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되겠어요. 그거 러시아나 미국 애들 하는 거예요.”
2000년대 중반 김연아의 후원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던 스포츠마케팅 전문가가 마주했던 말이다. 당시 김연아는 주니어 무대를 통해 서서히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김연아의 잠재력을 설명했으나 대기업 관계자들은 후원 협약을 망설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연아가 2007년 도쿄세계선수권에서 ‘록산느의 탱고’에 맞춰 동메달을 따낸 이후 세상은 달라졌다. 2010 밴쿠버올림픽에서 피겨 금메달이 나왔고, 2014년 소치올림픽에서는 금메달 버금가는 은메달을 추가했다. 김연아가 열어놓은 피겨의 새로운 지평 위에 지금은 세계대회나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을 꿈꾸는 기대주들이 매년 떠오르고 있다.
한 사람의 ‘천재’가 고정관념을 깬 뒤에 봇물 터지듯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사례는 수영에도 있다. 2023 후쿠오카 세계수영선수권 대회에서 한국 수영의 간판으로 활약하는 ‘박태환 키즈’가 그런 사례다.
한국 수영의 대들보 황선우는 이번 대회 자유형 200m에서 동메달을 따내면서, 지난해 부다페스트 세계수영선수권 은메달에 이어 두 대회 연속 입상이라는 신기원을 이뤘다. 루마니아의 다비드 포포비치만 신경 쓰다 영국의 매슈 리처즈와 톰 딘을 놓친 게 아까웠다.
이호준 역시 사상 처음으로 자유형 200m 본선에 올라 6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수영의 자존심을 뽐냈다. 중장거리 전문으로 박태환의 직계 후배가 된 김우민은 자유형 400m 본선의 유일한 아시아 선수로 5위를 차지했고, 자유형 800m에서는 본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박태환의 종전 기록을 깼다.
이들이 유럽 선수들과 비교해서 체격에서 나을 것은 없다. 황선우는 키가 1m87로 크지 않고, 이호준과 김우민도 1m80대 초반이다. 수영할 수 있는 환경이 미국이나 유럽, 호주보다 좋은 것은 아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들에겐 박태환이 있었다. 박태환의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은 당시 수영 관계자들한테서 “인류가 달나라에 간 것과 같다”라는 수사를 들었는데, 그런 ‘전설’을 보고 듣고 자란 박태환 키즈들이 잇따라 나온 셈이다.
여자골프의 경우 박세리 키즈 박인비가 떴고, 박인비 키즈 고진영이 통산 160주 이상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도 비슷한 맥락이다. 남자골프에서도 최경주 키즈인 임성재의 활약은 21살 김주형의 최근 브리티시오픈 준우승까지 이어졌다.
과학세계의 혁명은 기존의 정상과학이 다룰 수 없는 한계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할 때 이뤄진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은 스포츠 무대에서도 한 명의 선구자가 심리적 장벽의 티핑포인트를 넘어설 때와 비교된다. 후배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선례를 기준점으로 해 더 도약할 수 있다.
수영과 피겨 스케이팅에 이어 테니스나 육상에서도 돌파구가 열릴 수 있다. 이미 높이뛰기에서는 우상혁의 존재가 우뚝해 보인다.
후쿠오카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한국 선수들의 선전에서 ‘아시아의 한계’라는 선입견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