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선 프로 입단테스트도 번번이 퇴짜 허정무 이어 히딩크사단서 중용 ‘성공시대’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 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아직 여드름 티가 채 가시지 않은 박지성(24). 22일 그가 마침내 축구선수로서는 최고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행에 성공한 것은, 그의 ‘남 모를’ 눈물과 ‘누구나 다 아는’ 성실성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출간된 각계 32명의 칭찬이야기 묶음인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에서 박지성은 “(고교 때까지) 키가 크거나, 공격이건 수비건 특별한 장기라고는 없었다. 게다가 외모도 평범했으니 (대학이나 프로팀에서) 날 탐내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며 “내 인생은 늘 그랬기 때문에 깡다구 하나로 버텼다”고 썼다. 박지성은 “집안 형편이 넉넉치 않아 프로로 직행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언가 남다른 게 없는 그였기에 프로 입단 테스트에서 번번히 탈락했다. 마지막으로 그를 받아준 사람은 명지대 김희태 감독. 그리고 ‘흙속의 진주’를 발굴한 것은 1999년 당시 허정무 국가대표 및 올림픽대표팀 사령탑이었다. 허 감독은 “1999년 초 울산 현대와 명지대의 연습경기가 있다기에 수비 선수를 점검하러 갔다가 1학년 박지성을 보고 발탁했다”고 말한다. 당시 일부에서는 “왜 특징없는 박지성을 뽑았느냐? 명지대 김희태 감독하고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비난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허 감독은 “몸은 약했지만 드리블 기술이 있었고, 무엇보다 영리한 플레이를 했다”며 “나는 분명히 좋은 선수라고 확신했다”고 강조한다. 박지성은 준비된 재목이었다. “내 축구 디엔에이(DNA)는 선천적인 게 아니라 후천적이다. 한가지를 배우면 수십번 되새기는 천성으로 기본기를 정복했다.” 그는 2001년 4월5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2000 아시안컵 예선에 태극마크를 단 뒤 명성을 쌓아 나간다. 지칠줄 모르는 체력과 스피드가 생명인 현대축구에서 ‘중원의 일개미’ ‘심장이 두개 달린 사나이’ ‘강철인간’ 등의 별명을 가진 박지성. 그가 ‘성공 2막’을 여는 데는, 거스 히딩크 2002 한-일월드컵 한국축구대표팀 사령탑이 결정적인 힘이 됐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직전 각종 연습경기에서 고종수나 윤정환 등 내로라하는 플레이메이커 대신 패기 넘치는 박지성을 중용했고, 박지성은 이에 보답하듯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명지대 2년 때인 2000년 6월, 일본 프로축구 2부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진출해 그해 팀을 1위로 이끌며 1부리그로 승격시켜 자신감을 얻었다. 박지성은 2002년 6월 월드컵 조별리그 예선 마지막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절묘한 가슴트래핑 뒤 상대 세르지우 콘세이상을 제치는 결승골로 세계 축구계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가 축구의 본고장 유럽에서 ‘대접받는’ 선수가 된 것은 올 5월에 끝난 2004~2005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4강전. 이탈리아의 명문 AC밀란과 1차전 때 0-2로 졌던 페에스베(PSV) 에인트호벤은 2차전 안방경기에서 대반격을 편다. 이 때 선제골을 터뜨린 게 박지성이었다. 앨릭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박지성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 플레이는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고, 그의 영입을 적극 추진한 배경이 됐다. 물론 2003년초부터 에인트호벤에서 뛰었던 박지성이 겪었던 객지생활의 고통도 말할 수 없이 컸다. 한 때는 팀 동료와 관중들의 ‘박지성 비난’으로 심각한 침체에 빠지기도 했다. ‘세계화된 미드필더’ 박지성은 한국축구의 명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대표팀의 간판으로 그를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다.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이제 200만파운드(37억원) 안팎의 고액 연봉을 받는 축구재벌이 됐다. 남은 것은 평발임에도 90분을 줄기차게 뛰어다니듯 그의 식지 않는 “도전정신”과 “열정”의 지속이다.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초호화 허리-공격진‥ 주전 꿰차기 만만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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