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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FC 김종부 “스카우트 파동 이겨내며 절실함과 기다림 배워”

등록 2018-11-17 10:50수정 2018-11-17 11:10

[토요판] 인터뷰
ACL 진출 이뤄낸 경남FC 김종부 감독
경남FC 김종부 감독은 잘 웃지 않는다. 말수도 적고 목소리도 크지 않다. 서두르거나 다그치지 않고, 그저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기다려 줄 뿐이다.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경남FC 김종부 감독은 잘 웃지 않는다. 말수도 적고 목소리도 크지 않다. 서두르거나 다그치지 않고, 그저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기다려 줄 뿐이다.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 “김종부 감독? 1986 멕시코 월드컵 불가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축구선수 김종부?” 1983년 멕시코 세계청소년 축구 대회에서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한국을 4강에 올려놓은 주역이자,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 획득의 주인공이지만 김종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이제 축구팬들은 그를 ‘갓종부’ ‘킹종부’라고 부르고 있다. 축구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3년 만에 한국 프로축구 1부 리그로 승격한 경남FC가 내년도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을 따내는 ‘기적’을 이뤄냈다. 17일 현재 경남은 케이(K)리그 2위에 올라 있다. 앞으로 두 경기가 남아있지만, ACL 출전 자격(국가별 4개팀, 한국의 경우 K리그 상위 3개팀+대한축구협회(FA)컵 우승팀)을 이미 확보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끄는 클럽팀이 아닌 시·도민 구단으로는 처음으로 케이리그 성적으로 ACL에 진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성남FC가 2014년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이듬해 ACL에 나간 적이 있지만 정규리그 성적만으로는 경남이 첫 사례다.

경남은 시즌이 시작될 때만 해도 ‘강등 후보 1순위’의 약체로 평가됐다. 그러나 1부 리그로 승격한 첫해에 모두의 예상을 보란 듯 뒤엎고 돌풍을 일으켰다. 올 시즌 경남의 돌풍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경남FC 선수들의 연봉은 전북 현대의 6분의 1 수준이다. 괄목할 만한 스타플레이어도 없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 단 한 명의 국가대표선수도 출전시키지 못했다.

경남FC의 매서운 돌풍에는 선수들의 잠재력을 눈여겨 보고 적소에 선수들을 배치한 김종부(53) 감독의 용병술과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김 감독을 지난 8일 함안에 위치한 경남FC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말컹과 하이파이브 하는 김종부 감독.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말컹과 하이파이브 하는 김종부 감독.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나도 겪었기에 선수들 어려움 이해”

“검증된 선수는 아니었다.”

말컹(24)이란 이름으로 인터뷰를 열었을 때 김 감독은 말했다. 검증된 선수가 아니었던 말컹을 ‘가장 탁월하게 검증된 선수’로 성장시킨 인물이 그였다.

김 감독은 26골로 득점 부문 1위를 달리는 브라질 출신의 말컹을 발굴해냈다. 지난해 2부 리그에서 최우수 선수, 득점왕, 베스트 11 등 3관왕을 수상한 말컹은 올해 1부 리그에서도 최우수 선수와 베스트 11 공격수 부문의 유력 수상 후보로 꼽히고 있다. 정규 리그 36라운드까지 마친 가운데 경남은 17승10무9패(승점 61)로 2위에 올랐다. 31경기에서 26골·5도움을 기록한 말컹이 없었다면 경남의 선전도 불가능했다. 득점이든 도움이든 매 경기 한 개 이상의 공격 포인트를 올린 셈이다.

어릴 적 농구선수를 꿈꾸던 말컹은 축구화를 신은 지 8년여밖에 되지 않았다. 2년 전, 김 감독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말컹을 데려와 득점 기계로 키웠다. 큰 키(196㎝)에 비해 느린 슈팅 타이밍을 보완했고, 중앙뿐만 아니라 측면 공간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 구단의 사정이 어렵다보니 예산상 데려온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큰 키 때문에 말컹을 낙점한 거다. 말컹의 1대 1 돌파 능력은 검증돼 있었다. 크로싱을 중심으로 플레이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말컹은 체중이 쉽게 불어서 컨디션 난조에 빠지기도 했다.

“몸집이 커서 수비에게 자주 걸렸기 때문에 체중 감량을 하라고 요구했다. 요구대로 말컹은 10㎏ 이상을 감량했다. 말컹은 아이 같은 면이 있고 감수성도 풍부하다. 나이는 어리지만 부인과 아이도 있는데,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 혼자 있다보니 힘들어하기도 했다.”

―선수가 힘들어하면 감독은 어떻게 하나.

“마음으로 이해해줘야 한다. 면담을 많이 했다. 국내 선수들보다 말컹과 대화를 더 많이 했다. 남미에서 온 선수들은 축구 선진국 출신의 고집이 있다. 서로 부딪힐 때도 있지만 기다려준다.”

경남에서 다시 일어선 선수는 말컹 뿐만이 아니다. 2013년 만 16세 나이로 프로 데뷔골을 넣으며 일본의 축구 천재로 떠오른 쿠니모토(21)는 팀 내 최연소 출장과 득점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그러나 그는 기대를 받은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사생활, 동료와의 마찰 등으로 갈등을 겪고 팀에서 방출 당한 뒤 이적과 방출을 되풀이했다. 소속팀이 없어 힘들어하던 쿠니모토에게 손을 내민 사람도 김 감독이었다.

―쿠니모토는 재능은 뛰어나나 악동의 이미지가 강했다. 일본에서 외면받는 그를 왜 영입했나.

“말컹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우리 팀 상황이 좋았다면 쿠니모토를 뽑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으면서 선수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엘리트 코스대로 커 가는 선수들도 있지만, 현실은 순한 사람도 악하게 만들 수 있다. 쿠니모토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러블은 없었나.

“많이 부딪쳤다. 쿠니모토가 집에 간다고 한 적도 있다. 그럴 때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기다려줬다. 일본어 번역을 부탁해서 나의 꿈과 이상에 관해 편지를 써서 준 적도 있다. 최근엔 성실하게 훈련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쿠니모토를 다시 주목하고 있다.”

―선수를 보는 안목이 남다른데, 선수를 발굴할 때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나.

“그가 선수 생활을 해온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기본은 갖춰져있는데 스스로 한계를 못 깨고 있는건 아닌지 본다. 기본적으로 자기 일에 대한 목표, 꿈이 있어야 하고 절실함이 보여야 한다.”

비운의 스트라이커에서 ‘갓종부’로

김 감독은 선수 시절 ‘비운의 스트라이커’로 불렸다. 1983년 세계청소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인 그는 고려대 4학년이던 1986년 프로축구 대우와 현대 구단의 자존심 싸움에 끼어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다. 역대 최고 조건을 제시한 두 팀과 협상하다 이중계약 파문이 일어났고 1987년 한·일 프로축구 친선전에서 대우 소속으로 뛴 탓에 1년간 선수 자격을 잃었다. 1988년 포항 유니폼을 입었지만 1995년 은퇴할 때까지 81경기에서 6골에 그쳤다.

―스카우트 파동 이후 감독으로서 인정 받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많이 아팠으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20년 이상을 힘들어했다. 지금도 조금은 상처가 남아 있다. 그 상처들이 선수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래서 완벽한 감독보다는 선수들과 함께 팀을 만들어가는 감독이 되려 한다. 전성기 때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는 더 많이 보인다.”

1986년 스카우트 파동으로
‘비운의 스트라이커’ 됐지만
지도자로서 꽃을 피워
2019년 ACL 출전권 확보
1부 리그 승격 첫해 돌풍 주역

‘흙 속 진주’ 말컹 발굴해내
생활고 때문에 장어구이 장사도
어려운 선수들 보듬으며 동고동락
“혼자 완벽하기보다 선수들과 함께
팀 만들어가는 감독이 되려 한다”

―아마추어 지도자 시절이던 2013년 ‘먹고 살기 위해’ 장어구이집도 직접 운영했다 들었다.

“당시 월급이 세금 떼고 260만원 나오는데 집에 240만원 갖다주고 20만원으로 한 달 버텨야 했다. 기름값이 없었던 적도 많았다. 먹고살기 위해 경기도 화성 진안동에 장어구이집을 열었다. 내 고향인 통영에서 바다 장어를 공수해와 팔았다. 은퇴하면 장어집은 또 할 것이다(웃음).”

―생활고를 겪는 중에도 형편 어려운 선수들을 많이 도왔다.

“금전적으로 해줄 수 있는 건 없었고, 가게에서 장어 회식을 많이 시켜줬다.”

보통 점유율과 패스는 슈팅, 유효슈팅과 더불어 한 팀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경남FC의 경우는 다르다. 점유율과 패스는 최하위인데도 ‘이기는 축구’를 한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월드컵 휴식기 이후 15~20라운드 6경기의 내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경남FC의 공 점유율은 12개팀 가운데 최하위였고 경기당 패스 횟수(266개) 역시 12위로 가장 적었다. 하지만 이 기간 경남은 4승2무를 기록했다. 김 감독이 펼치는 ‘매직’에 팬들은 그를 ‘갓종부’와 ‘킹종부’로 부르며 환호했다. 이슬기 스포티비 해설위원은 “경남은 점유율에 신경 쓰지 않는다. 가장 간결하고 직선적인 방식으로 골문에 접근하는 약속된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점유율과 패스보다는 역습과 실리축구가 전략인가.

“전략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스쿼드(선수 명단)가 떨어지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절박함이 있으니 골 결정력이 있었던 것 뿐이다.”

―선수들의 재목을 보고 전략을 짜나, 전략에 따라 선수를 기용하나.

“늘 하고 싶은 축구는 있지만 경남FC 감독을 맡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선수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략부터 짜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도민 구단인 경남에선 재목에 맞게 색깔을 입히고 보강하면서 만들어간다.”

―경남은 1부 리그 12개 팀 중에서 생활이 가장 자유로운 팀으로 손꼽힌다. 관리, 통제보다는 자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잘 해주고 있기 때문에 굳이 통제를 안 하는 것이다. 잘못했을 때 책임을 지면 되는데 굳이 먼저 규율을 정하고 따르도록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선수시절 나 역시 그런 관리와 통제가 힘들었고, 결국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것도 축구의 일부분이다.”

국가대표 출신 스타 선수들이 은퇴 후 코치를 거쳐 바로 프로팀 감독이 되는 것과 달리 김 감독은 고교와 대학, 아마추어 리그를 차례로 거치며 프로까지 올라왔다. 1995년부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김 감독은 거제고-동의대-중동고를 거쳐 2011년 양주시민축구단 감독으로 부임하며 성인축구에 도전했다. 2013년 화성FC를 맡아 이듬해 K3 챌린저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2015년 12월 경남FC 감독으로 프로에 입성했다. 김 감독이 맡은 팀은 모두 우승 또는 준우승을 이뤄냈다.

지난해 10월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FC경남 선두들이 김종부 감독을 헹가래 하고 있다.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지난해 10월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FC경남 선두들이 김종부 감독을 헹가래 하고 있다. 사진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이기는 축구 비법은 ‘시야 축구’

―팀을 맡을 때마다 선수 구성이 열악하거나 성적이 극도로 부진했다. 그런 팀들을 이끌고 모두 우승 또는 준우승을 달성한 비법이 뭔가.

“스포츠에서 기술이 발휘되려면 순발력, 체력,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 이걸 총괄하는 게 ‘시야’다. 공을 갖고 있지 않을 때 공이 올 것을 미리 생각하는 판단력이다. 몸을 만드는 건 오래 걸리지만 시야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 선수들에게 ‘모닝과 람보르기니가 육상 경기하면 당연히 람보르기니가 이기지만, 축구에선 모닝이 이긴다’고 말한 적 있다. 축구는 육상처럼 출발선을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닝이 먼저 출발하면 이길 수 있단 의미다. 아무리 빠르고 좋은 차를 가지고 있어도 출발 그 자체를 모르면 출발 할 수 없다. 시야를 찾으면 경기력이 30퍼센트 향상된다.”

―‘시야 축구’를 위해 어떤 식으로 훈련하나.

“시야 축구는 짧은 거리 싸움이다. 5m 빨리 뛰기 위해 육상 코치를 영입했고, 실력이 업그레이드 됐다.”

김 감독은 2015년 12월 경남FC 지휘봉을 잡았다. 경남은 2015년 안종복 전 대표의 심판 매수 사실이 드러나 지난 시즌 승점 10점이 감점된 상태로 시즌을 치렀다. 주축 선수 대부분도 팀을 떠났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팀의 감독을 맡은 이유가 뭔가.

“성인 프로축구 감독은 지도자로서 로망이었다. 당시 경남FC는 해체설이 나오고 있었고, 선수들의 연봉도 실업팀 수준이었다. 대학리그 꼴찌팀을 맡아서 준우승 만든 적도 있으니까, 도전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다.”

―이렇게까지 선전할 것이라곤 자신도 예상 못했을 것 같다.

“노력도 있었지만 절실하게 하다보니 운도 따라줬다.”

경남FC에서 꽃을 피운 말컹이지만, 김 감독은 그를 떠나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해 말 말컹은 꽤 높은 이적료와 연봉을 제안받았지만 구단과 김 감독에 대한 의리를 앞세워 잔류를 선택했다. 그러나 중국 광저우 푸리 구단이 경남에 말컹의 이적료로 400만유로(한화로 52억원)를 제시하면서 말컹의 이적도 기정사실화 됐다.

―말컹이 빠지면 팀의 색깔과 전술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말컹이 빠지면 다른 색깔을 찾아야할 것이다. 좋은 선수를 뽑는 것이 1차적인 목표다.”

김 감독 자신의 앞날에도 관심이 쏠린다. 그도 복수의 중국 팀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알려진 대로, 중국이 그에게 제안한 연봉은 20억~30억원 선이다. K리그 구단이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다.

―향후 거취는 정했나.

“경남FC에서 지도자로서 꽃을 피웠다. 경남에서 ACL를 준비하며 좋은 결과를 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러나 이적은 나 하나만이 아니라 코칭 스태프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상의하고 있는 중이다.”

기대보다 좋은 성적에 다소 들뜰 법 했지만 김 감독은 그저 겸손했고, 자신을 낮췄다.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선 그의 원동력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철학대로 꾸준히 밀고 나가는 우직함이 아니었을까. 프로선수로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은퇴한 그가 지도자로서 피워낼 꽃길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함안/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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