보통 돼지머리에서 발라낸 살을 말한다. 과거 도축장 기술자(정형사)들이 적당히 빼서 먹었다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때 주로 쓰는 어휘가 ‘빼돌려 먹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들 한다. 궁금해서 왕년의 도축장 사장인 친구에게 물었다.

“빼돌리긴 뭘 빼돌려. 그래야 더 극적으로 보이니까 자꾸 그런 말을 쓰는 거지. 축주(고기 주인)랑 다 양해해서 하는 관행이었다고. 지금 엄청 비싼 항정살 같은 것도 기술자들이 잘라서 먹고는 했어. 80년대 세상 사람들은 항정살이 뭔지 몰랐으니까. 뭐, 그런가 보다 할 때였지.”

돼지머리는 순댓국에 넣는다. 푹 삶아서 머리 고기 접시 안주로 내고, 국에도 넣는다. 매운 양념에 새우젓 풀어서 한 숟갈 뜨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비슷한 소리를 합창한다.

“어허!(땀 주르륵)”

일종의 돼지를 위한 레퀴엠이다. 고깃집에서는 이런 거 없다. 오직 순댓국집에서만 들을 수 있는 영혼의 탄식이다. “어허.” 레퀴엠 반주가 없을 수 없다. 꼴꼴꼴꼴(술 따르는 소리)

순댓국을 받으면 안에 든 고기와 내장의 정체를 판별하는 게 어렵다. 해부학적인 소견이 있어도 어렵다. 잘라서 넣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꾼들은 식감과 견문으로 구별한다.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요게 얼굴 쪽 껍데기여. 꼬들꼬들한 요놈은 귀고. 연골이 들었잖아. 연골이 들어간 건 또 있어. 울대라고, 혀 안쪽에 뼈가 있거든. 별미지. 쫀득한 요놈은 볼살이네. 고소한 걸 보니 이건 쎗바닥(혀)이네. 돼지는 양치질을 한 번도 안 하고 죽으니 쎗바닥 손질을 잘해서 넣더라고.”

순댓국은 보통 돼지머리 플러스 내장이다. 간과 허파, 염통, 소창 등이 더 들어간다. 정육은 비싸니까 이런 온갖 부위로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한다. 요새는 뒷고기집이라고 부르는 구이집이 은근히 뜬다. 김해(뒷고기의 원조 발상지)에서 시작해서 부산으로, 다시 수도권의 노동자 도시들에서 인기를 끌었다. 돼지머리에서 발라낸 살로 구이를 만든다. 고기가 모양은 좀 빠지지만 싸고 맛있다. 요즘은 서울로 퍼져나가는 중이다. 볼살이나 덜미살은 웬만한 정육보다 비싸다. 볼살은 씹을수록 탄력이 있고, 진한 육즙이 푹푹 배어 나온다. 소주병이 픽픽 쓰러진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조심하라. 덜미살이라고 요즘 상종가 치는 부위가 있다. 돼지머리 중에서도 에이스다. 목살에서 이어지는 부위라 잘라놓으면 모양도 비슷하다. 살과 지방이 아름답게 구획 지어진 추상화 같은. 당연히 ‘인스타빨’도 최고다. 머리에 붙은 살의 공통점은 쫄깃한 식감, 진한 풍미다. 선도가 떨어지면 금세 표가 난다. 돼지머리에도 항정살이 있는데, 그걸 두항정이라고 부른다. 턱 아래 좌우의 살이다. 인간으로 치면 멱살이다. 사각거리는 단단한 비계, 분홍색의 빗금이 좍좍 처진 살점이 침을 흘리게 한다. 소금만 찍어 한입 먹어보라. 돼지기름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게 된다. 먹다가 물리면 맵게 양념한 갈치속젓이나 멜젓(멸치젓)을 푹 찍어서. 두항정은 유명한 파스타인 카르보나라에 쓰는 ‘관치알레’라는 부위이기도 하다. 뒷고기 좀 하는 집은 돼지혀와 그 혀밑살도 낸다. 콧등살은 워낙 양이 적은 고기라 내준다면 당신은 단골이다. 졸깃졸깃하다.

돼지머리는 싸다. 개당 1만원 정도다. 여기서 혀를 포함해서 고기가 대충 1.5㎏ 정도 나온다. 엄청나게 이익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발골이다. 머리란 원래 온갖 조직과 뼈와 살이 3차원적으로 뒤섞여 있는 하나의 우주적 구성이다. 살코기 쓱쓱 잘라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라내는 작업비가 비용이다. 그래도 아직은 뒷고기 값이 싸다. 너무 많이 생겨서 족발처럼 될까봐 겁난다. 족발이 수요 폭증으로 이제는 살코기 값이 된 것처럼. 아, 쓰다 보니 뒷고기가 엄청 먹고 싶다. 조래기(파무침)에다가 먹고 싶다. 딱 한 부위를 추천하라면 나는 볼살이다. 대파 왕창 넣고 달콤하게 간장, 설탕, 미원. 마늘 양념해서 연탄불에 굽고 싶다.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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