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탁 선수가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남자 68㎏급 레슬링 자유형 경기 결승에서 미국의 앤드루 레인 선수와 경기를 하고 있다. 1987 보도사진연감/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토요판] 커버스토리
어느 레슬링키드의 회고
어느 레슬링키드의 회고
시인 서정주는 언젠가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고 노래했지만, 나에게 그 바람은 4년마다 찾아오던 올림픽을 지켜보며 날밤을 새웠던 서울 개봉동 반지하 방의 서늘한 공기가 아니었나 싶다.
30년 전 나를 사로잡은 그 남자
냉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분노한 서구 사회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보이콧한 탓에 내 인생 최초의 올림픽은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이 되고 말았다. 이 올림픽의 중요성을 이제 와 되새기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때 이 나라를 다스리던 이들은 ‘광주의 피’로 권력을 잡은 뒤, 관제 축제 ‘국풍 81’과 <애마부인>(1982), 야구·축구의 프로화 등 3S정책으로 국민의 혼을 빼놓던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언급해 두자. 그런 의미에서 ‘86은 디딤돌, 88은 도약대’라는 구호는 당시 동네 파출소 현관 앞에 걸려 있던 ‘정의사회구현’ 간판의 쌍둥이였으며, 그 때문이라도 1984년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높았고, 높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컬러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80년 12월이고, 삼성전자에서 생산하던 14인치 이코노 컬러텔레비전이 우리 집 안방구석에 자리잡게 된 것은 1984년 올림픽이 열리기 몇달 전이었다. 그해 올림픽 최고의 스타는 누가 뭐라 해도 ‘왕발이 하형주’였겠지만, 내 기억에 강렬히 살아 있는 이는 유도 60㎏급 결승전에서 1분10초 만에 숙적 호소카와 신지에게 통한의 누르기 패를 당했던 열아홉살 김재엽과 지옥 같은 결승전을 마친 뒤 짓누르는 허리 고통을 참으며 시상대에 올랐던 ‘그 남자’ 유인탁이다.
남자 레슬링 68㎏급 자유형 결승전이 열린 1984년 8월11일 오후 미국 애너하임 컨벤션센터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유인탁은 안방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미국의 앤드루 레인을 상대로 어렵게 경기를 풀어가고 있었다. 파죽의 5연승으로 결승전에 진출한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로 변해 있었다. 1차전에서 프랑스의 에리크 브륄롱, 2차전에서 인도의 싱, 3차전에서 서독의 에르빈 크노스프를 가볍게 테크니컬 폴로 따돌린 유인탁은 4차전에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게 된다. 상대는 1982년 인도 뉴델리아시아경기대회에서 그에게 2-3 통한의 패배를 안겼던 일본의 가미무라 마사카즈. 그는 귀국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경기를 앞두고 긴장돼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고 말했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고국의 4천만은 만약에 진다면 현해탄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눈빛으로 유인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인탁은 이 경기에서 신승을 거두지만, 허리 부상을 당해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어진 앤드루 레인과의 결승전. 유인탁은 1피리어드 1분10초 만에 깨끗한 메어 던지기로 3점을 얻어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이후 속수무책으로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기 시작한다. 곧바로 상대에게 다리를 잡혀 1점, 2분께 다시 허리 공격을 당해 1점, 그리고 다시 옆굴리기를 당해 3-4로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야, 이 새끼야, 정신 똑바로 차려!” 서울 개봉동 변두리의 좁다란 골목 틈에서 안타까운 사내의 고함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후 마지막 힘을 짜낸 유인탁은 상대에게 옆굴리기 공격을 성공시켜 5-4로 앞선 채 1피리어드를 마쳤다.
그리고 지옥 같은 후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탁은 30초 만에 상대의 머리에 턱을 받히는 부상을 당했고, 1분33초에는 소극적인 경기를 벌인다는 이유로 경고를 받았다. 다시 2분께엔 다리에 쥐가 났고, 시합 종료 10초 전 상대에게 등을 허용해 5-5 동점으로 경기가 끝났다. 이제 어찌 되나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찰나, “국민 여러분 기뻐해주십시오”라는 캐스터의 음성이 전해져왔다. 동점으로 경기가 끝나면 더 큰 기술을 성공한 선수가 이긴다는 얘기였다.
영웅들의 탄생과 빠떼루 아저씨
그러나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경기가 아닌 시상식이었다. 시합을 마친 뒤 극심한 허리통증을 호소한 유인탁이 휠체어에 의지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제대로 설 수도 없는 고통을 참아내며, 시상대 제일 꼭대기에 오른 투박한 남자의 얼굴을 보니, ‘스포츠의 위대함’이라는 말로는 뭔가 부족한 착잡하고 씁쓸한 어떤 감동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초반 메어 던지기로 승기!”(<조선일보> 8월13일치 호외) 감격한 국내 언론들은 호외까지 찍어내는 기염을 토했고, <에이피>(AP)와 <로이터> 통신 등 외신들도 유인탁을 미국의 육상영웅 칼 루이스 등과 함께 이번 올림픽을 빛낸 영웅으로 선정하며 그의 투혼에 찬사를 보냈다.
다시 4년이 흘렀다. 그사이 대한민국은 3저 호황을 통해 고도성장을, 87년의 뜨거운 여름을 통해 민주화를 이뤄냈다. 무엇보다 행복했던 것은 우리 집도 도시 서민의 내 집 마련의 꿈을 위해 조성된 상계동 아파트촌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88년 서울올림픽이 시작됐지만, 왠지 모를 불안한 공기가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대회 나흘째가 되도록 기대하던 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닷새째인 9월21일. 그레코로만형 74㎏급 결승전에 나선 서른살 노장 김영남의 상대 이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소련의 투를리하노프였다.
지금껏 많은 스포츠 경기에서 수많은 전광석화의 순간들을 지켜봐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종료 58초를 남겨 놓고 터진 김영남의 2점짜리 역전 ‘목감아 돌리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장면은 자유형 82㎏급에서 금메달을 따낸 한명우의 붕대 투혼과 함께 한동안 방송에 단골로 등장했다. 이어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는 박장순과 안한봉이라는 순박한 얼굴의 청년들이 금메달을 땄고, 1996년 시드니와 2000년 애틀랜타에서는 한국 체육계가 배출한 진정한 레전드 가운데 하나인 심권호가 올림픽 2회 연속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운다. 한국 레슬링은 그 무렵 “지금 빠떼루(파르테르) 줘야 함다”, “땀나기 전에 빨리 옆굴리기 들어가야 함다”라는 주옥같은 유행어를 낳은 ‘빠떼루 아저씨’(김영준 레슬링 해설위원)와 함께 절정에 달했다가 서서히 내리막을 걷게 된다. 한국 레슬링의 전성기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에 재임하던 기간(1982~1997년)과 절묘하게 겹친다는 점도 흥미롭다. 2002년 월드컵 이후로는 가뭄에 콩 나듯 레슬링이 중계돼도 채널을 돌리게 됐고, 평생 잊어버릴 것 같지 않던 그 감격의 시간들도 빚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져 갔다.
어찌 보면, 레슬링은 진정 한국적인 스포츠이기도 했다. 가난하던 산업화 시절 우리가 따낸 레슬링 금메달은 세계를 상대로 압도적인 기량을 뽐내며 따낸 성과가 아닌 역경과 고난을 아슬아슬하게 이겨낸 행운의 메달들이었다. 1976년 몬트리올에서 터진 양정모의 금메달은 미국의 강호를 폴로 이긴 탓에 숙적 오이도프(몽골)에게 패하고도 따낸 불완전한 금메달이었고, 1984년 김원기와 유인탁의 금메달도 동점으로 경기를 끝낸 뒤 좀더 큰 기술을 성공했다는 이유로 획득한 행운의 금메달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에게 ‘헝그리 정신’이 사라진 탓인지 알 수 없지만, 1988년 9개로 정점을 찍었던 한국 레슬링의 메달 수는 2000년까지는 4개를 유지하다가 2008년 처음으로 금맥이 끊겼고, 2012년 김현우의 부상 투혼에 힘입어 금메달 하나를 가까스로 수확하는 데 그쳤다. 역대 올림픽을 통해 레슬링이 건져 올린 메달은 금메달 11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3개로 이에 필적할 만한 종목은 태권도, 양궁, 유도, 쇼트트랙 정도밖에 없다.
한국 효도종목의 씁쓸한 내리막
레슬링의 몰락은 어느 정도 예고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레슬링은 완벽한 기술 하나로 승부가 결정되는 유도나 4점짜리 얼굴 공격으로 역전이 가능하도록 혁신을 이뤄낸 태권도만큼 흥미로운 종목은 아닐 수 있다. ‘라이벌’ 유도는 하형주-김재엽-전기영-이원희-최민호-김재범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을 배출해왔지만, 레슬링이 내놓을 수 있는 대중적인 스타는 심권호가 유일하다. 한국 레슬링계나 국제레슬링연맹(FILA)이 자기 혁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도 미지수다. 한국만큼이나 레슬링의 탈락을 아쉬워하는 일본 언론도 ‘위기감이 결여된 전통경기’(<아사히신문> 13일치 19면)라는 기사에서 올림픽 정식종목 탈락이라는 초대형 악재에 직면한 레슬링계의 무사안일을 질타하고 있다.
그러나 허리 통증을 참으며 시상대에 서고(유인탁), 머리를 네 바늘이나 꿰매는 붕대 투혼을 발휘하며(한명우) 까맣게 부풀어 오른 눈으로 상대의 어깨를 파고 태클을 피한(김현우) 사내들의 모습을 2020년 올림픽에서 볼 수 없다는 상황은 너무 끔찍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고대 그리스인들로부터 시작된 순정한 열정의 순간들은 이대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39살 노총각, 한가위 공개구혼장 그 후…
■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이 말 한마디가…
■ MB “내 덕분에 한국 세계중심 됐다” 자화자찬 ‘구설’
■ 삼성, 불산가스 유출 없었다더니…거짓말 ‘들통’
■ 괴물로 살아야 했던 여자…153년만의 장례식
■ 39살 노총각, 한가위 공개구혼장 그 후…
■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이 말 한마디가…
■ MB “내 덕분에 한국 세계중심 됐다” 자화자찬 ‘구설’
■ 삼성, 불산가스 유출 없었다더니…거짓말 ‘들통’
■ 괴물로 살아야 했던 여자…153년만의 장례식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