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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축구·해외리그

슈틸리케 감독, 운일까요 실력일까요

등록 2015-01-30 19:54수정 2015-02-01 11:37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안녕하세요? <한겨레> 스포츠부에서 축구를 담당하는 허승입니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참담한 실패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등 한국 축구가 총체적 난국에 빠진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 축구 대표팀은 어느새 55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채널 <이에스피엔>(ESPN)은 “한국 축구가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보도했고 한국 축구를 얕잡아보던 일본에서도 현직 프로팀 감독이 “한국의 실력이 일본보다 머리 하나 정도 앞선다”고 말할 정도가 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반년 만에 한국 축구가 갑자기 발전할 리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눈에 띄는 차이, 사령탑에서 변화의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언론들은 앞다퉈 ‘늪 축구’, ‘실학 축구’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성과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 시절 독일 대표팀과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지만 지도자로서는 뛰어난 편이 아니었습니다. 2000년 5월부터 2006년 1월까지 독일 청소년 대표팀을 이끌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맡았던 팀에서 한두 해 만에 떠나길 반복했습니다. 한국 대표팀을 맡기 전까지 25년 감독 생활 동안 12팀을 거쳤습니다. 이랬던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맡고 갑자기 탁월한 전략가가 됐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시안컵에서 ‘슈틸리케호’를 설명할 때 ‘운’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회 초반 비교적 약체로 평가된 오만과 쿠웨이트에 1-0으로 힘겹게 이길 때만 해도 실망의 목소리가 컸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운이 좋아서 이겼다’는 평가가 뒤따랐습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운도 계속 반복되다 보면 운이라고만 할 수는 없게 됩니다. 한국 대표팀은 강호 오스트레일리아(호주)를 1-0으로, 8강에서 까다로운 상대인 우즈베키스탄을 2-0으로, 4강에서 이라크를 2-0으로 꺾으면서 5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왔습니다. 경기력은 대회를 치를수록 점점 향상되고 있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회 초반 손흥민 같은 핵심 선수들이 감기 몸살에 걸려 빠지고, 이청용, 구자철 같은 중심 선수들이 대회 도중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등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더 쉽게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운 좋게 이기게 되는 상황이 된 겁니다. 핵심 선수들이 이탈했음에도 슈틸리케 감독은 엔트리 23명 중 22명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폭넓은 선수 기용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그 바탕에는 합리적인 선수 선발이 있었습니다. 다섯번의 평가전과 제주 전지훈련까지 선수들을 꼼꼼히 점검하고 자신의 전술에 부합하는 선수들을 알뜰하게 모았습니다. 무명에 가까웠던 공격수 이정협과 골키퍼 김진현이 대표적입니다. 이때 슈틸리케 감독은 선입견이나 이름값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브라질월드컵 부진으로 팬들의 원성이 자자한 박주영에게조차 평가전 출전 기회를 줬습니다. 선입견이나 이름값에 관계없는 선발은 스타와 무명 모두에게 그 자체로 강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26일 결승 진출을 확정지은 뒤 “우승을 하더라도 한국 축구는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일갈했습니다. 그의 진면목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우승보다도 한국 축구 발전에 두고 있습니다. 경기에서 이겨도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운이 좋아서 이겼다”, “우승후보 자격이 없다”는 쓴소리를 했습니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에게 한국 축구의 청사진을 분명히 제시하고 일관되게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바로 점유율 축구입니다. 이를 위해 슈틸리케 감독은 대회 직전 세부 전술을 다듬어야 할 때 “점유율 축구를 하려면 소극적이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며 체질 개선이란 과제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허승 스포츠부 기자
허승 스포츠부 기자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슈틸리케가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슈틸리케를 영입한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을 사령탑에 앉힌 당사자입니다. 그때는 국내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만큼 확실한 성적을 거두는 것이 과제였다면, 지금 주어진 과제는 2002년 이후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한국 축구의 체질을 개혁하는 것이었고, 그 파트너로 슈틸리케를 점찍은 것입니다. 그의 임무가 승리가 아닌 개혁과 발전인 이상 우승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간과 여유를 두고 한국 축구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지켜보면서 성패를 판단하는 게 어떨까요?

허승 스포츠부 기자 rais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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