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여명의 관중이 숨을 죽이고 경기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요정처럼 귀여운 소녀를 바라본다. 러시아어로 사랑을 뜻하는 ‘류포프’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이내 연 하나에 매달려 하늘로 날아올라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여행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야심차게 기획한 초대형 이벤트이자 지구촌 최대 겨울 축제인 제22회 소치 겨울올림픽이 8일 새벽(한국시각) 러시아 소치의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화려하게 개막했다. 23일까지 ‘뜨겁고, 차갑게, 그대의 것’(Hot, Cool, Yours)이라는 슬로건 아래 17일간의 열전의 막이 오른 것이다.
러시아는 1980년 모스크바 여름올림픽을 치른 뒤 34년 만에 두번째 올림픽을 연다. 모스크바 대회는 사상 첫 공산권 국가에서 열린 올림픽으로 관심을 받았지만, 1979년 일어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미국·서독·한국 등 67개국이 불참한 ‘반쪽짜리’ 대회였다. 이번 소치 올림픽에는 겨울올림픽 역대 최대인 88개국 28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러시아는 이번 소치올림픽을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다시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상징으로 대내외에 보여주고 싶어했다. 푸틴 대통령은 올림픽 준비에 총 500억달러(약 54조원)를 쏟아부었다. 이는 2006년 토리노 대회의 41억달러(4조4000억원)의 11배에 달하며, 기존 최고였던 2008 베이징올림픽의 425억달러(46조 원)를 훌쩍 뛰어넘는 액수다.
8일 열린 개막식은 그런 러시아의 야심을 응축시킨 무대였다. ‘러시아의 꿈’을 주제로 러시아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모았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문학, 음악, 발레 등이 개막식 프로그램의 뼈대를 이뤘고, 러시아의 광활한 대지와 다양한 문화, 과거 러시아 제국의 전성기, 발전된 현대 러시아 등이 각종 조형물과 퍼포먼스로 시각화됐다.
소녀 류보프의 여행으로 시작된 개막식은 류보프가 우랄산맥, 바이칼호수 등을 거쳐 시베리아 추코트카에 닿자 150개 민족의 전통 의상을 입은 500여 명이 등장해 퍼포먼스와 함께 19세기 작곡가 알렉산더 보로딘의 ‘이고르 공’을 제창하며 러시아의 광활함을 뽐냈다. 선수단 입장이 끝난 뒤에는 혹독한 겨울 속에서 삼두마차가 태양을 끌고 와 봄을 부르는 등 러시아의 부활을 상징하는 공연이 이어졌다.
8일 오전(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의 피시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제22회 소치 동계올림픽 개회식이 열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명작 ‘전쟁과 평화’ 속 장면이 우아한 무용과 발레로 표현되고 있다. 러시아의 꿈을 주제로 한 이번 개회식은 유라시아 대륙의 드넓은 풍경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화려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됐다. 대한민국 선수단은 오는 23일까지 열리는 이번 동계올림픽에 선수 64명과 임원 49명 등 총 113명의 선수단을 파견, 금메달 4개 이상을 획득해 3회 연속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연합뉴스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 제국의 화려한 번영기를 보여주기도 하고,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명작 ‘전쟁과 평화’ 속 장면을 무용과 발레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과 현대 러시아의 발전상도 표현됐다. 마지막으로는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백조의 호수’의 선율에 맞춰 화려한 ‘평화의 비둘기’ 공연이 이어지며 개막식은 절정에 이르렀다. 개막식을 지켜본 관객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환상적이었다”며 감탄을 마지 않았다.
하지만 올림픽의 성공 여부는 더 지켜봐야 될 듯하다. 개막식 프로그램이 보여준 대로 러시아가 부활했고 미래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더 지켜봐야될 듯하다. 개막식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비롯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40여개국 정상들과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 요아힘 가우크 독일 대통령 등 서방 세계 일부 정상들은 일찌감치 예고한 대로 불참했다. 이는 러시아의 ‘반(反) 동성애법’ 제정, 인권 문제등에 대한 항의 표시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또 테러에 대한 우려도 한몫했다. 우리나라도 박근혜 대통령 대신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행사를 지켜봤다.
러시아는 3시간여에 걸쳐 전 세계에 ‘강한 러시아’를 알리는 데 모든 기술과 열정을 다했지만 정작 인권이나 테러 등의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이다. 미국의 <파이낸셜 타임즈>는 하루 전인 7일 “푸틴 자신이 전면에 나서 올림픽 유치와 홍보에 열성을 다한 만큼 올림픽 성공 여부가 정치 생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역대 최대의 예산이 투입된 이번 올림픽이 푸틴의 야심을 채워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소치/허승기자 rai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