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끝자락에 느림의 섬이 있다.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된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다. 느리게 살기 미학을 추구하는 이곳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삶의 쉼표를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힐링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3일, 느림의 행복을 느끼고자 그 섬으로 향했다.
서울 센트럴시티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5시간 걸려 도착한 완도에서 청산도행 배에 몸을 실었다. 배로 50분 정도 가자 청산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딸린 섬으로, 2천여 명이 살고 있다. 영화 〈서편제〉, 드라마 〈봄의 왈츠〉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치르며 한해 관광객 28만여 명이 찾고 있다. 청산도라는 이름은 산, 하늘, 바다가 모두 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것.
청산도의 나들목인 도청항에는 ‘느림의 섬 청산도’라는 글귀가 적힌 달팽이 조형물이 있다. 달팽이는 슬로시티인 청산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달팽이가 상징물인 섬답게, 청산도에는 풍경을 보며 천천히 걷기에 좋은 ‘슬로길’이 있다. 11코스 17개의 길(총 42.195㎞)로 이루어져 있다. 풍경이 좋아 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는 뜻으로 슬로길이라 부른다. 항구에서 가까운 길은 제1코스이다. 1코스는 미항길-동구정길-서편제길-화랑포길로 이어진 5.71㎞ 구간(도보 약 90분)이다.
항구에서 나와 해안을 따라 언덕길을 오르니 숨은 풍경이 펼쳐졌다. 밭에는 유채꽃과 청보리, 양귀비가 피어 있었다. 멀리 도락포구에는 전복 양식장과 하트 모양의 개막이(현지에선 개매기로 부름)가 있었다. 1년을 상징하는 365개 말목으로 돼 있는 개막이는 바닷가에 돌담을 쌓거나 말목을 박아 썰물 때 물고기를 가두어 잡거나 그물을 올려 잡는 전통 방식이다. 조선 시대 표류기 〈표해록〉에 나오는 청산도 여인의 못다 이룬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언덕에서 내려와 도락마을로 향했다. 낮은 집 담벼락에 청산도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걸려 있고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사랑’,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 등 다양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마을의 한 할머니가 말을 건넸다. “어디서 왔소?” “서울에서 왔어요.” “먼 데서 왔네. 구경 잘하고 가소.” 순박한 마음이 전해졌다.
해가 지기 전 제10코스인 노을길(2.67㎞, 도보 약 51분)로 갔다.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지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다. 지리해수욕장은 1.2㎞의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200년이 넘는 소나무가 있다. 휴가철 많은 이들이 찾는 캠핑 명소다.
석양은 과연 일품이었다. 저녁 7시가 지나자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벤치에 앉아 노을을 바라봤다. 마침 반려견과 산책을 나온 마을 주민이 해변을 걷고 있었다. 평화로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은 들리지 않고 철썩철썩 파도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고요한 멍 때리기가 한동안 이어지는 순간, 저 멀리 산책하던 개가 갑자기 다가왔다. 가까이 온 개는 물고 있던 돌을 내 옆에 두고, 나를 빤히 쳐다본 뒤 주인에게 달려갔다. 개의 장난스러운 행동이었다. 나의 고요함은 이렇게 깨졌지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여행지에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는다. 이것 역시 여행의 일부이리라.
해넘이를 보고 한산한 해변을 걸었다. 번잡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변의 고요함은 마음마저 차분해지게 했다. 물기를 머금은 해변 모래의 푹신함이 발에서부터 온몸으로 느껴줬다. 이날 2만보를 넘게 걸은 피로가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청산도의 명소인 범바위가 있는 제5코스(5.54㎞, 도보 약 125분)를 걸었다. 범바위는 청산도에 살던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했는데 이 바위에서 울리는 소리가 더 커 호랑이가 도망을 갔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강한 자기장이 발생해 나침반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아 ‘신비의 바위’라고도 불린다.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이곳에서 여서도와 거문도,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이날은 해무가 껴서 제주도까지 보이진 않았지만 바다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범바위로 가는 길은 기분 좋은 산행이었다. 숨이 거칠어지고 땀이 나지만 짙은 풀냄새를 맡고 맑은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땀 흘리며 걷는 자에게 시원한 바람은 자연의 선물이었다. 남해 바다, 작은 섬, 마을의 풍경을 보면서 산에 오르면 웅장한 범바위를 만날 수 있다. 범바위 전망대쪽에는 빨간색의 느림 우체통이 설치돼 있다. 이곳에 편지를 넣으면 1년 뒤 배송된다고 한다. ‘총알 배송’ 시대에 청산도다운 느림 배송이다.
범바위 근처에는 슬로길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 말탄바위와 범바위 사이에서 출발해 장기미까지 연결된 명품길(2.4㎞, 도보 약 45분)이다. 잘 닦인 길이 아닌 산길이다. 중간중간 돌에 새겨진 파란색의 화살표를 따라 걸으면 된다. 이 길을 걸으면 해안 절경과 새우란, 자란 등 야생화를 볼 수 있다. 그 길 중간중간 사람들이 쌓은 돌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 길을 걸은 이들은 남도의 끝자락 섬에서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잠시 멈춰 서서 푸른 바다와 파란 하늘을 보고 있자니 입에 박하사탕을 문 듯 가슴속이 확 트였다. 모든 끝은 시작이라 했던가.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더는 갈 수 없는 길에 서서 다시 갈 길을 생각했다.
김광섭 청산도 문화관광해설사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이 제1코스와 제11코스이지만 청산도에는 그곳 말고도 멋진 길이 많다”라며 “해안 절경을 볼 수 있는 명품길, 목섬과 새목아지의 풍경이 아름답고 5월과 6월에는 밤하늘의 은하수가 눈이 부실 정도”라고 말했다.
그뿐인가.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청산도의 매력이다. 옛날 돌담을 그대로 보존한 마을, 초가집과 흙 돌집, 구들장 논 등 옛 방식대로 삶을 일궈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박 2일의 여정을 마치고 도청항에서 완도행 배를 탔다. 청산도에서 걸었던 슬로길의 풍경이 떠올랐다. 천천히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자연과 사람.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안겨준 청산도. 속도를 늦추고 때론 더하기보다 빼기의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 섬은 말하는 듯했다. 느림의 섬이 점점 멀어졌지만, 그 섬이 품은 여유로움이 밀려왔다.
청산도(전남)/글·사진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SC] 청산도 여행 정보
교통 서울 센트럴시티(호남선) 터미널에서 완도행 직행버스가 하루에 2회(오전 8시10분, 오후 5시20분) 운행한다. 소요 시간은 5시간. 완도에 도착한 뒤 완도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청산도행 배를 타야 한다. 청산도행 배는 하루 6회(오전 7시, 오전 8시30분, 오전 11시, 오후 1시, 오후 2시30분, 오후6시) 출항한다. 완도에서 청산도까지 배로 50분~1시간 걸린다. 뱃값 편도 성인 7700원, 어린이 3700원. 차량을 실으면 왕복 6만5700원이다.(여객선 운항 정보 문의 1666-0950, http://wando.ferry.or.kr)
식당과 숙소 청산도의 나들목인 도청항 근처에 숙박 시설과 식당이 몰려 있다. 이곳에 해초비빔밥(1만원)과 전복톳된장뚝배기(1만3천원)가 대표 메뉴인 청운수산식당(061-555-3598), 해녀가 운영하는 해녀식당(061-552-8547) 등이 있다. 서편제길로 유명한 슬로길 1코스에는 당리부녀회에서 운영하는 서편제 주막에서 막걸리와 꽃파래해물전(1만원)을 판다. 당리 마을에는 한옥 민박이 여럿 있다. 2박 이상 청산도에 머무른다면 도청항 근처에 숙소를 잡으면 편하다. 이곳에 마트, 농협, 편의점, 카페 등이 몰려 있다.
허윤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