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우리’가 익숙했었던 우리. 그러나 어느새 ‘우리’보다 ‘나’를 앞세운 시대입니다. 경쟁과 적자생존 속에서 빈부격차, 정치 이념 갈등과 남녀노소로 갈리며 개인과 개인의 소통도 막혀갑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삶이 더욱 그립습니다. 외로워도 슬퍼도 함께하면 견딜 수 있습니다. 한겨레와 플라톤아카데미가 ‘함께하니 더 기쁜 삶-일상 고수에게 듣다’를 진행하며 국내편에 이어 미국에서 6명의 고수들을 만났습니다. 미국편 다섯번째는 미국 필라델피피아 흑인빈민사회에서 사역하는 이태후 목사(58)입니다.
지난달 10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 흑인빈민가인 노스센트럴을 찾았다. 이 목사는 이곳에서 20년째 흑인 빈민들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그 동네에서 그가 처음 안내한 곳은 수백년된 성공회 애드버킷교회 건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고풍스러운 근대식 건물 내부엔 색감 짙은 대형 벽화로 채워져 있다. 최초의 성공회 흑인 목회자였던 워싱턴 폴이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을 거친 후 1970년대 두 젊은 흑인 화가를 시켜 백인 기득권이 아니라 핍박받던 노예들과 흑인들의 관점에서 본 성경을 그리게 한 것들이다. 흑인들을 제국과 강자들에게 의해 억압받는 히브리 노예로, 현대도 여전히 백인과 자본과 정치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흑인 인권이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빈민지역엔 여전히 흑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필라델피아의 대표적인 빈민가인 이곳도 주민의 90% 이상이 흑인이고, 45%는 절대 빈곤 상태에 있고, 40%는 빈집으로 방치돼 있다는 게 이 목사의 설명이다. 이 목사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 집에 있다가 스무발 넘는 총소리를 듣기도 하고, 밤늦게 현금인출기 앞에서 권총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온 지 20년이 넘게 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점차 동네 터줏대감이 되어가고 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동네를 거닐며 ‘이 시간에 다니면 위험하지 않느냐’는 말에 그는 ‘나와 다니면 걱정 없다’며 웃었다.
“얼마 전엔 시내음악회에 가면서 주차가 복잡해 전철을 타고 갔다가 전철역에서 한밤중에 내려 집으로 오는데 마약 거래하는 갱단 청년들이 ‘목사님 이 시간에 여길 걸어 다니면 어떻게 하느냐’며 오히려 신변안전을 걱정해주기도 했다.”
이 목사는 자기 집 앞에서 노는 두명의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 목사가 미국의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을 앞둔 주말 이 동네 사람들이 각기 가정에서 파티를 즐길 수 있게 칠면조를 비롯해 몇가지 먹거리를 포장해 집으로 보내줄 것이란 이야기를 하자 아이들이 마냥 기뻐했다. 이 목사는 매년 추수감사절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선물꾸러미를 나눠주고 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전이면 며칠 전부터 동네 사람들로부터 ‘올해도 보내줄 거죠’, ‘저희 집도 보내는 것 잊지 않을 거죠’ 등의 전화가 걸려오곤 한다.
그의 집은 빈민가 한 가운데 있지만 내부는 마치 미술관 같다. 홀로 살지만 자주 이웃과 지인을 초청해 특급 요리를 대접하기에 온전히 홀로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서울대 미학과를 나온 그는 미술과 음악에 심취한 예술가나 각종 요리를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특급 셰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서울 신길동에서 40여년간 목회를 한 아버지의 훈육을 받으며 자란 대물림 목사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나와 뉴욕에 있는 한인교회에서 7년을 목회한 그가 왜 꽃길을 두고 빈민사역을 선택했을까. 그는 6개월간 오직 기도의 시간만 보낸 끝에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의 이웃이 되라’는 내적 음성을 듣고 2003년 이곳에 왔다.
그는 이곳에 교회도 없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커뮤니티센터를 만들 꿈을 꿨지만 아직까지 만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동네에서 아파도 병원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환자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전화가 오면 만나주는, ‘움직이는 교회’구실을 하고 있다. 그가 2006년부터 이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여는 여름캠프는 노스센터럴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처음 와보니, 이곳 아이들에겐 여름방학이 가장 지겨운 시간이었다. 낮에 혼자 있는 경우가 많다. 학교라도 가면 친구들과 놀 텐데, 갈데도 없고, 할 것도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학교 급식이 유일한 식사인데, 집에서 굶기까지 했다.”
4주간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행되는 이곳 여름캠프 때는 밥도 주고, 태권도나 유도를 배우고, 공용수영장에 가서 물놀이도 가고, 동물원도 간다. 처음 10여년은 이 목사집 앞 골목을 막아 하다가 팬데믹 이후엔 성공회 교회 체육관을 빌려 하고 있다. 캠프 때는 시청의 지원을 받아 점심도 제공한다. 놀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 목사는 아이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이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마약에 손을 대곤 한다.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 많다. 형제가 넷인데, 네 형제의 아버지가 모두 다른 아이들도 있다. 부모가 있어도 아이들에게 ‘누가 너를 때리면 맞고 있지 말고,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게 반 죽여놓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로 총기사고가 너무 빈번하다. 누군가 욕을 하면 주먹다짐으로 가고, 결국 총으로 쏘고, 죽은 사람의 사촌이 다시 보복을 하면 악순환이 끊어지지 않는다.”
이 목사는 노동을 해서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의 중요성과 함께, 폭력이 아닌 사랑의 힘과 같은 윤리 의식을 심어준다. 그렇게 여름캠프를 마친 아이들이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이 이 목사의 가장 큰 보람이다.
“얼마 전엔 여름캠프를 마친 한 청년이 아침에 거리에서 인사 하며 아는 채 했다. 병원에서 밤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라고 했다. 예전엔 자기도 마약판 형들과 놀곤 했는데,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며 일하고 돈을 벌며 사는 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만이 아니다. 꿈이 없던 이 동네 아이들이 꿈을 꾸게 된 것이 이 목사에겐 더 큰 기쁨이다.
“처음 캠프를 시작할 때는 아이들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하면, 남자아이들은 ‘미식축구 선수, 농구선수, 힙합 가수가 되겠다’거나 어떤 아이들은 ‘갱단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여자아이들은 ‘가수, 모델, 헤어디자이너, 엄마’라고 답하곤 했다. 그런데 캠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며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원봉사 온 대학생들을 보며 자기들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예전에 대학은 백인들이나 동양인들만 가는 것으로 생각하다가 생각이 바뀐다. 더구나 캠프를 마치고 대학에 다니다가 자원봉사자로 온 형이나 누나를 보면서 희망을 가꾼다. 이제는 꿈을 물어보면 ‘소아과의사, 엔지니어, 선생님, 변호사’라고 하는 아이들도 많다.”
세계 최고 선진국이라는 미국이 방치한 흑인 빈민들을 돌보는 이 목사는 ‘가슴에 새기고 사는 말이 있느냐’고 묻자 테레사 수녀의 말을 들어 ‘위대한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실천하자’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여름캠프에서 주로 어떤 것들을 가르치려고 하나.
“살아가면서 필요한 기본 윤리 즉 왜 땀 흘려 일해야 하는지, 가족의 중요성 등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기본적인 윤리 원칙을 가르친다. 폭력이 일상적인 곳이고, 총기사고도 빈번한 곳이라 아이들이 가치관의 혼란이 크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낳고 방치하는 경우도 많아서, 생명을 낳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가르친다.”
-한달간 캠프를 거친 아이들이 다른 점은.
“나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도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운 뒤엔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진다. 자기 만족감과 자신감이 넘친다. 마약 거래하는 아이들도 실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기술을 어떻게 배우고, 일자리를 어떻게 구할지 몰라 헤매다 결국 마약에 빠지는 거다. 아이들에게 모두 대학을 가라거나 화이트칼라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배관, 용접, 미용 같은 기술을 배우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캠프 자원봉사는 주로 누가 하나
“한인이민교회에 다니는 고교생, 대학생 청년들이 주로 오는데, 영어소통이 편한 교포 1·5세와 2세들이 대부분이다. 한인 형 누나들과 어울리는걸 이 동네 흑인 아이들도 좋아하지만 한인 청년들도 많은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자기 부모와 가정에 불만이 있던 아이들도 이곳에서 절대 가난의 아이들을 보며, 자기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풍족하게 살았는지 느끼고, 캠프를 마치고 돌아가 부모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아이들이 많다.”
-노스센터럴에 교회가 아니라 커뮤니티센터를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는.
“교회 건물은 많이 있다. 동네 아이들이 방과 후에 지내거나, 마을 사람들이 어울릴 곳이 없다. 우리 동네에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니, 함께 이야기하고, 토론도 하고, 먹거리도 나누는 그런 곳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이 흑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미국 빈민가 흑인들은 16세기 노예로 끌려온 이후로 400년 정도의 차별과 억압에 시달렸다. 1960년대 민권운동 전까지 미국에선 유색인종한테는 참정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미국 한인들은 1965년 이후에 입국해 이민역사가 짧아 잘 모르지만, 민권운동 때 중국계나 일본계는 흑인들과 같이 투쟁했다. 인권 무임승차를 한 셈이다. 한인들은 초기 대부분 흑인 빈민가에서 식료품 같은 자영업으로 출발해 돈을 벌었다. 그런 의미에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함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본 흑백간 삶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한국은 가난한 동네에 가도 슈퍼와 가게에 신선한 야채가 있다. 그러나 미국은 철저한 자본주의여서 시장 논리에 따라 장사가 안되는 곳에는 아예 신선한 야채가 들어오지도 않는다. 우리 동네 아이들의 고교 중퇴율이 60%가 넘는다. 내가 템플대에서 가르칠 때 보면 이 동네 아이들이 대학에 오더라도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중학교 1, 2학년 수준으로, 주어 동사도 일치하지 않고, 시제도 맞출 줄 모른다. 개인적인 노력이나 의지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인 차별이 여전한 결과로 인해 그들에겐 훨씬 더 힘든 삶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크리스천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이 시대의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보냈으니, 크리스찬들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야한다. 우는 사람과 같이 울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 먹여주고, 집 없는 사람에게 따뜻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 핍박받고 소외되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안아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준 것은 그냥 환대가 아니라 파격적인 환대다. 당시엔 종교적 스승이 되려면 사회 통념상 어울려서는 안 될 사람과도 예수께서는 어울렸다. 이방인도 만나주고, 몸을 파는 여성도 만나주었다. 그렇게 파격적인 환대가 소외된 사람들로 하여금, ‘아, 나도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을 받는구나’란 자존감을 갖게 했다. 우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실천하고 있는가, ‘너는 못와’. ‘너는 여기 올 수 없어’라도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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