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흐타르 도네츠크와 메탈리스트 1925 하르키우의 선수들이 지난 23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키이우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2022∼2023 우크라이나 프리미어리그(UPL) 개막전 시작에 앞서 전쟁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키이우/EPA 연합뉴스
유럽 축구를 즐겨 봐온 팬들에게 샤흐타르 도네츠크는 익숙한 이름이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단골인 우크라이나의 명문 구단으로 레알 마드리드나 맨체스터 시티 같은 거인을 잡아낸 전력이 있고, 헨리크 미키타리안(아르메니아), 페르난지뉴, 윌리안, 더글러스 코스타(이상 브라질) 등 스타 선수를 발굴해 알짜배기 실력자로 길러냈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가장 다난한 2010년대, 그리고 2020년대를 보낸 구단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광산 도시 도네츠크에 연고를 둔 샤흐타르는 8년 넘게 ‘사실상’ 망명 상태에 있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과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 병합 사태가 돈바스 전쟁으로 비화하면서 친러 분리주의 반군 주도로 세워진 도네츠크인민공화국에 도시가 통째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샤흐타르는 도네츠크를 떠나 6년간 르비우, 하르키우의 경기장을 전전하다 2020년 키이우에 정착했다. 안방 구장이었던 돈바스 아레나는
2014년 8월 폭탄 공격을 당한 뒤 아직까지 기능 상실이다.
2014년 7월 친러 무장단체가 우크라이나 도네츠크의 돈바스 아레나 앞 제2차 세계대전 박물관에서 구형 러시아 탱크를 빼내고 있다. 도네츠크/EPA 연합뉴스
구장을 잃고 선수들이 떠나가면서도 계속됐던 샤흐타르의 축구는 지난 2월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프로축구리그 중단과 함께 결국 멈춰 섰다. 4월 잔여 경기를 치르지 않고 그대로 리그를 마친다는 최종 결정이 나왔고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첫 미완 시즌은 우승팀 없이 밀봉됐다. 당시 1위였던 샤흐타르(15승2무1패)는 다음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얻었지만 ‘안전한 일터’를 향해 떠난 외국인 주축 선수 상당수를 잃었다.
전쟁 발발 반년 만에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축구협회는
축구를 재개하기로 했다. 전선을 지키는 군인들과 참화 속에서 신음해온 국민에게 사기 진작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안드리 파벨코 우크라이나축구협회 회장은 <로이터> 통신을 통해 “최전선의 많은 이들로부터 축구를 다시 시작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며 “전쟁과 군사적 공격, 포격의 한복판에서 치러지는 초유의 시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기를 두르고 선 샤흐타르 선수들. 키이우/EPA 연합뉴스
2022∼2023 우크라이나 프리미어리그(UPL) 개막전은 샤흐타르와 메탈리스트 1925 하르키우의 대결로 키이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지난 23일(현지시각) 치러졌다.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24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6만5000여석 규모의 경기장은 텅 비워졌고, 경기장 인근에는 방공 대피소가 마련됐다. 선수들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두르고 입장했으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상으로
개막 선언을 대신했다. 첫 킥오프는 절뚝이며 피치 위에 들어선
아조프 연대 출신 상이 군인이 맡았다.
이날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 이고르 요비체비치 샤흐타르 감독은 경기 전 “이것은 우크라이나에서의
삶이 멈춤 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축구는 나라 전체와 우리를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에게 울림을 준다”고 했다. 축구를 계속하는 일은 곧 삶을 지키는 투쟁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희망의 상징이 된다는 설명이다. 실제 지난 6월 우크라이나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스코틀랜드를 꺾으며
자국민들을 위안했다.
개막전에서 상영된 젤렌스키 대통령의 연설 영상. 유튜브 화면 갈무리
개막전 시축 중인 우크라이나 아조프 연대 출신 상이군인. 유튜브 화면 갈무리
다만 축구를 계속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24일 루크 르비우와 메탈리스트 하르키우의 경기는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서 네차례나 중단되는 바람에 4시간30분 동안 치러졌다. 러시아군의 포격이 집중됐던 마리우폴의 FC마리우폴과 경기장이 로켓포에 파괴된 드세나 체르니히우 등 두 클럽은 이번 시즌
리그에 복귀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외교 대사로 활동 중인 우크라이나의 축구 영웅 안드리 셰브첸코는 미국 <시엔엔>(CNN)과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평범한 삶, 평범한 나라를 원하기 때문에
계속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