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 대표팀 강백호(왼쪽)가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 B조 호주와 경기 7회말 1사 상황에서 2루타를 날린 뒤 세리머니를 하던 중 호주 2루수 로비 글렌디닝에 의해 태그아웃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을 지켜본 한국팬들이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한국 야구 대표팀 강백호가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B조 본선 1라운드 호주와 경기 7회말 1사 상황에서, 2루타를 날린 뒤 세리머니를 하다가 태그아웃당하는 장면이다. 팀이 4-5로 역전당했을 때였고, 다음 타석에서 곧바로 양의지가 안타를 쳤던 터라 아쉬움은 더 크게 남았다. 강백호가 “야구는 흐름이 있고 분위기가 처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평소에도 세리머니를 강조했기에 꺾인 분위기를 바꾸려던 마음을 이해할 순 있다. 하지만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황당한 실수였다.
푸에르토리코 마무리 투수 에드윈 디아즈가 16일(한국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 D조 도미니카공화국과 경기에서 세이브를 거둔 뒤 세리머니를 펼치다 다쳐 동료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마이애미/유에스에이투데이스포츠 연합뉴스
승리를 거두고도 세리머니 때문에 웃지 못한 경우도 있다. 푸에르토리코는 16일(한국시각)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론디포파크에서 열린 대회 본선 1라운드 D조 도미니카공화국과 경기에서 5-2로 이기며 8강에 진출했다. 우승후보 ‘0순위’로 꼽혔던 도미니카공화국을 꺾은 기쁨에 마무리 투수 에드윈 디아즈는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하다가 오른 다리를 다쳐 휠체어를 타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2013년, 2017년 대회 때 준우승을 했던 푸에르토리코는 최강 불펜으로 꼽히는 디아즈 없이 남은 일정을 치러야 한다. 검진 결과 디아즈는 시즌 아웃 판정을 받았다. 푸에르토리코는 8강에서 멕시코와 맞붙는다.
일본 야구 대표팀 라스 눗바가 10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 B조 호주전에서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모습. 도쿄/AP 연합뉴스
일본 야구 대표팀 오타니 쇼헤이가 11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 B조 체코와 경기에서 4회 안타를 친 뒤 더그아웃을 향해 후추 갈개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도쿄/교도 연합뉴스
우울한 세리머니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조별리그, 8강전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준 일본은 미국에서 건너온 ‘후추 갈개’(Pepper grinder) 세리머니 열풍에 빠졌다. 이 세리머니는 이번 대회 일본 야구 대표팀으로 출전한 라스 눗바가 전파했다. 그는 안타를 치거나 득점을 낸 뒤 후추를 가는 듯한 흉내를 내는데, 이는 눗바가 소속팀 미국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자주 하던 세리머니다.
미국 풋볼 용어로 ‘짧은 야드 수를 획득한다’(공격할 때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는 뜻)는 뜻의 ‘Grind out’이 있는데 ‘갈개’(grinder)와 비슷한 어감을 준다. 눗바는 고교 시절 풋볼 쿼터백으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던 선수다. 일본 야구 역사상 첫 외국인(미국) 국가대표인 그는 이번 대회 맹활약을 펼쳤고, 이제 후추 갈개 세리머니는 오타니 쇼헤이는 물론 일본 팬들까지 밈(meme)처럼 따라 하는 ‘환대’의 징표가 됐다. 심지어 후추 갈개를 직접 야구장에 가져오는 팬들도 있었다. 일본 내에서는 현재 후추 갈개가 품절되는 사태까지 빚어지고 있다고 한다.
멕시코 라이언 텔레즈(가운데)가 16일(한국시각)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체이스필드에서 열린 본선 1라운드 C조 캐나다와 경기에서 8회 솔로 홈런을 친 뒤 솜브레로를 쓰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피닉스/AP 연합뉴스
멕시코 란디 아로사레나가 15일(한국시각)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체이스필드에서 열린 본선 1라운드 C조 영국과 경기 도중 루차 리베르 가면을 쓰고 더그아웃을 걷고 있다. 피닉스/AP 연합뉴스
세리머니를 통해 자국 전통문화를 알리기도 한다. 멕시코 야구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홈런을 치거나 타점을 냈을 때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를 쓰고 세리머니를 하곤 한다. 솜브레로는 스페인에서 ‘챙이 있는 모자’를 가리키는 말로, 스페인이 중남미를 지배하던 시절에 이곳 지역에 등장한 모자로 알려졌다. 멕시코 선수들은 세리머니 외에도 이번 대회에서 자국 문화를 홍보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데, 란디 아로사레나는 멕시코 특유 프로레슬링인 루차 리베르에서 사용하는 가면을 쓰고 경기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야구 대표팀 선수들이 12일 대만 타이중 국제야구장에서 열린 2023 세계야구클래식(WBC) 본선 1라운드 A조 이탈리아와 경기에서 3회 득점을 낸 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따라 하는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뒤쪽으로 세리머니를 보며 웃는 관중들의 모습이 보인다. 타이중/AP 연합뉴스
한편 야구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어색한 세리머니를 펼친 경우도 있다. 피파랭킹 6위 축구 강국이기 때문일까? 네덜란드는 이번 대회에서 인기 축구 스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알나스르) 특유의 세리머니를 단체로 따라 하곤 했다. A조에 속했던 네덜란드는 쿠바(4-2)와 파나마(3-1)를 꺾으며 2승을 챙길 때까지는 호날두 세리머니를 하며 의기양양 했으나 대만(5-9)과 이탈리아(1-7)에 잇달아 패했고, 5개 팀 모두 2승2패를 거둔 혼돈 속에서 결국 조 2위 안에 들지 못해 짐을 싸야 했다.
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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