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스포츠팀 선임기자 lcy100@hani.co.kr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27)가 지난 10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일본 피겨스케이트 스타였던 아사다의 은퇴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습니다. 스포츠 기자인 저도 그날 사람면에 그의 은퇴를 다뤘습니다. 여기서 굳이 ‘김연아의 라이벌’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뭘까요. 제가 판단하는 아사다 마오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입니다. 일본인 아사다 마오는 동갑내기인 김연아와 함께 주니어 때부터 여자피겨스케이팅을 양분해왔습니다. 끝내 김연아를 넘지 못했고, 못다 이룬 올림픽 금메달을 위해 2018 평창겨울올림픽을 준비했지만 옛 기량을 되찾지 못하자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아사다가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해설가로 변신할 것이라는 보도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평창올림픽 홍보대사인 김연아와 만날 가능성이 높아져 ‘세기의 라이벌’은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김연아와 아사다의 관계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주니어 때 아사다가 앞섰지만 성인무대 들어서면서 김연아가 아사다를 압도했습니다. 두 사람이 14살이던 200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주니어그랑프리 파이널 때만 해도 아사다는 김연아에게 넘기 힘든 벽이었습니다. 점수 차도 많았지만 아사다가 일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성장하고 있던 반면 한국은 당시 피겨스케이팅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지독한 훈련으로 아사다와의 격차를 좁혀간 김연아는 3년 뒤인 2007~2008 시즌부터 아사다를 넘어섰습니다. 두 사람의 운명은 2010년 밴쿠버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김연아가 한국에 첫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안기며 겨을스포츠의 상징으로 훨훨 날았다면, 아사다는 김연아의 그림자에 갇혔습니다. 아사다는 2014년 소치겨울올림픽에서도 실수를 연발하며 6위에 그쳤고, 부상과 후배들의 성장으로 평창올림픽 출전마저 불투명해지면서 그의 오랜 꿈을 접었습니다. “김연아와 서로 좋은 자극을 주고받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아사다 마오가 12일 일본 전역으로 생중계된 공식 은퇴식에서 언급한 말입니다. 아사다야말로 김연아의 가장 큰 도우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도 조연과 악역이 필요하듯 스포츠에는 라이벌이 필요합니다. 드라마 속 악역이 주어진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스포츠에서 라이벌은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을 성장시켜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인공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시나리오를 뒤집어엎기도 합니다. 스포츠에서는 종종 명승부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표현합니다. 이달 초 프로배구 V리그 남자부 챔피언결정전에서 본 장면입니다. 원정팀인 현대캐피탈이 대한항공 홈구장인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동안 대한항공 선수들은 짐을 챙겨 체육관 복도를 따라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그날 우승 축하연을 기대하며 대여섯살짜리 아들과 함께 온 선수도 있었습니다.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쓸쓸해 보였던 것은 저의 착각일까요? 스포츠는 극적인 승리와 짜릿한 역전에 환호하지만 그 뒷면에는 언제나 극적일수록 더욱 아픈 패배의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높은 벽이라고 여겼던 아사다를 넘어 한국 피겨스케팅에 새 장을 연 김연아에 환호했다면, 일본인들은 김연아에 가려 끝내 꽃피지 못하고 은퇴한 아사다 마오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스포츠 기자들은 일반적으로 갈등에 주목하고 때로 조장하기도 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대결, 적으로 만난 형제·자매, 오랜 절친의 숙명의 대결 등을 강조합니다. 아무렴, 갈등과 긴장 없는 스포츠는 재미가 없습니다. 팀 스포츠에서는 규정을 바꿔서라도 승부를 더욱 치열하게 만듭니다. 프로스포츠에서 도입하는 드래프트는 자유경쟁과 선수들의 선택권을 제한하지만 유지되고 있습니다. 승부차기는 너무 잔인하다는 말도 듣지만 여전히 유지됩니다. 기쁨과 좌절이 교차하는 흥분상태가 우리가 스포츠를 관람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스포츠를 즐기는 데 굳이 심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기에 몰입하고 선수 또는 팀과 완벽히 하나가 돼서 울고 웃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훌륭한 팬입니다. 다만, 라이벌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사람을 미워할 필요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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