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균 순천중앙초 축구부 감독이 2일 학교 인조잔디 경기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우린 백화점 옆 동네마트다. 하지만 동네마트가 이긴다.”
프로팀 산하 유소년 팀을 그는 ‘백화점’이라고 표현했다. 학부모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운영되는 자기 팀은 규모가 작은 동네마트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눕히듯 프로 유소년팀을 제쳤다. 그 희열은 몇 달이 지나도 여운을 남겼나 보다. ‘마트 주인’의 말투가 호탕하다. 하지만 주름진 얼굴엔 복잡한 감정도 새겨져 있는 듯했다. 그것은 30년 이상 유소년 축구 한길을 파온 ‘잡초’의 생명력이었고, 외곬의 삶을 살아온 사람의 회한 같기도 했다.
새해 2일 오후 전남 순천중앙초등학교 인조잔디 구장. 아이들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 훈련에 바지런히 움직였다. 1983년 말부터 현장을 지켜온 정한균(61) 순천중앙초 축구부 감독은 변함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벌써 35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우승만 110번 했는데, 시간이 어떻게 지나간 줄 모르겠네요. 아이들이 즐겁게 공 차는 모습만 보면 세상 시름이 다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우리 감독님은 호랑이
정 감독은 초등학교 유소년 축구의 명지도자다. 한 해 평균 3차례 우승은 기본이고, 우수 선수를 선점하는 등 좋은 여건을 갖춘 프로 유소년팀과 대결해도 잘 밀리지 않는다. 지난해 10월에는 프로축구 전남 드래곤즈 산하의 광양제철초 축구팀을 전남지역 주말리그 2위로 밀어내고 정상에 올랐다. 정 감독은 “동네마트가 백화점 매출을 앞섰다”며 웃었다. 지난해 교육감배, 일본 가마모토컵 제패까지 합치면 3관왕이다.
그의 손을 거쳐 간 프로선수의 면면도 화려하다. 기성용(뉴캐슬), 남기일(성남FC 감독), 한찬희(전남 드래곤즈), 김동준(성남FC), 허용준(전남 드래곤즈), 이종호(울산 현대), 김영광(서울이랜드), 이슬찬(전남 드래곤즈), 김정수(16살 이하 대표팀 감독), 박요셉(전 국가대표), 이한샘(아산 무궁화) 등 20명에 이른다. 국내 296개 초등학교팀이 이런 식으로 선수를 배출한다면 한국 성인대표팀의 고질인 개인기 부족이나 일대일 돌파 문제는 진즉에 해결됐을 것이다.
성적을 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그는 “많은 지도자가 내게 와 어떻게 가르치냐고 물어본다. 식당의 주방장은 자기 노하우를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지만 나는 다 공개한다. 공 없이 마라톤·육상 선수 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100% 공 가지고 훈련하라고 조언한다. 그것이 내 축구의 핵심이다”고 말했다. 주간 훈련 계획표를 보면 모든 게 공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월요일 70m 거리의 골대를 왕복하면서 패스·드리블을 하면, 화요일엔 콘을 세운 뒤 변형 패스, 수요일엔 3인1조 슈팅, 목요일엔 트래핑·컨트롤·터치 교육, 금요일엔 16가지의 드리블 훈련을 한 뒤 토요일 연습 경기에서 확인하는 식이다. 그는 “공을 갖고 하면 힘들어도 힘든지 모르고 뛴다. 벌도 드리블하면서 골대 돌아오기다. 성장기 아이들은 체력을 많이 쓰면 고장 날 수 있는데, 이렇게 공과 함께 하면 체력도 자연스럽게 좋아진다. 축구 과학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훈련이 느슨하지는 않다. 주말 연습경기 때는 개별 선수들의 플레이를 골, 도움, 2대1 패스, 오버래핑, 스루패스, 태클, 열심히 뛴 선수 등 항목별로 나눠 점수를 매긴다. 이런 세세한 데이터를 갖추게 되면 말 한마디에도 설득력이 커진다. 그는 “훈련이나 연습경기 때 실전과 똑같이 집중해야 한다. 연습경기 점수가 낮은 선수에게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분발을 촉구하고, 높은 선수에는 칭찬을 해줘 더 열심히 뛰도록 만든다”고 설명했다. 선수 능력의 100% 이상을 끌어내는 그의 훈련이 엄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날 20여명의 선수에게 정 감독이 어떠냐고 묻자, 일제히 “호랑이 감독”이라고 외쳤다.
‘100% 공을 갖고 훈련하라’는 그의 단순한 방법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정 감독은 “내게서 들은 지도자들이 머리로는 분명히 공을 갖고 놀도록 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무엇에 쫓기는 것인지 습관적으로 체력 훈련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공을 갖고 훈련하는 선수를 중간에 불러 리듬을 끊거나, 공도 없이 달리기 연습을 시키는 지도자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선수 시절 익숙했던 정신력과 체력을 앞세운 강훈련 문화가 지도자가 된 뒤에도 몸에 기억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게 ‘투혼의 한국 축구’의 바탕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은 기술 없이는 도약할 수 없는 단계에 부닥쳤다.
지도자와 학부모의 역학관계도 지도자들이 기술축구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기 힘든 요인이다. 기술은 반복된 기본기 훈련에서 나온다. 더욱이 한국의 유소년들은 보통 3~4학년 때 축구를 시작해 훨씬 이른 나이에 입문하는 남미나 유럽의 아이들과 다르다.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할 때지만 경기가 많고, 학부모들은 당장 눈앞의 성적을 원한다. 급여를 학부모 주머니에 의존해야 하는 등 신분이 불안정한 계약직 지도자들이 선수들에게 기술훈련이나 즐기는 축구만을 시키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 감독은 “대표팀 선수들의 기술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기본기 그림이 다 그려지는 초등학교 때 게임에만 매달리는 게 현실”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경기 너무 많아 훈련 시간 없어
학부모와 지도자 승패에 연연
틈을 줘야 기본기 충실 지도자 나와
정한균 순천중앙초 축구부 감독이 2일 새해 첫 훈련을 시작한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칙 지키기 위해 자기관리 철저
정 감독이 나름의 축구 철학을 관철해온 것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3년 10월 한국전력이 국내 최초로 실시한 유소년 축구 지도자 공개채용(600여명 중 46명 합격)에 합격해 한전 순천지사에 배속됐고, 한전 직원으로 높은 급여를 받으면서 순천중앙초 축구단을 맡았다. 순천중앙초 파견 직전 한전 연수원에서 한 달간 받은 교육은 획기적이었다. 그는 “독일인 국제축구연맹(FIFA) 강사와 고 이긍세 서울대 교수 등 각 부문 최고의 전문가가 스포츠 역학, 심리, 영양, 생리 등을 가르쳤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만 한 교육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국가를 대신해 축구 지도자를 양성한 한전의 지원이 마감되면서 그는 교육행정직 공무원 9급 특채로 학교 직원이 됐고, 마산 합성초의 강상기 감독과 함께 지금까지 한전 유소년 축구 투자 역사의 상징으로 남았다.
6급 공무원인 정 감독은 살얼음판을 걷듯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했다. 그는 “학부모들한테 신세를 지면 내 축구를 아이들한테 가르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일절 신세 질 일을 하지 않았다. 담배와 술도 안 한다. 후배들한테도 ‘학부모를 적으로 생각하라’고 얘기한다”고 소개했다. 더 극단적인 것은 둘째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이다. 그는 “9급 공무원 보수가 너무 적어 아이 둘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둘째 아이를 낳자고 사정사정했는데 듣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장가든 외아들한테 미안하고, 마누라한테는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스럽다. 평생의 후회로 남았다”고 했다.
물론 축구 지도법 향상을 위한 공부는 쉬지 않았다. 틈만 나면 유럽으로 나갔고, 각종 대회 우승 보너스로 찾아온 연수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미 축구를 접해보고 싶은 욕심에 2005~2008년 4년간 순천시의 지원으로 브라질 프로축구단 코치를 영입한 적도 있다. 정 감독은 “1년간 시의회와 시청을 쫓아다니며 사정해 연봉 3000만원을 맞춰줄 수 있었다. 대신 4년간 브라질 코치한테 남미 축구를 완전히 습득했다. 그들은 오직 드리블이었다. 브라질의 삼바와 유럽의 힘, 한국의 된장축구가 결합한 것이 내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기술축구 가로막는 기득권카르텔 깨야
바닥에서 몸을 던져 아이들을 키우는 지도자가 있는데 한국 축구는 왜 더 전진하지 못하는가? 정 감독은 “평상시엔 주말리그에 나가고, 방학 등에는 전국대회에 나간다. 경기가 너무 많아 지도자들이 아이들 기본기 훈련시킬 시간이 없다. 정부와 대한축구협회가 합의해 주말리그를 시행했으면 전국대회는 폐지하던가, 아니면 주말리그를 하지 말고 전국대회만 하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어서 현장에서는 죽을 지경이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국 권역별로 실시하는 상시 주말리그가 있는 상황에서 수백개 팀이 한 곳에 모여 하는 전국대회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전국대회를 개최해야만 재정의 젖줄인 지자체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연맹은 전국대회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중등연맹, 고등연맹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무책임과 대한축구협회의 의지부족, 한국유소년축구연맹의 조직 이기주의, 전국대회 개최를 둘러싼 지자체나 언론사 등 각 이해집단이 기득권 카르텔로 묶였다.
한국유소년축구연맹 부회장직을 맡은 정 감독은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막막하다. 그래도 대한축구협회가 더 앞에서 나서서 개혁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뛰어난 인적·물적 자원을 갖추고 있고 정책의 통일성을 높일 수 있는 대한축구협회도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 하지만 갈등을 두려워하는 탓인지, 초등학교 8 대 8 축구 전면시행이나 유스전략본부(현 기술교육실) 설치 등 표층적인 액션만 취할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아직 나서지 못하고 있다.
국가 정책의 신뢰 상실과 일관성 부재는 유소년축구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늘어난 대회 출전으로 회비 부담이 커진 학부모들은 아우성이고, 재능있는 아이들은 돈 많이 들어갈까 봐 축구팀에 들어가지 않는다. 정 감독은 “축구부 아이들과 일반 아이들을 편으로 나눠 축구를 시켜보면 축구부 아닌 팀에 더 재능이 뛰어난 아이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조사한 한?일 유소년팀 현황은 실증적이다. 초등학생인 12살 이하팀(일본 8926개, 한국 309개)과 중학생인 15살 이하팀(일본 7436개, 한국 237개), 고교생인 18살 이하팀(일본 4109개, 한국 182개) 등 일본 유소년팀이 한국보다 22.6배에서 31.3배 많다. 두 나라의 인구 규모를 고려해도 차이가 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등학교 유소년팀에서 35년을 찬바람 맞으며 버텨온 정한균 감독은 “갈수록 어렵다는 말을 평생 실감하며 살았다. 계속 연구하고 고민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우리는 늘 일본과 비교하는데 어쩔 수 없다. 항상 늦다. 사실 초등학교에서는 저학년들 5 대 5, 7 대 7 경기는 늘 해왔다. 이제라도 8 대 8을 모든 초등학교에 시행하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가 국가대표팀이라는 꽃에만 거름을 주면 꽃만 살고 뿌리는 썩는다. 다른 나라 쫓아가지는 못해도 흉내는 내야 한다. 이제 밑에다도 골고루 거름을 뿌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표팀을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는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는 전국의 모든 학교팀을 책임질 의무는 없다. 대표팀 강화가 최우선 순위다. 올해 예산 884억원 가운데 각급 대표팀 운영비로 229억원을 책정한 이유다. 하지만 유소년 없인 대표팀도 없다. 최근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괄목상대한 성장을 거둔 배경에는 15살 때부터 손발을 맞춘 ‘황금세대’의 육성이 있었다. 국내 K리그에서도 유소년 투자와 육성은 가장 중요한 사업이다. 기업 구단마저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선수를 키워서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초등학교 유소년팀에서 정 감독은 35년을 찬바람 맞으며 묵묵히 버텨왔다. 그는 “경기 때마다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갈수록 어렵다는 말을 평생 실감하며 살았다. 경험이 쌓여도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계속 연구하고 고민했다”고 했다. 그런 정 감독이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는 한국축구에 울리는 경종이다.
“일본에 가보면 팀이 져도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진심으로 이긴 팀을 격려한다. 한국은 대회 나가면 학부모와 지도자가 전쟁 분위기를 만든다. 아이들이나 지도자가 대회에 너무 치이게 하면 안 된다. 틈을 주어야 기본기에 충실한 지도자가 나오고 한국 대표팀 축구의 난제인 일대일 돌파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순천/글·사진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