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현대 서울 실내정원 ‘사운즈 포레스트’. 현대백화점 제공
지금 서울이 한 명의 무용수가 되어 춤을 춘다면 어떤 춤을 추고 있을까, 뜬금없는 생각을 해 본 적 있다. 전통을 담은 한국무용? 베이스음이 매력적인 재즈댄스? 또는 힙합? 아니, 애초에 한가지 장르의 춤만 추고 있는 건 불가능할 수도. 세련되게 뒤섞인 리듬에 정의할 수 없는 새로운 무보(춤의 동작을 그림 등으로 기록한 것)를 보여주는 장면을 생각하다가, 이를 다시 공간으로 옮겨와 상상해봤다. 서울은 어떤 몸짓일까.
누군가가 서울을 브랜드화한다면, 아마도 이런 곳이지 않을까 싶다. 유연하고 느슨한 공간을 새롭게 꽃피우는 지역의 상점들, 피어나고 물결치는 맛과 멋, 정의하기 어려운 동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곳. 이 밖에도 수없이 많은 콘셉트가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월 ‘서울’을 전면에 내세우고 태어난 공간, ‘더현대 서울’의 몸짓은 기존 백화점과는 다르다.
리차드 로저스의 디자인 철학이 담겨진 독특한 외관. 현대백화점 제공
올라가는 해와 서서히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곳, 폭포가 층을 가로질러 떨어지고 5층에서 1층을 내려다보며 흘러가는 사람들을 관조할 수 있는 곳, 들려오는 새소리와 흔들리는 나무에 고개를 들어 호기심을 갖게 하고, 공간의 비정형적 횡과 종의 교차에 한 번 더 궁금해지게 만드는 곳….
더현대 서울은 기존의 백화점과 다른 공간의 문법을 갖고 있다. 일단, 흔히 알고 있는 백화점에 없는 세 가지 ‘시계, 창문, 출구’가 더현대 서울에는 있다. 시간의 흐름을 완연히 느낄 수 있는 유리천장과 전 층에서 느낄 수 있는 채광은 그간 어떤 백화점과도 달랐다. 렘 콜하스가 설계한 갤러리아 광교 역시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빛을 콘셉트로 디자인한 백화점이지만 리처드 로저스의 더현대 서울은 최상층의 천창에서 비워진 공간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한껏 누릴 수 있다. 이 빛은 3300㎡(약 1000평) 규모의 실내정원으로 이어진다. 새소리와 음악소리가 잔잔히 스며들고 햇볕 아래 나무가 흔들대며 움직이는 게 영락없이 공원 같다. 보통의 몰, 백화점의 앵커 포인트(anchor point·동선의 종착 지점)가 영화관이나 쇼핑몰 중심부인 것과 다르게 이곳의 앵커 포인트는 자연스럽게 정원으로 안내한다.
천장에 개방된 창을 만들고 내부의 구조체를 없애기 위해 밖에서 건물을 잡아주는 빨간색 크레인도 눈에 띈다. 더현대 서울 안에는 시선과 동선을 가로막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내부의 개방성과 유동성을 더 확보하기 위한 설계의 핵심이라고 한다. 초반에는 하중을 지탱해주는 크레인이 외부에 위치한 탓에 외관이 ‘대체 이게 뭐냐’며 말도 많았으나, 지금은 그 자체를 독특한 익스테리어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공간 설계는 달라진 브랜드 전략에서 기인한다. 이제는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 매장을 만들지 않고 경험하기 위해 매장을 만든다. 단순한 백화점이 아니라, 플래그십스토어 개념이 더 맞겠다. 상품을 이곳에서 사지 않아도 좋다, 브랜드를 경험하고 즐기고, 자신만의 사진을 찍어가는 거로 족하다는 의미다. 일본의 츠타야 서점의 브랜딩이 떠오르기도 했다. 취향을 설계하고, 유기적인 생각의 흐름으로 브랜드와 책들을 배치한 츠타야 서가는 일종의 큰 수로의 역할을 한다. 수로를 따라 소비자는 유유히 거닐고, 원하는 곳에 머물며 자연스럽게 필요한 책들을 사게 된다. 더현대 서울은 오프라인의 백화점이 가져야 할 미래적인 공간과 브랜딩 방향을 분명히 파악하고 현명하게 준비해서 오픈했다는 걸 구석구석 느끼게 했다.
재미의 어원은 ‘양분이 많고 좋은 맛’이라는 한자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가 약속을 잡을 때 맛집부터 검색하는 걸 보면 재미는 곧 맛있는 걸 먹는 데서부터 온다는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에게 밥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맛을 찾아가는 재미를 설계한 곳, 바로 1만4200㎡(약 4300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F&B공간 테이스티 서울을 만들어낸 것 또한 더현대 서울의 주요한 캐릭터다.
동네별 맛을 가져오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어 터프하고 재미있다. 고급스러운 ‘백화점’다운 맛집뿐만 아니라, 작고 허름한 ‘찐맛집’을 가져오기도 하고, 온라인으로만 유통되는 밀키트를 가져와 입점시키기도 했다. 카페도 전통을 지켜오는 태극당과 가장 핫한 이슈를 만들어내는 카멜 커피가 나란히 들어와 있다. 규모나 히스토리를 개의치 않고 툭툭 섞어 놓은 테이스티 서울을 돌아보고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마치 정말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날 법한 느낌이다. 을지로와 청담동이 섞이고, 홍대와 가로수길이 교차된 방식, 신선하다.
서적과 음반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큐레이션 서점 ‘스틸북스’. 임지선 제공
MD 구성, 브랜드의 합도 재미있다. 맛으로만 재미를 찾는 게 아니라 크고 작은 브랜드들의 페어링이 좋다. 글로벌한 브랜드와 로컬한 브랜드의 입점과 유치가 조화로워 개성 있는 취향을 추구하는 MZ세대가 고루하지 않은 공간으로 인식하게 한다. 패션과 라이프스타일, 음악과 아웃도어 라이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큐레이션이 독특해, 한 콘셉트로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더 흥미로웠던 점은, 작고 빠른 시도가 가능하도록 유연한 구성을 짜 놓았기에 자연스러운 생태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짜인 틀, 정해진 체제에 박혀 있는 느낌이 아니라 입점한 브랜드끼리의 합을 맞추고, 또 다른 방식을 제각기 만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더현대 서울 안 브랜드들끼리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것 같다는 가능성을 남겨놓았기에, 그다음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 갖게 했다.
아 서울, 서울, 서울. 이 발칙한 도시의 표정과 몸짓을 담아내기가 사실 쉽지 않다. 당최 예측할 수 없는 스텝과 리듬으로 즉흥적 춤을 추니까. 그래서 서울, 무슨 춤을 추고 있냐고? 더현대 서울에 가보면 조금 알게 될 거다. 지금 가장 궁금한 장르를 자유롭게 접목한 현대무용, 그게 가장 가깝겠다.
임지선 브랜드디렉터
임지선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기획자로, 아라리오뮤지엄인스페이스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는 브랜드 기획자이자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늘 경계를 뒤섞고 새롭게 정의하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