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 니스카넨(핀란드·오른쪽)이 지난 11일 중국 장자커우에서 열린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남자 15㎞ 결승에서 1등으로 골인한 뒤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한 카를로스 퀸타나(콜롬비아)를 반겨주고 있다. 장자커우/EPA 연합뉴스
비키 라이트(29·영국)는 1월 초만 하더라도 스코틀랜드 포스밸리왕립병원에 있었다. 코로나19가 휩쓴 팬데믹 시대, 생과 사가 오가는 그곳에서 라이트는 간호사로 환자들을 돌봤다. 그리고,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폐막을 몇 시간 앞둔 20일. 그는 올림픽 시상대 맨 위에 동료들과 함께 섰다. 팬데믹 시대 2년여 동안 최전방에 있던 라이트는 여자 컬링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와 한 인터뷰에서 라이트는 말했다. “스포츠처럼 (삶에도) 좋은 날이 있고, 나쁜 날도 있어요. 얼음 위에 훌륭한 동료가 있듯이 지금 같은 시대에도 함께할 사람들이 있다면 해결책은 있을 거예요.”
영국 여자 컬링 부주장인 비키 라이트가 20일 베이징 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컬링 여자 단체전 일본과 결승에서 스톤을 굴리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겨울올림픽이 막을 내린다. 편파 판정, 오심, 약물 등의 이슈가 있었지만 라이트처럼 스포츠, 그 자체의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 올림픽 영웅들도 있었다. 그들이 써내려간 서사는 희망, 존중, 우정 그리고 화합의 이야기였다.
흑인 여성 최초로 스피드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가 된 에린 잭슨(30·미국)은 애초 500m에 출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국 대표팀 동료 브리트니 보(34)가 자신의 출전권을 양보하면서 올림픽의 새 역사가 만들어졌다. 스노보드 남자 슬로프스타일 금메달리스트 맥스 패럿(28·캐나다)은 암(호지킨 림프종)을 극복한 인간 승리 신화를 썼다. 6개월 동안 12차례 화학요법을 받은 뒤 눈밭으로 돌아와 2년7개월 만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패럿은 “투병 기간 배운 게 많다. 예전보다 두 배 더 웃으려고 한다”고 했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에서 카이 페르베이(28·네덜란드)는 성적보다는 매너를 택했다. 인코스, 아웃코스 교차 구간에서 함께 달리던 로랑트 뒤브뢰유(30·캐나다)와 충돌 위험이 있자 스스로 레이스를 포기하는 선택을 했다. 페르베이의 희생 덕에 은메달 질주를 할 수 있던 뒤브뢰유는 경기 뒤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며 감격해 했다.
황대헌(23)과 박지우(24)가 보여준 경기 매너도 훈훈했다. 황대헌은 쇼트트랙 남자 500m 준결승 때 추월을 시도하다가 삐끗했는데 이때 스티븐 뒤부아(25·캐나다)도 영향을 받아 3위로 처졌다. 황대헌은 곧바로 뒤부아에게 다가가 사과를 했다. 뒤부아는 구제돼 결승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박지우는 매스스타트 여자 준결승 때 러시아 선수와 함께 넘어졌는데 이후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줬다.
박지우(왼쪽)가 19일 중국 베이징 국립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오벌)에서 열린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매스스타트 준결승에서 함께 넘어진 러시아올림픽위원회(ROC) 선수의 팔을 잡아 일으켜 준 뒤 함께 달리고 있다. 베이징/연합뉴스
크로스컨트리에서는 꼴찌를 향한 1등의 마음씀씀이가 돋보이는 장면이 있었다. 남자 15㎞ 클래식 결승에서 리보 니스카넨(30·핀란드)은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한 뒤 20여분 동안 나머지 선수들이 모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당시 경기장 기온은 영하 8도 안팎으로 아주 추웠다. 카를로스 퀸타나(36·콜롬비아)가 마지막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자 그는 퀸타나를 껴안으며 웃으면서 반겨줬다. 니스카넨은 “모두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우리 모두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리아 부로프(러시아올림픽위원회·왼쪽)가 16일 밤 중국 허베이성 장자커우 겐팅 스노우파크에서 열린 2022 베이징겨울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에어리얼 결승이 끝나고 동메달이 확정된 뒤 은메달리스트 올렉산드르 아브라멘코(우크라이나)를 껴안고 있다. 아브라멘코의 은메달은 이번 대회 우크라이나가 딴 첫 메달이다. 장자커우/AP 연합뉴스
겨울올림픽 최고의 장면은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에어리얼 결승에서 나왔다. 우크라이나의 올렉산드로 아브라멘코(34)가 은메달을 확정 지은 뒤 국기를 흔들며 환호하자 3위에 오른 일리야 부로프(30·러시아)가 그를 축하하면서 뒤에서 껴안았다. 두 나라의 전쟁 발발 위기에서 보여준 스포츠 동료애의 힘이었다.
김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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