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코로나는 엎친 데 덮친 충격이다. 이 충격은 일시적 재앙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가 근본적인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이 전환의 시기, 우리는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까. 선각자의 혜안을 얻기 위해 휴심정이 플라톤아카데미와 공동으로 ‘인생 멘토에게 코로나 이후의 길을 묻다’ 시리즈를 진행한다. 4주 간격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하는 시리즈의 네번째 인터뷰는 음악가이자 작가인 한돌이다.
코로나19는 모든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개인에게 다가오는 위협의 크기는 공평하지 않다. 자영업이 무너지고 실직자가 늘어나고 그늘이 짙어갈 때, 더욱 가파른 생계 위기에 처하고 더 고립되고 더 외로운 처지에 내몰리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1등(승자)을 우상화하는 자본주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꼴찌와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약자를 위해 노래를 짓는 치유음악가 한돌(67)을 지난 7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정발산 기슭에서 만났다.
10분이면 올 길을 정발산을 넘어서 30분 걸려 왔다는 한돌은 효율 제일주의인 자본주의 사회인은 아니다. 30여년 전 야전 잠바를 입고 방송국에 갔다가 피디에게 군소리를 듣고 ‘이곳은 내가 올 곳이 아니다’라며 발걸음을 끊은 그는 조명·의상·분장으로 포장한 세상 속에 부적응한 대중음악가다. 일산에서 가장 싼 5천원짜리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으면 막걸리 아홉병 값이 생기고, 버스비를 아끼면 막걸리 한병 값이 생긴다는 그다. 그러나 걷기를 즐기는 것이 꼭 막걸리 때문만은 아니다. 정발산 아래 들어가 20여년째 살아가는 그는 누군가를 만날 때 산을 넘어가서 만난다. 상대를 신선한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정발산에 오르내릴 때 그 흔한 ‘브랜드 아웃도어’조차 걸쳐본 적도 없으니, 그가 국민 애창곡인 <홀로 아리랑>과 <개똥벌레>의 작사·작곡가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일부러 떠는 궁상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개똥벌레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 그가 펴낸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열림원 펴냄)엔 그런 자전적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강원도 춘천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온 한돌은 친한 친구가 없던 차에 중학교 1학년 때 유급을 당하면서 왕따가 되고 말았다. 공부를 내팽개쳐 고등학교 때는 전교 꼴등을 하고,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를 지원해서 떨어지고, 화가가 되고 싶어 미대를 지원했다 떨어져 영영 대학을 포기했다. 군대 훈련소에서도 이른바 ‘고문관’으로 체벌과 구타를 당하고, 제대해서는 외딴 빈집에 살다가 간첩으로 경찰에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한돌은 중·고교 때부터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고 땅만 보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 눈에 낀 외로움 탓에 하늘은 언제나 흐리게 보였다. 스스로 사람들을 볼 수는 있지만,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다고 생각했다. 골수에 맺힌 외로움은 자폐 증세가 돼 지금도 사람을 만날 땐 4명이 상한선이다.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도 4명 이상이 되면 그는 남모르게 자리를 뜨고 만다. 사람이 많아지면 더욱 외로움이 꿈틀대며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런 외로움 속에 만든 노래가, 방송에 나간 적도 없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꼴찌를 위하여>였다. 이 노래만 뜨면 그도 신산한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을 터다. 그러나 학부모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몰려왔다. ‘노래를 그따위로 만들어서 우리 아이가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옥에서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성남 골목에서 아버지가 운영하던 코딱지만한 약방 골방에 야전침대를 하나 놓고 유일한 벗인 기타를 안고 살았다. 약방 맞은편엔 자그마한 영세 공장이 많았다. 야근하려고 잠 안 오는 약을 사러 오는 공장 아이가 많았다. 이를 악물고 잠을 이기며 일하는 아이들이 일하는 공장의 형광등 불빛은 개똥벌레 같았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 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 든다’
<개똥벌레>는 그 자신과 공장 아이들의 외로움을 표현했기에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골수에 맺힌 외로움과 아픔이 타인의 외로움과 아픔을 치유하는 거름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상처받은 치유자’다. 그는 자신을 보도블록 틈에 피어난 민들레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부모나 교사도 민들레를 짓밟지 말아달라고 호소한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한 가지 재능은 갖고 태어난다고 봐요. 만약 그 재능을 귀히 여긴다면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것이고, 업신여긴다면 어려운 인생을 사는 거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스무살 넘도록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오래전부터 제 마음속에 음악의 씨가 자라고 있었지만 저는 그걸 재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러나 그가 더욱 중요시하는 것은 재능보다 진정성이다. 남을 의식해 유행을 따라 살며 겉멋만 들면 자신의 젊은 날처럼 허망한 인생이 되고 만다며 젊은이들에게 당부한다. “저도 젊은 날엔 인생은 꾸미는 것이 아니라 가꾸는 것이란 걸 몰랐어요. 어떤 집에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데 그걸 몰랐어요. 그러니 무엇을 배우든 남에게 보여주려고 배우지 마세요. 남을 의식하면 기교를 배우게 되고, 기교에 치중하다 보면 기본을 놓쳐요. 악기를 배우고 싶거든 악기와 한 몸이 되도록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해요. 문학을 일구려면 문학과 한 몸이 돼야 해요. 1등 하려고 공부하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해요. 실용음악과를 졸업한다고 모두 가수가 되고 연주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대를 졸업한다고 모두 화가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원하는 대학에 못 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어요. 간절함이 있다면 대학 같은 들러리 때문에 인생이 흔들리지 않아요.”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돌의 천천히 철학
‘빨리빨리’가 몸에 밴 ‘다이내믹 코리안’이 코로나 답답증에서 벗어나고픈 조급증이 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시도 가만히 있기 힘들어하는 아이와 청춘의 조급증은 더하다. 그러나 한돌은 지금이야말로 ‘급할수록 돌아가라’던 ‘천천히의 진리’를 체득할 기회라고 말한다. 그는 “인생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천천히’라는 말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정답이 아주 많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지진아였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클라리넷을 하고 싶었지만 “공부도 못하는 놈이 무슨 클라리넷이냐”는 담임 선생님의 불호령에 접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기념비적인 노랫말과 곡을 만들어냈다. 음대를 나오긴커녕 제대로 음악 공부 한번 해본 적이 없는 그가 말이다.
“천천히 걸어야 빨리 걸을 땐 보이지 않던 잡초들이 보어요. 천천히 보아야 잡초가 얼마나 예쁜지 그제야 보여요. 산에서 천천히 걸으며 심호흡을 깊게 하면 산신령이 내게 준 노랫말이 드디어 떠올라요.” 자기 재주로는 그런 노랫말을 만들 수 없었지만, 천천히 걷다 보니 하늘에서 노랫말이 뚝 떨어지듯 와줬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 때부터 조급함을 버리고 더욱 천천히 걸었더라면 내 인생이 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둘러 어른이 된 나무는 거친 바람에 쉽게 쓰러지지만, 천천히 자란 나무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 법이지. ‘빠름’에 속지 마라. 세상에 기타 3개월 완성이 어디 있으며, 영어회화 3개월 완성이 어디 있느냐?”
그가 몇년 전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란 노래를 만든 것도 자기와 같은 ‘느림보 거북이’를 위해서였다. ‘버림받은 아이들아 내 말 좀 들어보렴/ 들꽃을 보았느냐 저마다 예쁘단다/ 아무리 캄캄해도 희망의 끈 놓지 마라/ 언젠가는 너의 꿈을 만나게 될 테니// 늦었다고 생각 마라 늦었다고 생각 마라/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 늦었지만 늦지 않았어/ 미움아 나오너라 우리 한번 안아보자/ 미움아 나오너라 우리 서로 용서하자’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