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선수(오른쪽)가 24일 저녁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후 정재원 선수와 세러머니를 하고 있다. 강릉/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3월1일 방송된 제이티비시(JTBC) ‘썰전’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가 남자 매스스타트 국가대표팀의 ‘탱크 논란’을 거론했습니다. 앞서 〈서울신문〉은 과거 이승훈 선수의 페이스메이커였던 선수의 부모를 인터뷰하며 이번 올림픽에서 이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데 정재원 선수가 ‘탱크’(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조심스레 제기한 바 있습니다. 유 작가는 “(정재원 선수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라면서도 “국적이 같다고 해서 둘 이상의 선수가 역할을 나눠서 한 선수가 다른 선수의 메달 획득의 밑받침을 해줘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유 작가는 “올림픽에서의 경쟁은 개인이나 팀의 경쟁이지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다”라며 “엄밀하게 말하면 대회 헌장에 어긋나는 일”이라고도 밝혔습니다. 논란은 계속됐습니다. 이튿날인 2일 매스스타트 종목에서 페이스메이커였던 전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박석민은 엠비시(MBC)의 ‘아침발전소’에 출연해 "나는 던지기 선수였다. 일방적으로 페이스메이커로 활용됐다"며 "교수님이 다른 선수가 4관왕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페이스메이커를 하라고 일방적으로 지목했다. 메달 주자는 휴식과 훈련을 병행했지만 저는 쉬는 시간에도 다른 선수들의 훈련을 도와줘야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박 선수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이승훈 선수와) 남자 매스스타트 연습을 한 뒤에 우리 둘만 따로 빠져나와 (이승훈 선수가 쉴 때) 남자팀 추월과 여자팀 매스스타트 팀, 여자 장단 거리 연습 경기를 끌어줬다”고도 말했습니다. 박 선수는 결국 몸이 망가지고 기록도 고등학교 때보다 안 좋아져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고 주장했습니다.한 개인이 다른 선수의 성과를 위해 희생당한 게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팀플레이로 인해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팀플레이 자체에 대한 비판은 쟁점이 다른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박권일 사회비평가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개인전의 성격이 강한 세계 최대의 자전거 대회 ‘투르 드 프랑스’ 역시 “9명의 팀 동료들이 에이스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경기가 흘러간다”며 팀플레이 자체를 비난할 순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박 씨는 “투르 드 프랑스에서 에이스의 기량이 아무리 출중해도 팀 동료의 협력이 없으면 우승은 불가능하다”라며 “공기저항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매스스타트나 사이클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스가 동료의 헌신으로 힘을 비축하고 승부처에서 단번에 결정짓는 형태의 전략이 유효하다. 따라서 매스스타트 경기에서 선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비난하긴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박 씨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매스스타트와 사이클이 똑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두 종목 모두 팀플레이를 하기에 적합한 규정과 경기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고 밝혔습니다.
‘썰전’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 사진 제이티비시 갈무리.
실제로 최대 28명의 선수가 일제히 출발하는 매스스타트에서는 페이스메이커의 존재가 결정적입니다. 송주호 한국스포츠개발원 선임연구원은 “앞 선수의 뒤에 붙어 달리는 경우 저항이 어느 정도 감소하는지 아직 정확한 수치를 측정해보진 않았다”라면서도 “매스스타트에선 선두의 뒤에서 바람의 저항을 받지 않고 달리며 체력을 축적하다 적절한 시점에 스퍼트하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매스스타트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선수의 뒤에 바짝 붙었을 때 어느 정도의 이득을 보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평균속력이 비슷한 사이클 경주(약 54km/h)에서 한데 몰려다니는 무리 안에 있는 자전거가 공기저항을 30% 이상 적게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른 선수를 바람막이 삼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이는데, 그러다 보니 우스운 광경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이번 결승에선 초반에 선두로 나섰던 스벤 크라머가 직선구간 트랙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위치를 바꾸자 다른 선수들이 대열안에 남기 위해 지렁이처럼 열을 지어 꿈틀거리며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페이스메이커는 적극적으로 경쟁 선수들의 체력을 고갈시키기도 합니다. 페이스메이커가 갑자기 속력을 올리거나 떨어뜨리면 자동차가 급발진을 자주 할수록 연비가 낮아지듯이 경쟁 선수들의 체력이 빨리 바닥납니다. 그 사이 페이스메이커의 도발 작전을 알고 있는 에이스 선수는 후미에서 안정적인 스케이팅을 하며 체력을 비축할 수 있습니다. 이번 경주에서 네덜란드의 스벤 크라머가 후반에 들어서 갑작스레 속력을 올리며 拘 페르베이의 막판 질주를 견인한 것이 이러한 작전입니다. 또한 경기 초반에 선두 그룹이 앞서 나갈 때 후미 그룹의 전방에서 바람을 맞으며 적절한 선두와의 격차를 조절하는 것 역시 페이스메이커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이번에 정재원 선수가 보여줬던 것처럼 말입니다. 송주호 한국스포츠개발원 선임연구원은 〈한겨레〉에 “매스스타트는 올림픽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종목이라 일반적인 작전이랄 게 없다. 선수들이 상대 선수의 움직임을 봐가며 작전을 구사해야 한다”며 “특히 같은 날 6400m 두 경기를 치르기 때문에 체력 안배를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뉴질랜드, 덴마크, 네덜란드, 한국, 미국, 일본의 선수들이 2명씩 각 조에 갈려서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덴마크, 네덜란드, 한국만 두 선수 모두 결승에 진출했는데, 이중 한국과 네덜란드의 선수가 금과 동을 가져간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송 연구원은 “매스스타트는 스피드스케이팅에 쇼트트랙을 접목해 올림픽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된 종목”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가 강세를 보이는 쇼트트랙의 경우 같은 국적의 선수들이 같이 레이스를 벌일 때면 종반까진 다른 국가를 견제하며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에이스만을 위해 다른 선수들이 희생당하고 박 선수의 표현대로 ‘던져지는’ 시스템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이 과정이 선수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감독이나 팀의 직접적인 강요나 묵시적인 압박에 의한 것이라면 더욱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박권일 씨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2010년대 본격화된 크리스토퍼 프룸(투르드 프랑스 4회 우승자)의 전성기를 받쳐준 최대의 조력자 미켈 란다는 기꺼이 수년간 프룸의 도움선수로 희생했지만, 자신이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자 몸값을 높여 다른 팀으로 옮길 수 있었다”라며 “특정 세력이 장악한 국가대표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국가대표팀 안에서는 에이스의 교체가 어려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적절한 포상 역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메달 주자의 전성기가 지날 때까지 도움선수는 빙판 위에서 대가 없는 희생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