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윤기 뒷선수 시점’ 연작. 곽윤기 인스타그램 갈무리
능숙하고 현란한 레이스였다. 지난 11일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준결승 2조 경기.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두고 선두 네덜란드가 코너에서 열어준 공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파고드는 깔끔한 인코스 추월로 한국은 조 1위 결승행을 확정지었다. 추월의 주인공은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중계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가슴을 치고 포효했다. 미리 카메라 위치를 숙지해놓은 듯한, 화려한 세리머니였다. 한국 쇼트트랙 맏이 곽윤기(33·고양시청)의 ‘라스트 댄스’는 그렇게 시작됐다.
곽윤기가 11일 베이징 서우두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준결승전에서 결승선을 통과한 뒤 기뻐하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곽윤기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그의 ‘핫핑크’ 머리색만큼이나 뜨겁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4위로 통과하며 계주 전문 요원으로 대표팀에 승선한 곽윤기는 겨우 한 경기를 뛰었을 뿐이지만 매 순간 화제를 몰고 다닌다.
개막식 선수단 입장에서는 기수를 맡아 같은 소속팀 후배 김아랑(27)과 깃대를 맞잡고 폴짝폴짝 뛰는 동작으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12일에는 레이스 도중 다리 사이로 뒷선수의 움직임을 살피는 노련한 기술을 희화화한
‘곽윤기 뒷선수 시점’이라는 팬이 그린 그림을 본인이 직접 인스타에 올려 사람들을 ‘빵 터지게’ 했다. 연습 도중 직접 그림의 앵글을 재현한 영상을 올린 건 덤이다.
‘곽윤기 뒷선수 시점’ 연작. 곽윤기 인스타그램 갈무리
이 순발력과 소통력은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솜씨다. 곽윤기는 3년차 유튜버이기도 하다. “올림픽 시즌 4년마다 소통하는 기회가 너무 제한적이라 시작하게 됐다”는 그의 유튜브 채널(꽉잡아윤기)에는 다양한 영상이 올라온다.
직접 쇼트트랙 월드컵이나 선발전 영상을 틀어놓고 선수들의 전략과 움직임을 분석해주는
‘쇼트트랙 연구’부터 설을 맞아 베이징 선수 숙소에서 후배에게 절을 받고
세뱃돈을 쥐여주는 풍경, 백신접종을 위해 두 달 만에 선수촌을 벗어나 서울로
외출 나가는 브이로그까지 빙상장 바깥의 모든 일상은 콘텐츠가 된다.
최근에는 작년 월드컵 기간 숙소에서 만난 네덜란드 선수들에게 드라마
<오징어게임> 속 달고나 게임을 시켜보는 영상이 올라왔다. 13일 현재 해당 영상의 조회수는 246만에 이른다. 채널 구독자는 이달 초 16만8000명에서 57만3000명(13일 오후 1시 기준)으로 열흘 만에 3배 넘게 뛰었다.
곽윤기가 스케이트를 신지 않은 곳에서 보여주는 미디어 활약상은 그간 파벌 다툼과 각종 구설수로 바람 잘 날 없었던 한국 쇼트트랙의 어둠을 걷어내고 있다. 곽윤기는 틈 나는 대로 빙상장이나 오륜 조형물 앞에서 후배들 사진을 찍어주고 농담과 너스레로 분위기를 띄운다. 긴장을 풀어주면서 추억까지 만들어주려는 선배의 큰그림이다. 이 큰그림 가운데 일부는
다시 유튜브에 올라온다.
베이징 대회는 곽윤기의 세 번째 올림픽이다. 2010 밴쿠버겨울올림픽에서 곽윤기는 지난 준결승과 꼭 닮은 추월로 마지막 두 바퀴에서 4위까지 쳐졌던 한국의 순위를 2위로 끌어올리며 은메달의 주역이 됐다. 시상대에서는 걸그룹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시건방춤’으로 올림픽 데뷔를 자축했다.
그는 대회에 앞서 “베이징은 유튜버 최초 메달리스트가 되고 싶은 대회”라고 말했다. 곽윤기의 마지막 질주는 16일 밤 9시30분 남자 계주 결승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곽윤기는 금메달은 물론이고 골드버튼(100만 구독 채널에 주는 상)까지 노린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