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아시안게임 카누 국가대표 이예린이 6일 경기도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자신의 카누 패들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첫 메달은 농담처럼 찾아왔다. 호기심에 지원했던 용선(드래곤보트)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대표팀에 뽑혔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그렇게 태극마크를 달고 아시안게임에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남북이 단일팀 구성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가슴에 달고 나선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첫 경기였던 여자부 2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예린(23·구리시청)이 처음으로 목에 건 아시안게임 메달이었다.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메달”이었다. 당시 단일팀은 대회를 약 두 달 정도 남기고서야 팀을 이뤘다. 실제로 훈련을 한 시간은 약 한 달뿐이었다. 심지어 북한 선수 중에는 용선이 무엇인지 몰랐던 이들도 있었다. 이예린은 “처음 호흡을 맞춘 우리가 메달을 딸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동시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렇게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어진 500m에서는 금메달까지 따냈다. 팔렘방에 아리랑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이예린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그때 나이가 겨우 18살이었다. <한겨레>가 6일 경기도 하남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만난 이예린은 금메달리스트보다는 평범한 20대 직장인처럼 보였다. “가자!”를 외쳐달라는 요청에 “요즘은 그런 것 안 한다”며 수줍게 웃었고, “이런 인터뷰는 1등과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정말 힘들어서 오늘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운동을 계속해나가는 원동력은 “월급”이라고 단언했다.
물론 월급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운동은 아니다. 그때는 “여자카누를 활성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이 이예린을 달리게 한다. 이예린은 한국 여자카누 ‘1세대’다. 20대 초반 선수가 1세대로 불릴 정도로 여자카누는 한국에서 저변이 좁다. 앉아서 양쪽 패들을 쓰는 카약과 달리 카누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한쪽 패들만 써야 해서, 체력 소모가 극심하다. 한국에서 여성 선수들이 카누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이예린은 그 벽을 넘고 싶다.
이예린(뒷줄 왼쪽 다섯째)을 비롯해 남북단일팀 선수들이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카누 용선 여자 2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기뻐하고 있다. 팔렘방/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자신감도 있다. 이예린은 용선으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지만, 대학생 때 주종목은 카약이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두고 카누로 종목을 바꿨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예린은 국내 무대를 손쉽게 제패했다. 패기를 바탕으로, 그는 카누 선수로서는 첫 출전인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도 다시 한 번 메달을 노린다. 이예린은 “솔직히 메달이 쉽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며 “남은 기간 최대한 몸 상태를 끌어올리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했다.
물론 종목을 바꾸고 어려운 점도 있다. 특히 카누는 혼자서 하는 운동이다. 홀로 배에 오를 때면, 때로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한다.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다. 이예린은 “한 번은 김해에서 훈련할 때 물에 빠졌는데, 배가 흘러내려 가서 바위에 올라 패들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한 적도 있다”며 “훈련을 나갈 때도 가끔은 ‘오늘 내가 죽는 날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노젓기를 멈추지 않는다.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대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이예린은 “출발할 때 앞에 있던 사람도 여유를 부리면 뒤로 처질 수 있고, 뒤따라 가던 사람도 꾸준히 노력하면 앞서갈 수 있는 것이 카누”라며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는 아무도 승패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다른 사람을 너무 의식하기보다는 ‘내 레이스만 해보자’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무엇보다 부상 없이 오래 뛰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이예린. 그는 이날 인터뷰를 마친 뒤 강원도 화천으로 향했다. 대표팀 소집까지 시간이 남았지만, 먼저 가서 개인 훈련을 하기 위해서다. “‘카누’하면 커피를 떠올리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그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쩌면 ‘카누’하면 이예린을 떠올리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최선을 다했기에 찾아왔던 금메달처럼.
이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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