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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은 거창고 이사장 “도그마로부터 독립하라”

등록 2020-10-28 07:16수정 2021-02-09 10:54

경남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거창고농장을 걷고 있는 전성은 이사장. 사진 조현 기자
경남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거창고농장을 걷고 있는 전성은 이사장. 사진 조현 기자

전성은(76) 거창고 이사장은 꺽다리다. 나이가 들면서 4㎝가 줄었다고 하지만, 180㎝니 여전히 장신이다. 그러나 그가 우뚝한 것은 키가 아니라 도그마의 우물에 갇히지 않아서다.

전 이사장을 16일 경남 거창군 거창읍 가지리 거창고 농장에서 만났다. 그는 3년 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농장지기를 자청해 이곳에 왔다. 사람들은 그의 외로움을 걱정하지만 그는 공부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책상 위엔 성경 관련 영어 원서들이 수북하다.

2006년 거창고 교장직을 퇴임한 그는 거창고의 초석을 놓은 부친 전영창(1917~76)이 남긴 단행본 30권 분량의 설교와 강연 원고를 정리하고 성서를 번역하는 데 14년을 보냈다. 국제성서연합회 세계성경번역센터 한국 편집인인 그는 신약을 번역하고, 별세한 누님 전덕애의 뒤를 이어 구약을 번역했다.

그는 왜 오랜 세월을 아버지와 누님의 뒤치다꺼리로 보냈을까. 노무현 대통령 때 초대 교육혁신위원장을 맡아 한국 교육의 방향을 정한 ‘혁신의 아이콘’이 말이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한 부친 전영창은 박정희 정권 때 거창고 학생들이 삼선개헌 반대 시위를 했을 당시, 주동 학생을 처벌하라는 당국의 요구를 거부해 교장 승인을 취소당했다. 공개 강연에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유신 독재를 비판했다. 또 서울대 재학 당시 미모의 수재로 유명했던 누님 전덕애는 서울대 교수직도 거부하고 거창고에서 평생 영어 교사로 헌신했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진정한 혁명을 시작한 전영창·전덕애는 갔지만, 전 이사장 속에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중심의 골리앗과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된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위기는 오히려 그에겐 기성 사고를 역전할 기회다.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기성세대와는 다르다.

“요즘 아이들이 우리 때보다 훨씬 낫다. 실력만 나은 게 아니다. 도덕성도 더 낫다. 우리 때야 깡패 시대 아니었나. 연애편지 한 통만 써도 정학시키던 시대가 정상이냐. (과거와) 달라진 것을 잘못됐다고 보는 건 인류의 고질병이다. 4천년 전 수메르 점토판에도 ‘요즘 젊은것들은 타락했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그는 샛별중·거창고를 운영하며 봄 소풍을 가거나 예술제를 열 때도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논의해 결정하도록 하는 등 간섭보다는 자율과 자유를 존중했다. 자율적일 때만 창의성이 발현되고, 자유롭게 스스로 나아가고 멈추고 절제하는 법을 터득할 때에만 진정한 성숙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가 아이들을 강압하지 않는 것은 구세대의 도그마로부터 독립하기를, 대한독립만큼이나 열망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우고, 소설을 읽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매몰된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함이다. 그런데 자기 지역에 뿌리를 둔 정당인이라면 썩은 똥막대기를 꽂아도 찍어주는 것이나, 자신의 죄악을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빨갱이를 만들어 선전포고하는 목사들의 프로파간다에 무조건 동조하는 것은 목 위에 달고 있는 게 머리가 아니라 ‘사고 기능이 없는 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그런 어른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이 경험했다고 해서 그 경험이 전부인 양 경험 세계에 갇히지 말고, 어른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믿지도 말고, 생각과 가치판단에 있어 독립적 인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교육자로서 주력해온 것도 국가권력이나 힘 있는 자들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걸 기대하지 말라’는 것도 그답다. 그는 “기독교가 도덕적인 목사를 길러내지 못하는 것처럼, 교육으로 인간을 변화시킨다는 꿈에서 깨야 한다”며 “높은 점수를 받아 검사, 판사, 의사 등 ‘사’자 돌림이 된 자들에게 스스로 변화해 도덕적인 사람이 되길 기대하기보다는, 그들이 높은 대우를 받는 만큼 사회적으로 욕망과 권한을 제한하고 책임은 더 지도록 법·제도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바라는 인간형은 기성 도그마에서 해방돼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자유인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희망이 아니라 절망할 것을 권한다. “진실을 보려면, 자신이 속한 세계의 죄성과 악마성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그 죄와 악마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긴커녕 답습하게 된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1·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들이 모두 기독교 국가, 기독교도인 것을 보고, 나는 젊은 날 절망해 3년간 교회도 나갈 수 없었다.”

거창고에 전성은 이사장이 나타나자 스스럼없이 다가와 웃음꽃을 피우는 거창고 학생들. 사진 조현 기자
거창고에 전성은 이사장이 나타나자 스스럼없이 다가와 웃음꽃을 피우는 거창고 학생들. 사진 조현 기자

4대째 크리스천인 전 이사장은 지금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한 시간 넘게 성서를 읽고,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번역했다. 자신은 기독교라는 종교와 결혼한 사람이라면서도 그가 기독교의 죄악을 보기 위해 애쓴 것은 자기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면 참을 볼 수 없고, 거짓을 되풀이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현재의 기독교가 로마 시대 황제의 종교가 된 이후 본질이 훼손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새로운 성서 번역에 몰두한 것도 권력자와 성직자의 욕망으로 변질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1947년 사해에서 성경 사본과 주석서가 대거 발견되면서 1960년대 이후 급격히 발전한 고대어 연구를 반영해 기독교의 본질을 더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성경 원문엔 요즘 교회가 말하는 천당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낙원으로 번역된 것도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죽어서 잠시 머무는 ‘스홀’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이 가장 많이 인용했던 미국의 노먼 빈센트 필 목사도 말년에 오프라 윈프리와 한 인터뷰에서 ‘요즘 교회들이 말하는 그런 천당은 없다’고 했듯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함이지, 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애썼던 공자나 석가나 간디가 못 가는 천당을, 욕망만 불살라온 이기적인 인간이 특정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몸과 물질만 진화하는 게 아니라 정신도 진화해야 한다. 이미 오래전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이 우리가 자연계에서 배울 것은 경쟁과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아니라 조화라고 가르쳤음에도 진화는커녕 퇴화한다면 말이 되나.”

그는 어른들의 적자생존 논리에 갇혀 좀팽이가 되지 말라며 당부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지만, 궁극적 행복은 사랑을 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큰 깨달음은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나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거창(경남)/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거창고 교정에 ‘거창고 직업선택을 위한 십계명’의 정신을 담은, ‘십자가 없이 왕관 없다’라고 쓰인 영어 슬로건 아래 앉은 전성은 이사장. 사진 조현 기자
거창고 교정에 ‘거창고 직업선택을 위한 십계명’의 정신을 담은, ‘십자가 없이 왕관 없다’라고 쓰인 영어 슬로건 아래 앉은 전성은 이사장. 사진 조현 기자

거창고 직업 선택을 위한 십계명

1. 월급이 적은 쪽으로 가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선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선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은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 강당에 걸려 있는 ‘직업 선택을 위한 십계명’이다. 전영창의 평소 설교와 훈화를 그의 사후에 평생의 동지인 도재원 거창고 교장선생님과 함께 전성은 이사장이 정리해 만든 것이다. 내 욕심대로 복 받고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고 헌신하고 섬기고, 십자가를 지는 게 진정한 기독교 신앙이라는 전영창의 가르침대로다.

전성은 이사장은 “한번은 예배식으로 진행되는 입학식을 지켜보던 학부모가 강당 뒤에 붙은 십계명을 읽고는 큰 소리로 아들 이름을 부르며 ‘이런 예수쟁이 학교엔 우리 아이 못 보내겠다’고 한 적도 있다”며, 이런 십계명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동지인 도재원 선생님의 말을 빌려 전했다.

“사람은 자기 인격보다 더 큰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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