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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조현이만난사람

김기석목사, 타자와 잘 지내는 법

등록 2021-12-25 07:59수정 2022-01-19 20:03

접촉은 줄고, 접속은 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장기화해 활동량과 대면 접촉이 줄면서 활동반경은 줄고, 불안과 우울 지수는 높아졌다. 코로나19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지나친 불안과 우울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한 때다. 똑같은 환경이지만 평안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지혜를 찾아 <한겨레>가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 시리즈를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진행한다. 여섯번째 멘토는 서울 용산 청파동 청파교회 담임 김기석(64) 목사다.

김기석 목사. 사진 조현 기자
김기석 목사. 사진 조현 기자
그는 뜨는 목회자다. 1997년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청파교회 담임을 맡았을 때 250명가량이던 신자는 현재 1천명 이상으로 늘었다. 그러나 청파교회는 2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이렇게 성장하는 교회라면 건물을 올려도 몇번은 올렸겠지만 청파교회는 그대로여서 신자가 더 들어찰 공간도 없다. 그가 정작 뜨는 곳은 방송과 온라인에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그의 온라인 설교엔 청파교회 신자보다 5~10배 많은 이가 몰려든다. 그가 출연하는 방송 <잘 믿고 잘 사는 법>(CBS)은 유튜브 100만 조회수가 예사일 정도로 인기다. 이 정도면 대형 교회 하나쯤 금방 세울 부흥사가 될 법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소유 집 한칸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부흥을 꾀하기보다는 쉼과 여백을 중시한다. 외부에선 잘 모르지만 신부전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면서도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잃지 않은 그다. 지난 13일 휘황찬란한 성탄 트리보다는 말구유처럼 소박한 청파교회에서 김 목사를 만났다.

그의 메시지는 강하지만,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그의 설교 논지는 한결같다. 돈과 성공에 집착한 기복적 냄비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는 상관없다는 일침을 잃는 법이 없다. 그는 우리 편과 남의 편을 가르고, 배타하고, 적대시하고, 왕따시키고, 차별하는 것과 예수의 삶은 반대라고 말한다. 예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장벽철폐자라는 것이다.

“우린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다. 모든 먹거리와 교통수단 등 누군가의 수고로 내가 살아가고 있다. 타자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타자를 무찔러야 할 경쟁 대상으로 볼 것인지, 아름다운 삶을 위한 선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태도가 행불행을 결정한다.”

그는 타자와 잘 지내기 위해서는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것을 권유한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고통에 응답해야 한다고 여기고 반응하지 않으면 속상해한다.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을 만나면 내 몸과 마음에도 상처가 많아진다. 반면 만나면 편안한 사람이 있다. 고집스럽지 않아 자아로 남을 찌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타자들도 나 못지않게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타자의 시린 마음을 감싸주는 삶으로 바뀌어간다.”

김 목사는 자본의 낚시에 걸려들지 않는 것을 참된 신앙과 참행복의 해법으로 제시한다. 스타들을 내세운 상품 광고의 매혹과 그걸 갖지 못하면 행렬에서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결합시켜 소비사회의 노예가 되게 하는 자본에 끌려다니다가는 몸도 마음도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꽃 한송이와 별을 보며 경탄할 수 있는 사람은 남의 명품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면이 헛헛하면 욕망의 포로가 된다. 한번뿐인 인생을 그 욕망에 끌려다니며 늘 지는 싸움만 하고 산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자본은 누군가를 카피하도록 만든다. 유대인 신학자 요슈아 헤셀은 ‘우린 오리지널하게 태어났는데, 카피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그게 바로 타락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내적 힘이 있어야 하는데 카피하며 살아가니 말이다.”

김 목사는 “신앙은 자본이 이끄는 돈과 소비 중심의 삶과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그는 “돈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안겨주지만 깊은 행복감을 주지는 못한다”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다른 이들과의 깊은 결속과 사랑에서 비롯되는데, 돈은 그것을 얻기 위해 인간적 결속과 사랑을 희생케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너무 눈앞의 것만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멀리 보라”고 권유한다.

“현실에 압도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신앙은 현시점만이 아니라 좀 더 높은 데서 바라보게 한다. 그러면 전망이 달라지고, 일상의 자잘한 일 때문에 감정이 격동하는 일이 줄어들어 성공했다고 날뛰지 않고, 실패했다고 세상이 무너진 듯 좌절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는 “매사 의미 있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친구들과 마음의 짐을 풀어놓고 농담하고, 수다 떨고, 킬킬거리며 숨구멍을 열어주라”고 말한다. 우정의 연대가 더욱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김기석 목사. 사진 조현 기자
김기석 목사. 사진 조현 기자
―어떤게 좋은 관계인가?

“성경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한다. 우리는 너무 높은 자리에 앉아 남을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은 똥통에 빠진 사람을 볼 때 세 부류가 있다고 했다. 더럽다고 외면하고 가는 사람, 손을 잡고 끌어내는 사람, 함께 똥통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자신이라면 거기 같이 들어가겠다고 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듯 하는 것보다 ‘입장의 동일함’이 중요하다.”

―제어되지 않는 욕망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수면으로 올라와 휘파람처럼 길게 내는 ‘호이~ 호이~’ 소리를 숨비라고 한다. 해녀들이 물속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하고 욕심을 내서, 숨을 내쉬지 못하고 삼키는 순간 죽음에 이른다. 과도한 욕망에 시달리다 보면 자유도 행복도 없다. 여우가 울타리 안의 포도를 먹고 싶지만 접근할 수 없을 때, ‘저 포도는 시어서 못 먹어’라고 한 것을 ‘슬픈 자기위안’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위험에 빠지지 않는다.”

―행복의 비결은 뭔가?

“행복해지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된다. 산에 올라갈 때 다리가 아파 ‘내가 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하다가도 고갯마루에 올라선 순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아, 이걸로 됐어’라며 자족한다. 산에 오르듯 삶도 힘든 게 당연한 것인데 힘들지 않으려고만 하니 더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는 게 좋다. 오히려 조금 덜 갖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살기로 마음 먹는 순간 행복이 우리 곁에 다가온다.”

―참된 삶이란?

“누군가의 이웃이 됨으로써 참사람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품으려고 마음을 여는 순간 예기치 않은 생명의 힘이 생겨난다. 참삶은 나 스스로가 존귀해지는 게 아니고, 누군가에게 나를 선물로 내어줄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속에 기본값이 너무 부족해 항상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미 있는 것을 귀히 여기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런 분들을 만나면 피곤하다. 어떤 분들은 누군가를 부정적으로 말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듯 보이기도 한다.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만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불구로 만든다.”

―희망이 없다며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냉소나 허무주의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세상을 직시해야 한다. 물질주의의 챔피언들이 만든 게임의 법칙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만들려는 의지와 당당함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덜거린다고 내 인생이 좋아진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소비 패턴을 따라가면서 수입과 욕망 사이에 갭을 메울 수 없어 투덜거리는 것은 병적 징후다. 내 삶 속에서 제법 쏠쏠한 것들을 찾아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머무는 곳 어디에서나 삶을 작은 축제로 바꿨다. 길들여지는 것처럼 슬픈 게 없다. 광고나 매스컴이 만든 삶만 동경하며 ‘살 맛 없다’고 하기보다는, 익숙한 데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여기도 제법 좋은 삶이네’라고 자족하는 삶이 되면 좋겠다.”

―청년들에게 익숙한 세계에서 벗어나라고 한 뜻은?

“출애굽 사건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한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에 주저함이 없으면 좋겠다. 낯선 이들과 자꾸 만나면서 자기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떠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익숙함에서 떠나 시련을 겪는다. 떠난다는 것은 나를 보호해주던 울타리를 벗어나 취약한 존재가 되어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익숙한 세계에 머물러 있는 한 정신적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참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늘 직면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른다. 그분이 부재할 때 아름다웠다는 것을 느낀다. 40년 넘게 목회를 했는데 아름답게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 재미있는 건, 그분들이 많이 배운 분들이 아니라는 거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는데, 아름다운 삶으로 기억되는 분들이 있다. 배움과 참사람이 비례하는 게 아니더라.”

―성경에 ‘마음이 가난하면 복이 있나니’라고 했는데,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빈자들의 아버지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얼 했는가라고 자문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삶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마음을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 배고픈 이에게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 밥 한끼를 금식하거나 그들을 위해 밥상을 차릴 때 우리 식탁은 성찬이 된다. 외로운 이의 벗이 되어주려고 분주한 일상의 한 부분을 잘라낼 때 우리의 남은 시간은 의미로 충만한 시간이 된다.”

―잠시 멈춤, 침묵, 성찰을 자주 강조하는 까닭은?

“너무 바쁘게 살다 보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 나는 공원을 걷다 해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해찰하면서 봄이면 피어나는 꽃들을 본다. 사람들이 안식이 없고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 속도를 숭상해 분주해서다. 잠시 멈춰서 하늘을 보고 산들바람을 맞을 여유가 있어야 우울감도 사라지고 인간다움을 되찾을 수 있다. 반칠환의 시를 보라.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삶에서 받는 가장 큰 유혹은 무엇인가?

“자기가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은 유혹이다. 그러면 평가의 기준이 내쪽이 아닌 저쪽에 있다. 저 사람 마음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하니 불행해진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 받은 것도 세 가지다. 먼저 40일 금식한 예수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라고 했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유혹이다. 두 번째로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신비에 대한 유혹이다. 세 번째로 자기에게 절을 하면 만국을 다스리게 해준다고 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참사람, 큰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큰 저항은 자족하는 삶이다.”

―신앙적 회의가 비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더 깊은 인식에 이르기 위한 통로라고 한 의미는?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은 불안정하다. 오랫동안 확고한 믿음과 주저하지 않는 순종을 요구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치된 이들에게 이 말은 매우 불경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회의라는 통과제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단 한번의 타격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교리 혹은 교회의 가르침은 누군가의 머리를 덮는 쇠항아리가 될 수 있다. 신실한 기독교 대중들 앞에 설 때마다 내 속에서는 조금 심술궂은 열정이 피어오른다. 그들이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신앙적 자기 동일성을 가만히 흔들어보고, 경건해 보이는 외양 저 뒤편에 숨겨진 아픔과 그늘을 드러내보고 싶은 것이다. 항아리를 쓴 채 살 수는 없다. 그것을 찢어야 비로소 더 광대하고 맑은 세계가 열린다. 늘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라거나 기존의 가르침을 다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유를 통해 신앙적 주체가 되어 살라는 말이다. 종교적 확신은 뭔가를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지만 바른 확신이 아닌 경우도 많다. 성서에 ‘용서하라, 화해하라’고 하는데 도저히 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그에게 용서라는 당위로 겁박해서는 안 된다. ‘용서 못 하겠어요’라고 회의에 빠졌다가 더 깊은 자리에서 더 깊은 용서를 할 수도 있다. 회의는 더 깊은 인식으로의 안내자다. 회의를 차단하는 순간 자기가 갇힌 세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

―종교 근본주의자와 광신자의 특징은?

“어떤 종교든 근본주의의 특색은 숫자 1에 집착한다. 자신만이 진리 자체를 붙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진리고 다른 사람은 비진리라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귀를 기울이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하며, 나의 사고를 심화시켜나가야 하는데, 자기 확신에 차있는 이들은 조금만 다른 소리가 들리면 체제 자체가 흔들린다고, 먼저 제거하려 든다. 광신자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을 억지로라도 변화시키려 한다.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결핍된 사람으로 여긴다. 삶은 본래 모호한 것인데, 그들은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가한다. 아모스는 광신자들에게 결핍된 것은 유머 감각이라고 말한다.”

김기석 목사. 사진 조현 기자
김기석 목사. 사진 조현 기자
―통상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도 적지 않은데, 종교인의 신앙 목표가 천국에 가기 위함인가?

“수피 라비아는 ‘나는 낙원에 불을 지르고, 지옥에 물을 끼얹으러 가고 있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비전을 가로막는 베일이 완전히 사라질 테니까’라고 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종의 멍에를 멘 사람이다.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가르쳐준 하나님 나라는 죽었을 때 큰 생명으로 간다는 게 믿음이지만, 죽어서 가는 세상에 초점이 있지 않고, 일상 속에서 외부와 타자들과 어떤 관계를 만들 것인가가 더 크다. 당시 지중해 세계를 다스린 게 로마제국이다. 그 폭력의 질서에 맞서 가장 힘있는 사람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의 삶을 충실히 살아내지 못한 사람일수록 미래의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할 때 어부와 농부, 목동의 비유를 들었다. 종교적인 언어는 하나도 없이 너무나 일상적인 언어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속한 사회적 세계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붙들어매는 것인 동시에, 삶의 준거점을 욕망이 아니라 사랑에 두고 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중심이 된 성전 체제는 스스로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다. 그러면 신앙은 무거운 짐이 된다. 예수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성전 체제와 대립했다. 십자가의 길이란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주류 세계에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주류가 만든 분리의 장벽을 철폐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그저 착하게 살면 되나?

“기독교적 삶은 개인의 덕스러운 삶이나 윤리적 실천으로 고착시킬 수 없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강도가 출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 또한 소홀히해서는 안된다. 영국의 정치 사상가 에드문그 버크는 ‘악이 승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라고 했다. 세상은 우리에게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움직여야 하고 침묵을 깨뜨려야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의 안일한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일이다, 그것은 평안한 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다. 그 좁은 길을 따라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다. 기본적인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다. 부활을 믿는 것은 나는 패배할지 몰라도 그분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든든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를 던지는 것이다. 헤셀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믿음이 아니라, 더 큰 생명 속에서 포섭된 존재로서 든든함으로 이웃을 위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은 가장 경쟁적인 사회로 손꼽히는데 경쟁이 가져다주는 문제는?

“경쟁은 자극을 주어 성과를 내게 하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그러나 경쟁을 내면화하는 순간, 협력해야 할 때도 경쟁하고, 이완해야 할 때도 긴장하게 한다. 타인을 밟고 올라가도 아래에서 잡아끌지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경쟁은 타자를 소중한 이웃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 마음에 차단막을 치곤 한다. 인간은 본래 경쟁하는 주체로 만들어진 것일까? 소설가 존 쿳시는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라고 말했다. 경쟁은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지 필연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다. 경쟁은 평화나 공존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강강수월래는 높낮이가 없다. 원 밖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보면 ‘왜 밖에 있느냐’면서 손을 잡고 함께한다. 그러면 원이 더 커지고, 더 흥겨워진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소비사회의 신민, 노예를 만든다고 한 뜻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왜 우리는 불행을 감수해야 하는가>란 책에서 ‘슈퍼마켓은 우리의 사원이다. 쇼핑 목록은 우리의 성무일도서이고, 쇼핑몰을 거니는 것은 우리의 순례가 된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쇼핑할 것인가, 쇼핑하지 않을 것인가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돈이 본이 되는 세상이다. 돈이 곧 자유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미국 출신의 철학자 데이비드 로이는 ‘돈의 유혹에 빠지면 그 순수한 수단을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 즉 지구는 자원이 되고, 우리의 시간은 노동이 되고, 우리의 관계는 이용해야 할 연줄이 된다’고 했다. 발터 벤야민은 돈을 유사전능성이라고 했다. 돈을 가지면 못할 일이 없는 듯이 보여 갑질 행위도 마음대로 한다. 돈의 힘에 매달리는 순간 자신이 전능화된 것처럼 느껴져서다.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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