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의 양면성과 인간 , 그리고 나
자연 또는 신의 두 얼굴
신의 피 , 신의 숨이 자연만물 속에 흐르고 있다고 했다 . 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큰 신이다 . 인간을 비롯한 뭇 생명은 그 신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나서 살아가다가 그 품으로 되돌아간다 . 자연은 우리가 언제라도 따르고 존중해야 할 큰 어머니 같은 존재다 . 일컬어 대모신 ( 大母神 ).
하지만 대자연이라는 어머니는 , 현실 속의 어머니가 그러한 것처럼 , 늘 인자한 것만은 아니다 . 자연은 자체의 존재원리와 생명적 체계에 따라서 움직인다 . 인간은 자연의 존재이유가 아니다 . 하나의 작은 요소일 뿐이다 . 어쩌면 무시해도 그만일 수 있는 . 자연은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터전과 자양분을 제공하지만 , 가차없이 인간을 공격하기도 한다 . 일컬어 자연 재해다 . 하지만 ‘ 재해 ’ 라는 것은 인간 입장에서의 표현일 따름이다 . 자연은 묵묵히 제 나름의 체계 속에서 유동할 따름이다 .
인간에게 있어 자연이라는 신은 두 얼굴을 지닌 존재다 . 그것은 때로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우리를 감싸지만 때로는 , < 해와 달이 된 오누이 > 속의 호랑이가 된 어머니처럼 , 힘없는 인간을 꿀꺽 집어삼키려 든다 . 대지진과 홍수 , 태풍과 대가뭄 같은 재앙 앞의 인간은 호랑이 앞의 하룻강아지일 따름이다 . 자연이라는 호랑이는 인정사정이 없을 뿐 아니라 , 한 마디 말도 없다 . 원망해 봤자 소용없고 , 속절도 없다 . 아픔만 커질 뿐이다 .
자연이라는 큰 신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위력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순종해야만 할까 ? 자연에 순응함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지만 , 고정불변의 원칙인가 하면 그리 말할 수는 없다 .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제 생명을 지키고 발현하는 것을 절대적 과제로 삼는다 .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칙이다 .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 호랑이 발톱 앞의 강아지가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 자연의 공격 앞의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살 길을 찾아야 한다 . 필요하면 부딪쳐서 싸워야 한다 .
세계의 수많은 신화는 그 싸움에 대한 사연들을 전한다 . 신화의 서사는 인간의 가열찬 생존 투쟁의 역사라고 보아도 좋다 . 생존이라는 본연적 몸짓 앞에는 신 ( 神 ) 도 예외가 아니다 .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며 , 장난감도 아니다 . 그 자신이 하나의 신이다 . 스스로의 생명적 가치를 지키고 발현하는 것은 둘도 없는 신성한 과업이다 .
태초의 거인 신은 왜 죽어야 했나
세계의 수많은 신화는 신의 죽음을 말한다 . 그 첫머리에 놓이는 것은 태초의 창조신의 죽음이다 . 태초의 알이나 바다로부터 , 또는 아득한 혼돈으로부터 이 세상을 창조한 여러 신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 중국의 거인신 반고 ( 盤古 ) 는 스스로 쓰러져 죽었다고 하거니와 , 바빌론 신화 속의 어머니신 티아마트나 북유럽 신화의 거인신 이미르는 갈가리 찢겨져 죽임을 당한다 . 타히티의 창조신 타아로가는 스스로 제 몸을 찢어서 자연만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 어쩌면 그 또한 살해된 것일 수 있다 . 누구에게서인가 하면 , ‘ 역사 ’ 에 의해서 . ‘ 인간 ’ 에 의해서 .
티아마트를 죽인 마르두크나 이미르를 죽인 오딘 삼형제는 신 ( 神 ) 이었다 . 어떤 신인가 하면 젊은 신 . 태초의 거인신에 대해 인간이 새롭게 발견하고 모시게 된 신에 해당하거니와 , 그들의 형상에는 인간의 새로운 정체성이 반영되어 있다 . 태초의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이제 거기 맞서면서 시스템 조정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 스스로의 생명적 가치와 존재성을 한껏 발현하기 위해서 . 일컬어서 , 문명과 문화의 발달에 따른 인간과 자연 , 또는 인간과 신 관계의 재구성이다 . 말하자면 , 비바람 맞으며 야수에 쫓기던 삶에서 집을 짓고 들어앉아 안전을 꾀하는 삶으로의 변화다 . 이제 그들을 지켜주는 것은 거대한 자연신보다 마을신과 가택신과 농경신 , 또는 사랑의 신과 의술의 신 같은 문명신들이다 . 그렇게 태초의 거인신은 역사 저편으로 물러갔던 것이다 .
이러한 문명사적 과정은 그리스 신화에 생생하게 잘 담겨 있다 . 태초의 혼돈에 이어서 탄생한 가이아와 우라노스 , 닉스 등은 원초적 자연신의 면모를 지닌다 . 압도적인 힘을 가진 거대한 신이다 . 그 신들의 시대에 있어서 하늘이나 땅은 , 또는 어둠은 하나의 거대한 전체였다고 할 수 있다 . 일컬어 원시적 대자연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상황은 변한다 . 가이아와 우라노스로부터 수많은 거인과 괴물들이 탄생하며 , 밤의 여신 닉스로부터 다른 수많은 신들이 태어난다 . 그렇게 분화된 자연신들은 아직 거칠고 큰 존재였으니 신화는 이를 티탄 (titan), 곧 ‘ 거인 ’ 으로 표현한다 . 초기 단계의 재구성이다 .
신화는 티탄족에 속하는 크로노스가 아버지 우라노스를 거세하고 세계의 주도권을 획득했다고 말한다 . 하지만 그 또한 자식에 의해 죽을 운명이었다 . 그는 자식들을 통째로 삼켜버리지만 세상의 변화를 길이 거스를 수는 없었다 . 우라노스의 여섯째 아들이었던 크로노스는 자신의 여섯째 아들이었던 제우스의 공격을 받고서 삼켰던 자식들을 토해낸 뒤 아득히 유폐된다 . 이 세상은 , 또는 인간은 시대에 맞는 새로운 신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의 여러 신들이 세계를 주재하게 된 데는 그러한 문명사적 곡절이 반영돼 있다 . 이야기에서 크로노스나 제우스가 맏이가 아닌 막내 쪽인 것은 ‘ 젊고 새로운 힘 ’ 의 역할을 표상한다 . 사람들은 원시의 크고 거친 힘에 대하여 다양한 직능별 분화를 이룬 새로운 신적 질서를 추구했던 것이다 . 그 일련의 신화사에 자연의 큰 힘과 맞서 싸우면서 삶의 길을 개척해온 인간의 문명사가 함축돼 있다는 관점이다 .
잘 알듯이 제우스는 벼락을 부리는 존재로서 , 그 자신 한 명의 큰 자연신이다 . 제우스는 신들을 통솔하며 인간을 보살피는 한편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간을 침탈하거니와 그 형상에는 자연의 양면성이 반영돼 있다 . 포세이돈이나 아폴론 같은 다른 신들 또한 마찬가지다 . 사람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따르지만 , 그 또한 영원한 것이라 할 바가 아니다 . 많은 사람들이 제우스보다 아프로디테나 에로스 , 디오니소스 등에 이끌려 그를 따르는 것은 , 또는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 지그프리트 같은 영웅에 열광하고 프쉬케나 나르시소스 ,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등의 인간적 서사에 공명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21 세기에 접어든 오늘날 그 신의 자리는 BTS 같은 새로운 ‘ 아이돌 (idol)’ 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또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나 카카오의 김범수 같은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 …… .
여기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태초의 거대한 창조신이나 거인 등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반고나 티아마트 , 타아로가 등은 자연만물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 그들이 크게 힘을 내면 세상은 요동한다 . 북유럽 신화 속의 태초 거인 이미르는 죽임을 당하지만 , 그 자손들 중 한 명 ( 베르길미르 ) 은 살아남아서 또 다른 수많은 거인들을 낳는다 . 그리스 신화 속의 크로노스도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다 . 그에 앞선 대지의 신 가이아 (Gaia) 도 ! 한국 신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태초의 거인신 미륵은 죽지 않고 사라졌을 따름이다 . 대모신 마고나 설문대할망 또한 대자연 속에 큰 힘으로 깃들어 있다 .
요컨대 , 문명의 역사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구성했다는 것은 단지 부분적인 진실일 따름이다 . 인간이 감히 자연 앞에 오만해질 때 , 자연을 충분히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할 때 , 대재앙은 불시에 도래할 수 있다 . 인간의 생명적 투쟁은 자연의 큰 체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언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
자연의 재앙 , 운명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자연의 재앙은 맞닥뜨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히 피할 수 없는 무엇이다 . 혹은 인간의 잘못에 의해서 , 혹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본원적 힘에 의해서 자연 재해는 불현듯 우리 사는 세상을 덮치곤 한다 . 그때 인간이 할 일은 ? 맞서 싸워서 살아남는 일이다 .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생명의 법칙이다 .
세계 신화 속에는 자연에 맞선 싸움의 내력을 다양한 상징적 서사로 담고 있다 . 먼저 볼 것은 최초의 신화로 일컬어지는 길가메시 서사시다 . 이 신화에서 특별히 주목할 대목은 ‘ 하늘 황소 ’ 에 대한 부분이다 . 신화는 전쟁의 여신이자 하늘과 땅의 여왕인 이쉬타르가 영웅 길가메시 왕에게 구애했다가 보기좋게 퇴짜를 맞는 내용이 나온다 . 그것은 인간이 자연신을 얕보고 밀쳐낸 일이었거니와 , 신의 복수로 이어진다 . 이쉬타르가 하늘신 아누로부터 하늘 황소를 받아서 지상으로 내려오자 숲이 마르고 꽃밭과 풀밭이 말라버린다 . 황소가 유프라테스 강물을 마시자 바닥을 드러낼 지경이 되고 , 콧김을 내쉬자 땅에 구멍이 나서 사람들이 함몰한다 . 세상에 재앙을 가져온 이 황소의 정체는 무엇일까 ? 나는 그것이 명백하게 대가뭄의 상징이라고 보고 있다 . 하늘은 감히 자신을 능멸한 인간에게 무시무시한 응보를 내린 것이다 . 오늘날의 온난화에 따른 이상기후와 재앙을 연상시키는 서사다 .
신화는 길가메시가 친구인 엔키두와 더불어 영웅적인 활약으로 하늘 황소를 도륙해서 재앙을 없앴다고 말한다 . 자연 재앙을 이겨낸 영도자의 대업적에 대한 존숭과 찬양의 서사다 . 자연의 압도적 힘에 맞서서 그것을 이겨냈으니 , 신의 공격을 보란 듯이 물리쳤으니 기념비적 승리임에 분명하다 .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한 것이었을 리 없다 . 수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구멍 ( 씽크홀 ) 에 함몰됐다고 하지 않는가 . 어쩌면 그것은 상처가 더 컸던 쓰라린 영광이었을 수 있다 . 자연에 맞서서 삶을 지켜낸다는 것은 얼마나 엄중한 일인지 …… .
자연적 재앙에 맞서 그것을 이겨낸 이야기로는 한국에도 인상적인 자료들이 있다 . 흑룡에 얽힌 백두산 지역의 신화적 전설을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 이야기는 땅속으로부터 흑룡이 솟아나서 불칼을 휘두르자 물길이 막혀서 사람들이 살 수 없게 됐다고 한다 . 흑룡이 해를 삼키는 바람에 오래도록 암흑세상이 이어졌다고도 한다 . 이때 흑룡은 명백히 화산 ( 火山 ) 의 표상이다 . 화산의 폭발로 검은 연기가 솟아올라 세상이 깜깜해지고 용암과 화산재가 대지를 뒤덮어버린 상황이다 . 사람들이 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이다 .
모두가 살길을 찾아 그곳을 떠날 때 감히 흑룡과 맞선 영웅이 있었으니 , 백장군이라는 이름의 인간이었다 . 그는 삽으로 땅을 파서 덮여버린 물길을 찾아내고 , 흑룡의 불칼을 멈추기 위해 분투한다 . 죽음을 무릅쓴 절체절명의 싸움이었다 . 백장군은 불칼에 찔려 쓰러진 위기를 가까스로 극복하고 마침내 거대한 물길을 찾아냈으니 , 그것이 곧 백두산 천지 ( 天池 ) 라고 한다 . 감히 화산에 맞서는 인간이라니 , 장렬한 투쟁의 서사가 아닐 수 없다 . 삶의 터전을 스스로 지키고 개척하는 것은 인간의 신성한 소명인 터 , 이 이야기는 한 편의 신화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 인간의 신화 !
하지만 자연 재앙은 무작정 맞서 싸우는 것이 답은 아니다 . 부딪칠 때는 부딪치되 물러설 때는 물러서는 것이 옳다 . 이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제주도의 외눈박이 거인 전설을 들 수 있다 . 이야기에 의하면 먼 바다에 사는 외눈박이 거인들은 어부들의 배를 휩쓸어 사정없이 박살낸다고 한다 . 어부들의 수호신인 영등할망이 겨우 사람들을 구한 뒤 거인에 의해 산산히 찢겨 죽었다고도 한다 . 이 외눈박이 거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 거대한 하나의 눈을 가진 거대한 괴물 . 그것은 명백히 ‘ 태풍 ’ 의 표상이다 . 감히 배를 몰고서 거기 근접하는 것은 자살행위일 따름이다 . 어떤 신령한 수호신도 그 괴물을 이길 수 없다 . 꽁꽁 피하고 숨어서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다 . ‘ 시간 ’ 이라고 하는 자연적 순리를 믿으면서 . 영원히 이어지는 재앙은 없는 법이다 . 스스로 그 속으로 들어가 파괴되지 않는다면 ‥‥ .
드래곤 또는 호랑이라는 신과의 대면
백두산 전설 속의 흑룡은 좀 특별한 존재다 . 동양에서 용은 대개 신성한 존재인데 , 흑룡은 특별히 악귀처럼 말해진다 . 정확히 말하면 ‘ 악신 ( 惡神 )’ 이다 . 인간의 삶의 터전을 마구 헤집어놓는 파괴적 존재이기에 물리침의 대상으로 사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흥미로운 것은 그 이미지가 서양의 용 [ 드래곤 , dragon] 과 통한다는 사실이다 . 서구 신화나 전설 , 판타지 속의 용은 동양의 경우와 달리 대부분 악룡 ( 惡龍 ) 으로서 , 퇴치해야 할 괴물적인 존재다 . 많은 영웅서사가 용과의 치열한 싸움을 서사화하여 전한다 .
흑룡에 얽힌 한국의 신화적 전승은 서구의 영웅서사 속의 용들이 태초의 거인과 마찬가지로 크고 거친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 불을 뿜어대는 용의 이미지는 숲과 강물을 말리는 하늘 황소의 이미지와 밀접히 통한다 . 서양의 용은 흔히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로 묘사되는데 , 이는 예측 불가한 자연의 다면성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 용에 대해서 이를 ‘ 번개 ’ 의 상징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 형상과 특징이 다양한 것을 생각하면 또 다른 여러 자연적 힘과 연결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
용을 물리친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는 게르만 신화의 지그프리트 이야기를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 이야기 속의 용은 흑화된 인간으로 말해지고 괴물 짐승에 가까운 형상으로 묘사되지만 , 야생적 자연의 상징으로 볼 만한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다 . 황금보화를 꽁꽁 숨긴 채 인간의 접근을 막는 용의 모습은 거친 험산을 연상시킨다 . 이야기는 지그프리트가 용을 죽이고 심장을 맛보자 그위 귀에 새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 설화에서 동물의 말소리를 듣는 일은 대개 ‘ 자연의 목소리 ’ 를 듣는 일을 뜻하는바 , 용의 심장은 자연의 생명체계를 응축한 정수 ( 精髓 ) 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 용의 심장을 먹음으로써 , 그리고 용의 피에 온몸을 적심으로써 지그프리트는 ‘ 자연을 정복한 자 ’ 로서 크나큰 힘을 갖게 된다 . 하지만 그의 ‘ 정복 ’ 은 완전한 것일 수 없었다 . 용의 피가 용납하지 않은 틈이 있었고 지그프리트는 그곳을 찔려서 처참하게 죽고 만다 . 이를 두고 자연을 이길 수 없는 인간의 본원적 숙명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 ‘ 죽음 ’ 도 하나의 자연이라고 보면 무리한 해석은 아닐 것이다 . 하나의 논쟁적 화두로 던져 둔다 .
한국에서 자연의 거칠고 큰 힘을 상징하는 존재로는 용보다 호랑이가 더 일반적이다 . 신화와 전설에서 호랑이의 다른 이름은 바로 ‘ 산신령 ’ 이다 . 호랑이는 산에 사는 무서운 존재인 동시에 산의 크고 신성한 힘을 상징하는 존재로 사유되어 왔다 . 한국의 수많은 산신당이나 산신각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 또는 할머니 ) 가 커다란 호랑이를 끼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거니와 , 그림 속의 노인과 호랑이는 한 존재의 두 모습이라 할 수 있다 . 노인은 사람을 살리고 보호하는 자비로운 힘을 나타낸다면 , 호랑이는 사람을 공격해서 죽일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상징한다 . 자연의 상반된 두 얼굴이다 .
너그러운 할아버지 같은 자연을 만났을 때는 ,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 자연이 내어주고 지켜주는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서 허리를 굽혀 절하면 된다 . 이때 한 가지 주의할 바는 필요한 것 이상으로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 .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는 베풂은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언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 예컨대 산속의 나무들은 때가 되면 인간에게 좋은 잎새와 꽃 , 열매 등을 전해주지만 뿌리째 뽑아버릴 경우 그러한 베풂은 지속될 수 없다 . 오히려 호랑이 모습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 말하자면 산사태 같은 .
문제는 불시에 호랑이를 만났을 때다 . 호랑이로서의 파괴적 자연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맨몸으로 맞서서 호랑이와 싸운다 ? 이는 전설과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따름이다 . 인간이 감히 호랑이를 이길 수는 없다 . 그렇다면 , 급히 꽁무니를 빼서 도망친다 ? 이 또한 답이라 하기 어렵다 . 자연은 겉보기에 느려 보이지만 인간이 그를 앞설 수는 없다 . 호랑이는 도망치는 사람을 훌쩍 뛰어넘어 그 앞을 가로막는다 . 그렇다면 , 방법은 ? 꽤나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 현지조사 과정에서 강원도 고성 소똥령 지역에서 만난 한 어르신의 말로 대신한다 .
― “ 예로부터 말하길 , 사람이 호랑이 앞에 서면 죽고 뒤를 따르면 산다고 했어요 .”
이 말을 듣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 자연에 앞서려고 하기보다 , 자연을 내 식으로 함부려 놀리려 하기보다 조용히 뒤를 따르는 것이 답이다 . 순리에 따라 존중하면서 움직이면 , 호랑이 / 자연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려줄 수 있다 . 그냥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다 . 본원적 이치에 따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 산에서 만난 호랑이가 자기를 ‘ 형님 ’ 이라고 부른 나무꾼을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허튼 공상으로 치부할 바가 아니다 . 자연은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 할아버지나 어머니로 부르고 형님으로 부르며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살 길을 마련해 준다 . 한국의 유명한 신화 < 바리공주 > 에는 바리가 험지에서 만난 호랑이 앞으로 다가가서 절을 올리는 장면이 있다 . 그러자 호랑이는 산신령으로 변해서 꽃을 전해준다 . 어떤 험지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꽃을 . 자연과의 싸움은 이렇게 해야 하는 법이다 .
내 마음 속의 가뭄과 화산 , 그리고 호랑이
자연의 다면성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생각 또한 여러 갈래로 움직인다 . 앞뒤가 잘 안 맞는 글이 되어 가는 것 같기도 하다 . 그 또한 자연의 양면성일 수 있다고 강변해 본다 . ‘ 나 ’ 라고 하는 존재 또한 여러 얼굴을 가진 , 엇갈리는 수많은 마음을 가진 하나의 자연이라는 의미로서 .
우리의 치유적 화두인 ‘ 자기서사 ’ 로 돌아와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해 본다 . 이전 글들에서 태초의 창조신이 , 타아로가와 티아마트와 이미르가 , 미륵과 반고가 곧 나 자신이라고 했었다 . 내 안에 원초적인 자연적 생명이 숨쉰다는 뜻이다 . 하지만 어찌 충만한 생명뿐일까 . 그 안에는 거친 격동과 쓰린 쓰러짐과 아득한 소멸이 있다 . 불현듯 공격해온 하늘 황소에 생기를 잃고 비트적거리며 , 뿜어져 나온 화산재와 용암으로 까맣게 마음이 뒤덮인다 .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온 존재를 뒤흔드는 일이 다반사다 . 어둠 속을 어슬렁거리던 호랑이가 훌쩍 튀어나와서 발톱을 세우고 으르렁대기도 한다 . 어흥 ……
대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 이 또한 나의 엄연한 본질이다 . 감출 수도 , 피할 수도 없는 . 하지만 그것은 제 맘대로 날뛰거나 퍼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 나의 생명적 가치를 오롯이 지키고 발현하기 위해서 , 나는 그것과 맞서 싸워야 한다 . 치열한 싸움을 통해서 본원적인 평화와 복락을 이루어내야 한다 . 그 초극 ( 超克 ) 의 과업이 본연의 신적 순리를 따라서 조화롭게 성취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 힘든 일이지만 가능할 것으로 믿는다 . 세상의 모든 신화들이 꺼지지 않는 등불로서 길을 비춰주고 있으니 .
신동흔 /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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