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12차례에 걸쳐 진행해 더불어 사는 삶이 주는 맛을 나눕니다. 첫번째는 가톨릭 수도자이자 시인인 이해인 수녀시인(77) 입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는 지하철 금련산역에서 내려 5분가량 금련산 쪽으로 가면 언덕 위에 하얀 집이 보인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원이다. 60년 전 수도원이 들어설 때만 해도 산골이었고, 주위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지금 이 일대는 천지개벽했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수도원 건물 맞은편에 있는 해인글방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맞아주는 이해인 수녀다. 해인글방은 마치 폐교가 되어 이젠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교처럼 낡았다.
시인일 뿐 아니라 수도자인 그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그의 유명세에 주눅이 들지만 스스럼없는 그의 천진함에 금세 놀라게 된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 같은 파릇함은 여전하다. 그가 2008년 대장암에 걸려 항암 주사를 30번이나 맞고, 방사선 치료를 28번이나 할 만큼 지독한 투병 과정을 거쳐 지금도 암세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도 한때는 가시 달린 장미와 다를 바 없었던 때가 있었다. 20대 때 이미 자신의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지만 세속의 조명 세례가 밝아질수록 수도원에선 고난거리가 되곤 했다. “제발 내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안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도 했다. 차라리 ‘대중들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수도자’가 되길 바라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고, 흰머리가 늘면서 이젠 출세간의 속박을 끊어낸 듯 자유롭다. 세속에서 너무 유명해져 수도원에서 쫓겨날까 봐 숨죽이던 해인 수녀가 더는 아니게 된 것이다. 스스럼없는 그다움을 마주하다 보면 더불어 무장이 해제돼 오래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다.
해인글방에 있는 그의 책상은 깔끔할 새가 없다. 정리하자마자 어느새 또 슬픈 하소연들이 켜켜이 쌓인다. 전국에서 보내온 편지와 엽서들이다. 해인글방 뒤 창고엔 그렇게 쌓인 편지글들이 한방 가득하다. 거기엔 더 이상 세상을 살 희망이 없다는 청년들이나 세상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운 중년들의 글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날마다 죽음의 순간과 씨름하는 사형수의 편지도 있다. 그 많은 고통을 다 읽다 보면, 아무리 수도자라지만 그의 몸인들 남아날까. 하지만 무거운 동토를 뚫고 나온 새싹 같은 편지도 있다.
‘수녀님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지요. 엄마에게 버림받고 동생까지 세상을 떠나자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던, 어린 소녀를 기억하시는지요. 수녀님은 제게 따뜻한 은총을 보내주셨어요. 수녀님이 보내준 한 통의 편지가 제겐 큰 힘이 되었답니다. 제게 살 희망을 주셨어요. 열심히 살기로 하고, 지금은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잘살아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 곧 결혼할 겁니다. 수녀님의 작은 편지 한 통이 씨앗이 되어 저란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었어요.’
부산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수도원 건물 앞에 선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해인 수녀는 이런 이들에겐 정성스러운 위로와 격려의 시와 글을 꾹꾹 눌러 써 마음을 전한다. 이미 세상을 달리한 아이들의 남은 가족들에게도 그는 손을 내민다. 극단적 선택을 한 이와 그 유가족에 대한 편견 때문에 그들이 두번 세번 죽음과 같은 순간을 겪는 게 가슴이 아파서다.
“극단적 선택도 우울증의 일종일 수 있어요. 그렇게 했다고 해서 종교 예식조차 안 해주는 경우도 있어, 더 마음이 쓰였죠.”
그는 나이, 성별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위로에 나선다. 2001년 도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가 숨진 유학생 이수현씨의 부모가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 시민으로서 고맙다’는 감사와 위로의 편지를 그들에게 보냈다. 금쪽같은 자식을 잃고 비통한 고인의 모친은 불자였지만, 해인 수녀의 뜻하지 않은 위로에 감격해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시와 글을 쓰고, 정성을 들여 종이 나비를 오려 붙이느라 도무지 자신의 통증엔 관심이 없다. 그 고통에 매달릴 짬도, 지루할 틈도 없는 해인 수녀다.
‘내가 만든 한숨과 눈물 속에도/ 당신은 조용한 노래로 숨어있고// 내가 살아있으므로/ 다시 당신을 맞는 기쁨// 종종 나의 불신과 고집으로/ 당신에게 충실치 못했음을 용서하세요.’ 그는 ’희망이란’ 시에서 신에게 자신의 불민에 대해 용서를 구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가 쓴 엽서와 편지 한 통에 울며 마음속 고통 덩어리를 녹였는지 모른다. 최근 해인 수녀의 눈길이 머문 곳은 튀르키예와 시리아다. 그곳에 있는 지진 피해자들을 향하고 있다.
이해인 수녀에게 최엘라라는 독자가 만들어 보낸 하트 문양 사진 . 조현 종교전문기자
튀르키예에서 일어난 지진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서만 탯줄에 감긴 채 구조된 갓난아기, 동생과 함께 돌 틈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시리아 소녀 등의 보도를 본 뒤 마음은 한없이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처참한 지진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들을 위로할 방법을 뭘까 밤새 고심도 했다. 그가 모진 암과 싸우면서도 명랑투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자신의 아픔에만 매몰될 짬을 없애고 시선을 타인의 고통으로 향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비록 그곳이 바다 건너 먼 곳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는 남의 아픔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다해 위로의 글을 건네면서도, 정작 자신의 병에 대해서는 마치 남 이야기하듯 만담으로 풀어낸다. “방사선 치료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미리 겁부터 줘요. 어떤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병원 간판을 보자마자 구토부터 나니까 미리 검은 봉지를 들고 다니라고 권하죠. 방사선 기사들은 치료 전에 방사선 빛이 몸에 잘 스며들도록 힘을 빼는 연습을 30분간 미리 시켜요. 방사선 기사들이 ’수녀님 힘을 빼라니까요. 왜 힘을 더 주시나요’라고 해요. 힘 빼는 게 그렇게 힘이 들더라니까요.” 그러면서 “남들은 항암 치료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데 나는 전혀 살이 안 빠지니 원!” 하며 혀를 찬다. 몸이 아프면 짜증이 늘고, 부정적인 말도 많이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해인 수녀의 시엔 암 투병을 한 뒤로 기쁨이나 행복 같은 단어가 더 많아졌다.
이해인 수녀가 직접 쓴 글. 조현 종교전문기자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자신의 암 투병 경험을 들려주며 위로하던 분들 가운데 먼저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요. 탤런트 김자옥씨도 친절하게 방사선 맞는 법까지 알려줬는데 먼저 가고 말았어요. 병원 생활하면서 아픈 사람들을 많이 보다 보니 우리 삶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너무도 다가와요. 오늘 하루 한순간을 마지막처럼 살지 않을 수 없지요. 내일은 없을지 모르니까요. 이 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행복할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당연시했던 것이 모두 행복이란 걸 알게 되니까요.”
그는 암 환자나 사고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겐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바다 같은 자비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 환자 자신도 아픈 만큼 성숙해지기 위한 노력과 마음 공부를 할 것을 권유한다. 자기 연민에만 빠지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아 더욱 깊은 슬픔에 빠질 수 있으니, 자기 아픔을 좀 떼어 놓고 객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다 보면 가족과 의사와 간병인 모두의 감사함이 눈에 들어오면서 한결 마음도 나아진다는 것이다.
국민 우울 시대라고 할 만큼 우울증이나 조울증 같은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은 시대에 대한 진단도 마찬가지다. “돈이나 성공에만 기준을 두고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우울을 벗어날 수 없어요. 좀 더 시야를 돌려 보면 지금도 더 어려운 가운데서도 애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이죠. 행복의 기준을 아무런 어려움도 없고, 아무런 고통도 없는 것에만 두면 우울해 질 수밖에 없지요.”
전국에서 온 편지들을 보는 이해인 수녀. 조현 종교전문기자
‘고통이 없는 상태가 행복이 아니라 암이, 고통이 있음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듯 해인 수녀는 다시 만담을 이어간다. 문학적 교류를 하면서도 가끔은 티격태격하기도 했던 법정 스님과의 일화도 털어 놓았다. 해인 수녀가 오랜만에 법정 스님 거처인 송광사 불일암을 찾아 갔을 때 일이다. “법정 스님은 펑퍼짐해진 나 자신을 보고 ‘고뇌하는 시인이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했어요.” 두 사람은 맑은 하늘을 이고 진 산사에서 살가운 바람 맞으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해인 수녀는 수녀원에만 있긴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요. 밖(세속)에서 살았으면 멋만 부리는 자유부인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놀리면 저는 정색을 하고 분명 현모양처가 되었을 거라고 열심히 변명하곤 했지요.”(웃음) 자신을 희화화할 만큼 병마에도 넉넉해진 것일까.
그는 가끔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과 행동을 어쩌지 못하며 막다른 길에서 몸부림치는 사람에게도 의례적인 종교적 윤리 같은 걸 들이대지 않는다. 얼마 전엔 형부를 사랑해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했던 여성이 찾아와 고통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해인 수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 여성은 자신의 고백을 듣고 그냥 안아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제 포옹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란다고 말한다. 못난 모습마저도 다그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안아주는 듯한 넉넉한 성모상을 닮아가는 그가 건네주는 마지막 말이 봄 햇살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이 꽃으로 필 거예요.”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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