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 포항 스틸러스 감독이 6월17일 안방인 포항스틸야드 전용경기장에서 열린 2015 K리그 클래식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다. 포항 스틸러스 제공
[토요판] 김창금의 축구광
포항스틸러스 황선홍 감독
포항스틸러스 황선홍 감독
“저 보기보다는 잡초 근성이 있어요. 위기 때 강해집니다.”
그런 것 같다. 1990년대 상고머리나 더벅머리 시절의 초짜는 변했다. 눈매는 더 섬세하고 표정은 깊어졌다. 나이를 먹으면 얼굴에 책임을 진다고 한다. 스타 선수라는 과거에 안주하지 않는 모습엔 카운터펀치를 감춘 노림이 보인다. 이회택-차범근-최순호와 함께 한국 축구 대형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었던 황선홍(47).(황선홍 뒤의 대형 스트라이커로 뚜렷하게 떠오르는 선수는 없다. 앞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도자로 인생 2막을 펼쳐가는 그는 선수 시절 부상과 팬들의 질타에 맞섰듯이, 지금은 변신과 유연함으로 지도자의 새 전범에 도전하고 있다. 재미있고 공격적인 포항 스틸러스의 축구는 전문가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중간급 규모의 투자로 성적을 내는 포항의 힘의 근원은 연구 대상이다. 2013년 토종 선수만으로 K리그 우승, 2012~2013년 축구협회(FA)컵 2연패 등은 성과물이다. 올 시즌엔 초반 부진을 딛고 3위를 달리고 있다. 조광래 대구FC 대표이사는 “근래 들어 최고의 팀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지도자처럼 생기면 감독이 된다?
황선홍 감독한테는 스타 출신 지도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지도자 인생에서 스타 프리미엄은 훨씬 앞선 출발선을 제공한다. 구단도 비슷한 견적이라면 대중에게 잘 알려진 스타 선수를 선호한다. 직원 한명을 뽑더라도 프레젠테이션 요구 등 다양한 검증을 하는 일반 기업과 달리, 구단주의 결정에 따라 1~2일 새 감독이 결정되기도 한다. 유럽에서도 “지도자처럼 생기면 감독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감독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바뀌고 있다. 스타성도 좋지만 실력에 대한 갈증이 커지고 있다. 통역 출신의 조제 모리뉴 첼시 감독, 대선수가 아니었던 앨릭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일천한 선수 경력보다는 경제학 석사 등 공부하는 지도자로 알려진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 등이 끼친 영향이다. 프로를 경험하지도 못했지만 1980년대 AC밀란의 전성기를 이끈 아리고 사키 감독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훌륭한 기수가 되기 위해 말로 태어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타 감독이 성공한 사례도 있다. 토털사커의 상징인 요한 크라위프 감독은 1990년대 바르셀로나의 우승 시대를 이끌었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독일팀 감독으로 우승을 일궈냈다. 김호 전 축구대표팀 감독은 “스타 선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선수 때 그들이 했던 노력을 감독이 돼서 두 배 이상 한다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단 스타 선수들은 선수 때의 영광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선수가 아닌 전혀 다른 길이 지도자의 길”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황 감독은 어떨까.
건국대 시절 은사인 정종덕 감독이 들려준 일화다. “2004년쯤이다. 전남 코치가 됐다며 저녁을 사겠다고 해 만났다. 밥을 먹지도 않고 수첩을 꺼내 놓고 적으려고 해서 말렸다. 그때 ‘코치는 밥만 먹으면 된다. 나중에 감독이 되면 가지고 오라’고 했다.” 황 감독은 ‘메모 맨’이다. 경기 중 선수들한테 지시를 할 때도 손엔 메모지와 볼펜이 있다. 라커룸의 화이트보드는 세세한 작전지시로 시커멓게 바뀌기 일쑤다. 포항 송라축구클럽하우스 감독 방은 필기 노트와 비디오 디스크, 축구 관련 서적으로 가득 차 있다. 올해 말에는 지도자 자격증 최고 단계인 P급을 이수하게 된다. 하재훈 프로축구연맹 감독관은 “P급 자격증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다. 시험도 보고, 논문도 내고, 발표도 해야 한다. 축구철학에 대한 자기 시각이 확고하지 않고 이론 공부가 돼 있지 않으면 딸 수 없다”고 했다.
“공부할 시간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황 감독은 “경기가 가장 큰 공부다. 또 좋아하는 팀의 비디오를 계속 보면서 연구를 한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포항 축구는 쉴새없는 패스와 점유율 축구로 이뤄진 바르셀로나의 티키타카에 빗대 ‘스틸타카’로도 불린다. 그러나 황 감독의 축구 모델은 바르셀로나팀이 아니다. 그는 “최고의 선수로 구성된 바르셀로나와 우리는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는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위르겐 클로프 감독 시절의 도르트문트 축구다. 두 팀의 끈끈하고 콤팩트한 조직 축구가 현 단계 포항의 지향”이라고 했다. 황 감독은 “점유율보다는 생각의 속도가 빠르고 역동적이고 세밀한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황 감독은 생각이 많다. 선수 시절부터 그랬다. “야구처럼 데이터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많은 게 축구다. 하지만 상대 수비에 대한 분석을 많이 할수록 돌파할 확률은 높아진다. 선수 시절 상대방에 대한 장단점 분석을 항상 하면서 경기에 들어갔다. 머릿속에 수백개의 선수별 프로파일이 돼 있다.” 동료를 파악하는 것도 기본이다. 2002년 월드컵 폴란드전 첫 골도 비슷한 예다. “이을용 정도라면 공을 잡았을 때 충분히 내 앞으로 떨어뜨릴 것으로 예상했다. 발밑으로 떨어져 처리하기 어려웠지만, 생각이라기보다는 몸이 반응하면서 세우지 않고 골을 넣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분석 습관은 본인 한명이 아니라 33명 선수들을 관리해야 하는 지도자한테 도움을 준다. “축구를 너무 사랑한다. 어린아이처럼 궁금증이 많다. 선수들한테도 늘 ‘왜?’라는 질문을 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축구는 거대한 산처럼 풀릴 길 없이 거기에 서 있다.”
2013 K리그, 2012~13 FA컵 2연패
‘스타선수’ 과거 잊고 승리 일궈내
최고 지도자 P급 자격증도 곧 이수
선수 시절 수백개 선수별 프로파일
2002 월드컵 폴란드전 첫 골은 그 예 대학 4학년때 파격적 ‘포항’의 영입
독일 유학…지도자로 친정 복귀
구단과 융합으로 ‘다른 축구’ 선보여
K리그서 가장 주목받는 지도자가 된
‘메모맨’의 대표팀 지도자 향한 도전 스타의식, 99%는 버렸다 지도자 황선홍은 늘 변신한다. 2008~2009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두 시즌 동안 공격적인 축구로 반짝했지만 2년 연속 리그 12위로 하위권에 처지면서 고민에 빠진다. 2010년에는 7위를 했지만 황선홍표 축구의 색깔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황 감독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있다. 부산 시절 두 해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축구를 펼치려고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결국 3년차 때는 이기는 축구로 타협을 하면서 특징을 잃었다”고 돌아봤다. 지도자는 구단과의 궁합이 중요하다. 부산과의 재계약 실패 뒤 친정인 포항이 황 감독에게 손을 내민 것은 천운이었다. 1973년 실업팀으로 출발한 포항은 프로축구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최근엔 성장, 자립, 내실을 강조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과거엔 큰손으로 최순호, 황선홍, 홍명보 등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만 영입했다. 류호성 포항 스틸러스 성장기획실장은 “고 박태준 회장이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야구를 많이 접했다. 하지만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축구라고 판단했다. 글로벌 기업으로서도 축구가 적합하다고 보고 투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1990년 국내 최초로 전용구장을 세우고, 축구단 법인화나 클럽하우스 건립, 유소년 시스템을 선도적으로 접목시킨 곳이 포항이다. 정종덕 전 건대 감독은 “이회택 포항 감독이 대학 4학년이던 황선홍을 드래프트에서 뽑지 않고 1억원의 계약금에 영입했다. 박태준 회장이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드래프트 불참으로 인한 징계를 감수하고 선수를 뽑아서는, 파격적으로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려고 했던 곳이 포항”이라고 했다. 황 감독의 독일 2년 체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본인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인연 때문에 황 감독은 더 뛰는지 모른다. 2011년 첫해 포항팀은 선수 구성이 좋았지만, 2013~2014년 두 해 동안은 외국인 선수 없이 토종 선수들로만 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구단은 팬을 위한 경기, 끊어지지 않는 재미있는 경기, 재정 건전성을 내용으로 한 ‘스틸러스 웨이’를 내걸면서 격투기 축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운영을 지양했다. 비용을 줄이면 감독은 편한 길 대신 어려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황 감독은 “지도자는 구단의 형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경기장에서 맹목적인 싸움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할 얘기는 하지만 구단의 방침을 따랐다”고 했다. 일부 K리그 감독들이 구단의 처지는 뒤로한 채 성적을 이유로 고가의 기성품 선수에 욕심을 내는 것과는 마인드가 다르다. 이런 황 감독이 험난한 K리그에서 우승과 컵대회를 제패한 것이 놀랍다. 황 감독이 포항의 유소년 시스템에서 길러진 선수들을 활용해 성적을 내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상급 선수를 영입하는 방식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젊은 선수를 키워서 써야 하는 시대다. 올해도 포항의 주력군은 외국인 선수에 더해 신화용, 신진호, 고무열, 김승대, 손준호, 문창진, 이광혁 등 모두 포항 유소년 출신들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 황 감독과 강철 코치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로 선수들을 아교처럼 융합시키고 있다. 18번 백넘버는 황선홍이 지식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다. 대표팀이나 프로팀의 원톱 공격수들은 황선홍 이후 18번을 선호한다. 황 감독도 좋은 스트라이커를 영입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포항은 원톱이 없는 제로톱 전형을 자주 사용한다. 황 감독은 “조건에 따라 팀의 전형을 바꿀 수 있는 대비책이 필요하다. 단순한 것 같지만 제로톱의 형태를 전술적으로 완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스 히딩크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의 전술적 형태인 4-4-2, 3-4-3 등은 숫자놀음일 뿐이라고 한다. 황 감독은 “그래도 숫자가 중요한 것 같다. 팬들은 최용수 감독이 FC서울의 전형을 바꾼 것을 두고 수비적이라고 비판하는데,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변화를 주는 감독이 많이 나올수록 공부도 하고 긴장도 하게 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싸운다면 승패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스타의식에 물든 감독은 실패한다. 황 감독도 스타의식을 버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99%는 버렸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판단하는 것은 선수들이다. 하나의 공격 방법을 취했다면,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것을 이해해서 소화하는 선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도 있다. 그럴 때는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특정한 시점에 기용하거나 선수들을 조각조각 모아 효과를 내도록 한다”고 말했다. 이영표 해설위원은 “스타라는 과거의 영광이 현재 선수들과의 거리감을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 면에서 황선홍 감독이나 올림픽 동메달을 일궜던 홍명보 감독의 선수 친화력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스승 히딩크 감독의 특이한 주문 황 감독은 많은 스승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히딩크 감독도 있다. 황 감독은 “1년간 히딩크 감독을 경험했는데 특이한 주문을 했다. 공격을 할 때 특정 범위 이상을 벗어나지 말라고 영역을 강조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골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활동보다는 영역을 세분화해서 노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선배 감독들한테도 자문을 하기도 한다. 코칭의 목표는 왜 뛰어야 하고, 얼마나 처절히 뛰어야 하는지를 선수들이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황 감독은 “기술적으로 선수들의 완성도는 거의 비슷하다. 어떻게 강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한다”고 했다. 선수 시절 황 감독은 팬들의 애증에 상처도 받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9개월간 무릎 십자인대 재활 훈련을 할 때는 “명예 회복” “자존감”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결국 2002년 월드컵 폴란드전 골로 가치를 확인했고, 팬들한테 진 빚을 갚았다. 황 감독은 “저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렇게 화가 났겠습니까. 당연히 이해를 한다”고 했다. 그래도 1994년 미국월드컵 2차전 볼리비아와의 경기(0-0) 때 4번씩이나 날려버린 중거리슛 얘기를 꺼냈다. 황선홍이 찬 공은 모조리 공중으로 떠 홈런볼이 돼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황 감독은 “상대 수비수가 골대 안에 둘씩이나 들어가 있으면 골대 상단 구석을 노리고 찰 수밖에 없다. 살살 차면 다 걸린다. 다만 부담감에 몸이 굳어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해명했다. 동료 선후배는 다 안다. 중거리슛이 골이 될 확률은 적다. 하지만 상대 수비나 골키퍼를 위협하거나 끌어내는 효과가 있다. 21년의 시간이 흘렀고, 황 감독은 K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도자로 거듭나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중계방송를 했던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황 감독은 늘 오뚝이처럼 일어나 기회를 꿰찼다. 준비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예산이 대폭 줄어든 포항이지만 경기를 보면 색깔이 보인다. 대표팀 지도자의 꿈을 향한 도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창금 기자
▶ 김창금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란 말이 있다. 그런데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학창시절도 아닌 군대였으니, 여자들은 이런 마음을 알까? <한겨레> 스포츠 기자로 1999년 이후 줄곧 축구 기사를 써오면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마음껏 축구 할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꿈을 간직해왔다. 스포츠 경제와 스포츠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김양희의 야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스타선수’ 과거 잊고 승리 일궈내
최고 지도자 P급 자격증도 곧 이수
선수 시절 수백개 선수별 프로파일
2002 월드컵 폴란드전 첫 골은 그 예 대학 4학년때 파격적 ‘포항’의 영입
독일 유학…지도자로 친정 복귀
구단과 융합으로 ‘다른 축구’ 선보여
K리그서 가장 주목받는 지도자가 된
‘메모맨’의 대표팀 지도자 향한 도전 스타의식, 99%는 버렸다 지도자 황선홍은 늘 변신한다. 2008~2009년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두 시즌 동안 공격적인 축구로 반짝했지만 2년 연속 리그 12위로 하위권에 처지면서 고민에 빠진다. 2010년에는 7위를 했지만 황선홍표 축구의 색깔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황 감독은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있다. 부산 시절 두 해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축구를 펼치려고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결국 3년차 때는 이기는 축구로 타협을 하면서 특징을 잃었다”고 돌아봤다. 지도자는 구단과의 궁합이 중요하다. 부산과의 재계약 실패 뒤 친정인 포항이 황 감독에게 손을 내민 것은 천운이었다. 1973년 실업팀으로 출발한 포항은 프로축구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최근엔 성장, 자립, 내실을 강조하며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과거엔 큰손으로 최순호, 황선홍, 홍명보 등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만 영입했다. 류호성 포항 스틸러스 성장기획실장은 “고 박태준 회장이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야구를 많이 접했다. 하지만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축구라고 판단했다. 글로벌 기업으로서도 축구가 적합하다고 보고 투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1990년 국내 최초로 전용구장을 세우고, 축구단 법인화나 클럽하우스 건립, 유소년 시스템을 선도적으로 접목시킨 곳이 포항이다. 정종덕 전 건대 감독은 “이회택 포항 감독이 대학 4학년이던 황선홍을 드래프트에서 뽑지 않고 1억원의 계약금에 영입했다. 박태준 회장이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드래프트 불참으로 인한 징계를 감수하고 선수를 뽑아서는, 파격적으로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려고 했던 곳이 포항”이라고 했다. 황 감독의 독일 2년 체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본인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인연 때문에 황 감독은 더 뛰는지 모른다. 2011년 첫해 포항팀은 선수 구성이 좋았지만, 2013~2014년 두 해 동안은 외국인 선수 없이 토종 선수들로만 팀을 운영하기도 했다. 구단은 팬을 위한 경기, 끊어지지 않는 재미있는 경기, 재정 건전성을 내용으로 한 ‘스틸러스 웨이’를 내걸면서 격투기 축구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운영을 지양했다. 비용을 줄이면 감독은 편한 길 대신 어려운 길로 갈 수밖에 없다. 황 감독은 “지도자는 구단의 형편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경기장에서 맹목적인 싸움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할 얘기는 하지만 구단의 방침을 따랐다”고 했다. 일부 K리그 감독들이 구단의 처지는 뒤로한 채 성적을 이유로 고가의 기성품 선수에 욕심을 내는 것과는 마인드가 다르다. 이런 황 감독이 험난한 K리그에서 우승과 컵대회를 제패한 것이 놀랍다. 황 감독이 포항의 유소년 시스템에서 길러진 선수들을 활용해 성적을 내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상급 선수를 영입하는 방식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젊은 선수를 키워서 써야 하는 시대다. 올해도 포항의 주력군은 외국인 선수에 더해 신화용, 신진호, 고무열, 김승대, 손준호, 문창진, 이광혁 등 모두 포항 유소년 출신들로 이뤄져 있다. 여기에 황 감독과 강철 코치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화기애애’한 팀 분위기로 선수들을 아교처럼 융합시키고 있다. 18번 백넘버는 황선홍이 지식재산권을 주장할 수 있다. 대표팀이나 프로팀의 원톱 공격수들은 황선홍 이후 18번을 선호한다. 황 감독도 좋은 스트라이커를 영입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 때문에 포항은 원톱이 없는 제로톱 전형을 자주 사용한다. 황 감독은 “조건에 따라 팀의 전형을 바꿀 수 있는 대비책이 필요하다. 단순한 것 같지만 제로톱의 형태를 전술적으로 완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거스 히딩크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의 전술적 형태인 4-4-2, 3-4-3 등은 숫자놀음일 뿐이라고 한다. 황 감독은 “그래도 숫자가 중요한 것 같다. 팬들은 최용수 감독이 FC서울의 전형을 바꾼 것을 두고 수비적이라고 비판하는데, 같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변화를 주는 감독이 많이 나올수록 공부도 하고 긴장도 하게 된다. 똑같은 방식으로 싸운다면 승패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스타의식에 물든 감독은 실패한다. 황 감독도 스타의식을 버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99%는 버렸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판단하는 것은 선수들이다. 하나의 공격 방법을 취했다면, 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것을 이해해서 소화하는 선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도 있다. 그럴 때는 선수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특정한 시점에 기용하거나 선수들을 조각조각 모아 효과를 내도록 한다”고 말했다. 이영표 해설위원은 “스타라는 과거의 영광이 현재 선수들과의 거리감을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런 면에서 황선홍 감독이나 올림픽 동메달을 일궜던 홍명보 감독의 선수 친화력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스승 히딩크 감독의 특이한 주문 황 감독은 많은 스승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히딩크 감독도 있다. 황 감독은 “1년간 히딩크 감독을 경험했는데 특이한 주문을 했다. 공격을 할 때 특정 범위 이상을 벗어나지 말라고 영역을 강조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골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활동보다는 영역을 세분화해서 노려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선배 감독들한테도 자문을 하기도 한다. 코칭의 목표는 왜 뛰어야 하고, 얼마나 처절히 뛰어야 하는지를 선수들이 깨닫도록 하는 데 있다. 황 감독은 “기술적으로 선수들의 완성도는 거의 비슷하다. 어떻게 강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한다”고 했다. 선수 시절 황 감독은 팬들의 애증에 상처도 받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9개월간 무릎 십자인대 재활 훈련을 할 때는 “명예 회복” “자존감”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결국 2002년 월드컵 폴란드전 골로 가치를 확인했고, 팬들한테 진 빚을 갚았다. 황 감독은 “저를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렇게 화가 났겠습니까. 당연히 이해를 한다”고 했다. 그래도 1994년 미국월드컵 2차전 볼리비아와의 경기(0-0) 때 4번씩이나 날려버린 중거리슛 얘기를 꺼냈다. 황선홍이 찬 공은 모조리 공중으로 떠 홈런볼이 돼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황 감독은 “상대 수비수가 골대 안에 둘씩이나 들어가 있으면 골대 상단 구석을 노리고 찰 수밖에 없다. 살살 차면 다 걸린다. 다만 부담감에 몸이 굳어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해명했다. 동료 선후배는 다 안다. 중거리슛이 골이 될 확률은 적다. 하지만 상대 수비나 골키퍼를 위협하거나 끌어내는 효과가 있다. 21년의 시간이 흘렀고, 황 감독은 K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도자로 거듭나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중계방송를 했던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황 감독은 늘 오뚝이처럼 일어나 기회를 꿰찼다. 준비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들이었다. 예산이 대폭 줄어든 포항이지만 경기를 보면 색깔이 보인다. 대표팀 지도자의 꿈을 향한 도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창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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