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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맛·모양은 조금씩 달라도…새콤하고 시원한 ‘중국냉면’

등록 2021-06-10 07:59수정 2021-06-10 10:04

중국냉면 맛집 유랑기

육수 시트러스향 매력적 ‘외래향’
화려하기보단 기본 충실한 ‘진보’
육수에 매실향 솔솔 ‘챠우 매화’
특급호텔의 호사스러운 맛 ‘도림’
오이가 듬뿍 올라간 외래향 중국냉면. 백문영 제공
오이가 듬뿍 올라간 외래향 중국냉면. 백문영 제공

먹고 마시는 ‘일’은 생각보다 ‘극한 직업’에 가깝다. 같은 음식을 발품 팔아가며 여러 번 먹어야 하는 일은, 입이 짧고 위장의 한도가 카드 한도보다도 턱없이 적은 나 같은 이에겐 고역인 경우가 다반사다. 게다가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한 중국냉면이라니. 그래, 이 기회에 평양냉면 일색이었던 나의 냉면 입맛을 바꿔보자는 마음가짐으로 꿋꿋하게 길을 나섰다.

사람마다 각자의 표정이 있듯 중국냉면 역시 하늘 아래 같은 모양은 없다. 동네 자그마한 중국집의 분식집 냉면 스타일도, 낡은 화상의 비빔냉면과 물냉면도, 꽃처럼 화려한 호텔 중식당의 냉면도 다 각자의 위치와 의미가 있었다.

‘중국냉면 먹으러 갈 사람’이라는 말을 단톡방에 올리자마자 손을 든 친구는 두 명. 먹는 것과 마시는 것 모두 선수급으로 해내는 먹보 친구와 한 호텔 고급 중식당의 수셰프로(부주방장) 일하는 친구였다.

모두의 이동 동선을 고려하면서 자주 가보지 않은 동네의 맛있는 중국 식당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인근 ‘외래향’이었다. 서울대 입구, 봉천동 권역에서는 꽤 이름난 중국집이다. 예약조차 쉽지 않았다. 일주일 뒤로 잡은 예약 날짜인데도 ‘룸의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듣자 묘한 기대감이 샘솟았다. 이윽고 약속일, ‘냉면은 그저 만나서 놀기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고 외치던 친구는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하고 이미 식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집 특유의 기름지고 시큼한 냄새, 분명 낮에도 얼큰하게 한잔하고 왔는데 이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또 강력하게 알코올이 당겼다.

고량주가 당기네

“밖에서 중국냉면을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셰프 친구의 기대 섞인 말, ‘일단 술부터 시키자’는 술꾼 친구의 명령을 뒤로한 채 기다리던 와중 나온 냉면의 자태는 꽤 화려했다. 먼저 보이는 것은 수북하게 쌓인 무순, 그리고 그 밑으로 채를 썬 당근과 양배추, 오이 같은 채소가 한가득이었다. 탱글탱글하게 잘 삶은 새우와 얇게 썬 건해삼, 풍성한 해파리, 오징어 채로 구성된 해산물 파트와 송화단, 오향장육, 달걀 지단 같은 고명까지 ‘중국냉면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모습이었다.

살얼음 낀 육수를 휘휘 저어 국물을 마셨다. 달큼한 닭고기 육수에 레몬, 감귤류의 새콤한 시트러스 향이 섞여 향긋하고 깔끔한 맛이 도드라졌다. ‘호텔 중식당 급으로 고명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는 셰프 친구의 말마따나 귀한 손님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잘 삶은 장육 한 점은 소주보다 고량주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고량주 큰 것 하나 주문하고 살얼음 육수를 다시 떠먹었더니 해장이 되는 건지, 술이 당기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쫀득하고 담백한 면도 상큼한 국물과 잘 어울렸다. ‘자가제면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충분히 잘 뽑은 면’이라는 친구의 설명이 믿음직했다. 개운하고 시원하게 절반쯤 먹은 뒤 땅콩소스와 겨자를 넣었다. 구수하고 달큼한 땅콩소스의 향이 새콤한 육수의 맛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오히려 시고 단 맛이 극대화된, 감칠맛이 폭발했다. 이제는 취재고 뭐고 그저 먹고 마시는 수밖에. 그저 냉면 국물과 고량주와 반갑게 만난 친구들이 하나 된 채 가물거리는 기억만 남았다.

외래향(서울특별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801 벽송빌딩 2층, 02-888-1224), 중국냉면 1만2000원

진보의 비취냉면. 백문영 제공
진보의 비취냉면. 백문영 제공

심심한 고명과의 조화 좋아

‘중국냉면 투어’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전날 꽤 마셨는데도 숙취가 없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보니 ‘역시 냉면인 건가’ 생각이 들었다. 든든한 닭 육수에 고기, 해산물, 탄수화물까지 균형 있게 섭취했으니 숙취가 생길 틈도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냉면 친구는 우리 술을 빚는 양조자. 역시나 술 만드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친구인 만큼 중국냉면과의 페어링에 관심을 보였다. 여러 군데를 한꺼번에 돌아보고 싶은 욕심, 중국집으로 가장 유명한 동네가 어딘가 생각하다 찾은 곳이 연희동이었다.

연희동 사러가마트 인근 대로변에는 굵직굵직한 중식당이 많다. 비취냉면으로 유명하다는 ‘이화원’으로 갈까, 정통 중식을 선보인다는 노포 ‘걸리부’를 갈까 고민하다가 이화원 옆, ‘진보’를 발견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낡은 간판이 분명 맛집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식으로 보였다. 이곳의 여름 시그니처 메뉴 ‘비취냉면’을 주문했다. 큼지막한 새우, 오향장육, 당근과 양배추 채, 삶은 달걀에 해파리까지 들어간 모양새였다. 보기에 화려하거나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기본에 충실한 구성이었다. 역시 살얼음 낀 국물을 한 입 먹었다. 산뜻하고 시원한 맛은 기본, 사과나 배 같은 과일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단맛도 났다. 면의 색깔 때문에 ‘비취냉면’이라고 이름을 지었겠지? 일행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골랐다. 청주보다는 증류주가 어울릴 것 같은 자극적인 육수라는 판단으로 ‘그럼 그냥 소주를 마시자’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렀다. 소주 한 잔 빠르게 들이켜고 오독한 해파리를 먹었다. 고깃집 냉면을 먹는 듯 꽤 자극적인 육수의 맛에 비해 간이 되어있지 않는 심심한 고명이 오히려 조화를 이뤘다.

△진보(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맛로 9 혜원빌딩, 02-395-8094), 비취냉면 1만1000원

챠우 매화의 매화냉면. 백문영 제공
챠우 매화의 매화냉면. 백문영 제공

기름진 음식 뒤 후식으로 ‘딱’

먹을 대로 먹었겠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연희동 거리를 걸었다. 아직 해는 중천이고 술은 마시고 싶고 배는 불렀는데 또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연희동 굴다리도 지나고, 요즘 젊은이들의 성지 연남동도 걷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이젠 더 먹을 수 있겠지’ 일행과 다짐하며 연남동 ‘챠우 매화’로 입장했다. 챠우 매화는 상호처럼 모든 요리에 직접 발효한 매실 추출액을 사용하는 화상(화교 상인)으로 유명하다. ‘매화냉면’을 주문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직접 담근 매실액들이 가득 차 있는 항아리가 눈에 띄었다. 이른 저녁 시간이었는데도 데이트하는 연인, 혼자 온 손님, 얼큰하게 취해 있는 취객 무리까지 다양한 연령대, 다채로운 군상들이 모여 있었다.

‘역시 중국 음식은 호불호 없는 한국인의 솔푸드’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냉면이 등장했다. 다소 두껍게 썬 당근과 오이 고명, 새우와 해파리 정도만 올린, 지금까지의 본 그 어떤 중국냉면보다 수수한 차림새였다. 시선을 끄는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매실 씨를 씹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직원의 말을 듣고 보니 큼지막한 매실 장아찌가 가장 위에 올라와 있었다. 매실 추출액을 전면에 내세우는 식당인 만큼 매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면모가 돋보였다. 깔끔한 닭 육수에 매실 특유의 향긋한 풍미가 지배적이었다. 개운하고 시원해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고 후식으로 먹기에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잘 절인 매실을 나눠 먹고는 공부가주를 주문했다. 지금까지 먹어봤던 냉면 중 가장 향긋한 만큼, 향이 강한 술과 함께 먹어도 분명 잘 어울릴 것이라는 친구의 판단을 믿었다. 이 집의 면 색 역시 옥색인데 뭔가 면발이 달랐다. 통통하고 쫄깃한 중화면도 아니고, 소면이나 중면 같지도 않았다. 얇은데 넓적하고 툭툭 끊어지는 면발이 꼭 국시나 쌀국수를 연상시켰다. 얇고 가는 면이라서 면에 육수가 잘 배어 있었다. ‘땅콩소스를 달라’는 요청에 ‘매화 냉면은 땅콩소스 없이 겨자와 식초만 넣어 깔끔하게 먹는다’는 설명이 되돌아왔다. 매실 특유의 향을 살리기 위해서겠지? 공부가주 한병을 빠르게 해치우고 집으로 향했다.

챠우 매화(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 192, 02-332-0078), 매화냉면 1만1000원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의 팔진냉면. 임경빈(어나더원비주얼 실장)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의 팔진냉면. 임경빈(어나더원비주얼 실장)

저절로 ‘으어’ 소리 나는 맛

누군가를 내내 만났던 주중 일정이 버거웠는지 느지막이 일어난 주말 오후, 오늘은 혼자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나누는 즐거움은 분명 크지만, 나 혼자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과 행복감도 있으니까. ‘오늘은 어디로 가지’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낡은 노포도, 화상도 좋지만 왜 가장 기본이자 표준이 되는 곳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호텔 중식당이야말로 중식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자 식재료부터 음식의 맛과 질, 분위기까지 보장된 곳이 아니던가? 빠듯한 주머니 사정이 신경 쓰였지만 ‘냉면 한 그릇 정도의 호사는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으로 소공동 롯데호텔서울 ‘도림’으로 향했다.

37층,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도림을 말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방문하게 될 줄이야. 여름철 시그니처 메뉴이자 가장 인기가 많은 메뉴로 알려진 ‘팔진 냉면’을 주문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호사인지, 친절한 응대는 기본이었고, 나오는 찬까지도 그저 좋기만 했다.

이윽고 나온 팔진 냉면의 모양새는 말 그대로 화려했다. 전복, 해삼, 새우 같은 해산물은 기본이고 오향장육, 오골계 알과 달걀 지단, 해삼 채와 절인 오이까지 고명 하나하나가 술안주이자 일품요리처럼 느껴졌다. 간장을 넣어 다소 짙은 색을 띠는 국물에서는 닭고기 육수 특유의 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살얼음 낀 차가운 육수를 먹는데도 해장국을 먹는 듯 ‘으어’ 소리가 계속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고깃국물을 먹는다는 느낌을 가장 직관적으로 받았다. 참을 수 없어 그 비싼 ‘호텔 생맥주’ 한 잔을 주문하고 오향장육에 전복을 싸서 먹었다. ‘이러려고 돈 버는 거지’ 생각에 마음이 뿌듯해졌다.

롯데호텔서울 도림(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30, 02-317-7101), 팔진냉면 4만원

백문영 객원기자 moonyoungba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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