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대수는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지난해부터 대전 집 근처의 헬스클럽에서 철인의 몸을 만들어왔다. 15일 인터뷰도 말랑말랑한 커피숍이 아니라 쇳기운이 넘치는 헬스클럽에서 이뤄졌다.
별별스타 ‘황금장갑’ 이대수 11년의 눈물
바닷가 부모님의 고생 본뒤
헬스장 찾아가 무섭게 단련
그저그런 유격수서 탈바꿈
“쓰라린 과거가 날 있게 해
질긴 생명력으로 야구할 것”
바닷가 부모님의 고생 본뒤
헬스장 찾아가 무섭게 단련
그저그런 유격수서 탈바꿈
“쓰라린 과거가 날 있게 해
질긴 생명력으로 야구할 것”
군산상고를 나왔을 때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다. 받아주는 대학도 없었다. 고교 감독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연습생 신분으로 2001년 에스케이(SK)에 입단했지만 4년간 ‘눈물의 빵’을 먹어야 하는 고난의 2군 생활이었다. 피나는 노력 끝에 2004년 마침내 꿈의 1군에 진입했다. 하지만 ‘야신’ 김성근 감독도, 베이징올림픽 우승을 이끈 김경문 감독도 외면했다. 에스케이(2001~2006), 두산(2007~2009)에서 밀려 결국 2009년 세번째 옮겨간 팀은 그해 최하위 한화였다. 꼴찌팀에서의 첫해 성적은 타율 0.232, 선수와 팀 모두 암울했다.
“2010년 시즌을 마치고 부모님이 김 양식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서해 신시도에 갔습니다. 100가구도 살지 않는 작은 섬이죠. 하루는 부모님의 일을 거들었는데, 그 일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픈 몸을 끌어안고 각오를 다졌지요. 그냥 열심히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성공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효도해야 한다.”
대전으로 돌아온 한화의 ‘평범한’ 유격수 이대수(30)는 집 근처에 있는 케이앤케이(K&K) 헬스클럽을 찾았다. “관장님! 저를 죽여도 좋으니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김영한 헬스클럽 관장은 “나는 도와준 게 없다. 본인이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 체력이 좋아질 수가 없다. 식사와 운동을 그렇게 치밀하게 맞춰가며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돌아봤다.
이대수는 2011 시즌 생애 첫 3할 타율(0.301)에 110안타, 50타점으로 빛났다. 2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은 5위에 2경기 차 뒤진 공동 6위로 뛰어올랐다. 이런 땀의 보답으로 지난 11일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의 주인공으로 뽑히자 복받쳐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시상대였지요. 호명되는 순간부터 단상에 올라갈 때까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그런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올라온 시상대인데 그냥 내려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 순간 부모님이 떠올라 울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대수는 시상대에서 꽤 길게 소감을 말하는 바람에 올해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골든글러브 마지막 수상자 윤석민의 시상 장면이 생중계 도중 잘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에스케이, 두산에서도 언제든 경쟁을 통해 주전을 꿰찰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독님 생각은 다르더군요. 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 뒤가 늘 내 자리였지요. 그런 쓰라린 과거와 외로움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 같습니다.”
이대수는 자신을 “잡초”라고 불렀다. “잡초는 화려하진 않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늘 뿌리깊은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야구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1주일 사이 20차례에 가까운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 세례를 받았다.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인터뷰 장소는 그가 땀을 흘린 헬스클럽으로 정했다.
“1년 반짝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지 않습니다. 2년 연속 3할대 타율을 올리고, 전문가들이 예견하듯 내년 4강을 넘어 우승까지 갈 한화 팀의 주전으로 활약할 겁니다.” 이대수는 빈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다시 헬스장으로 들어갔다.
대전/글·사진 권오상 기자 kos@hani.co.kr
연재별별스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