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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떠날 수 없는 지금이야말로, 미리 국경을 넘어볼 때!

등록 2021-06-03 05:00수정 2021-06-03 09:18

코로나19로 막힌 여행길, 영화·드라마·책으로 풀자
글·영상으로 미리 만나며 여행 계획 세우면 어떨까
일러스트 백승영
일러스트 백승영

여행이 사라졌다.

당신은 아마 2019년 말 즈음 일본이나 잠깐 갔다 오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조금 더 돈을 모아서 2020년 가을께 풀빌라 휴양지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역으로 제안했을 것이다. 친구도 동의했을 테고. 그러나 지금은 2021년 봄이다. 맞다. 친구는 당신을 원망하고 있다. 당신도 당신을 원망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인류의 가장 소중한 취미 중 하나인 여행을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항공기 온실가스 배출을 걱정하는 이들에게는 다행한 소식이지만, 꾸역꾸역 모은 월급으로 국경이라도 한 번 넘는 것이 유일한 낙이던 사람에게는 가히 비극적인 역사의 한 챕터다.

그런데도 돈을 썼다. 당신은 여행을 갈 수 없다면 가방이라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예상 여행비를 모조리 투자해 해외 직구로 샤넬 가방을 샀을 것이다. 축하한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당신은 평균적인 한국인이다. 2021년 1분기 한국인의 해외 직구 금액(1조 4천억원)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코로나로 해외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보상소비가 불타올랐다. 보상소비는 종종 보복소비라고도 부른다. 둘 다 맞다. (여행을 가지 못한 충격에 대한) 보상도 받고 싶고 (여행을 사라지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보복도 하고 싶다. 하지만 직구로 가방을 사는 것과 파리의 샤넬 매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샤넬 가방은 파리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여행은 백신과 함께 다시 돌아올 기미를 슬그머니 보이고 있다. 여행업계가 무급휴직 중이던 직원들을 복귀시키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 무구하게 기뻐하기 이르다. 백신 접종은 이제 시작됐다. 여행 제한이 언제쯤 풀릴지는 알 수가 없다.

진짜 여행의 쾌락을 아는 당신에게 영화와 책으로 대신 여행을 하자는 제의는 좀 구태의연하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밤 10시면 회식이 끝나는 시대, 4명 이상이 모일 수 없는 시대의 당신에게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다. 꿈꾸던 여행지에 대한 글을 읽고 영상을 보는 것은 의외로 재미있는 보상소비다.

넷플릭스가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를 공개했을 때를 기억해보자. 이 드라마는 미국인이 파리의 광고 회사로 전근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좀 게으른 드라마다. ‘촌스럽지만 긍정적인 미국인’과 ‘세련되지만 부정적인 파리지앵들'이라는 억지스러운 구도가 끝없이 반복된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허술한 이야기는 어차피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서 보고 싶었던 건 미국인 여성의 성공담이 아니라 갈 수 없는 도시가 되어버린 파리였다. ‘파리에 가고 싶다’, ‘개똥 옆에 있는 축축한 파리의 벤치에 앉아서 맛없는 바게트를 우적우적 씹고 싶다’는 여행에 대한 간절한 욕망으로 넷플릭스는 큰돈을 벌었다.

이제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하자. 감옥에서 만두를 먹으며 탈옥 이후를 이미지 트레이닝하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우리도 여행길이 열리길 꿈꾸며 미리 여행을 그려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요즘 도쿄를 무대로 한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반복해서 보는 중이다. 주인공인 스칼렛 요한슨이 도쿄 파크 하얏트 호텔의 침대 위에 눕는 장면들을 보며 하얀 침구 세트가 안겨주던 극적인 편안함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다. 호텔 침대에 처음 눕는 느낌이 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게 어떤 열망인지 이해할 것이다. 김도훈(전 〈허프포스트〉편집장·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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