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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라그나로크’와 붓다의 ‘니르바나’가 일러주는 것

등록 2022-08-01 12:39수정 2022-08-01 13:31

웹소설의 전설 ‘전지적 독자 시점’ 읽으며
삶이란 이야기의 끝에 무엇이 있나 사유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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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끝과 이야기의 끝

한여름 무더위에 흐트러진 컨디션과 느슨해진 일정을 틈타 오래 미루었던 독서를 시작했다. 대상은 웹소설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대하 판타지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이었다. 중간에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했으나 에필로그까지의 완주를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기상천외한 설정과 갖가지 삽화들의 정교하고 극적인 접속은 사람들이 작품에 열광하는 이유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듯했다. 어쩌면 전설을 넘어서 ‘신화급’이 될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거듭 정주행하는 수많은 마니아에게는 이미 최고의 신화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작품에서 무척 흥미롭게 느낀 것은 설화(說話)에 대한 담론이었다. 작품은 사람이 곧 설화라고 말한다. 인물들은 크고 멋진 설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삶의 가치이자 목표로 삼는다. 그들의 삶의 여정은 설화를 써나가는 과정에 해당한다. 혹시라도 부상을 당하면 상처에서 설화의 파편들이 피처럼 흘러나온다. 치료를 위해서는 ‘설화 팩’을 투여해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자기의 설화를 지키고 확장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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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설정이 한국 문학치료학의 인간론과 너무나 흡사해서 놀라웠다. 문학치료학은 인간을 곧 서사로 보며, 인생이란 자신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써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삶의 이면적 실체에 해당하는 그 이야기를 일컫는 말이 ‘자기서사’다. ‘전독시’에서 ‘설화’라고 칭한 그것이다. 한 사람의 자기서사는 단순치 않다. 갖가지 작은 이야기들이 다층적으로 얽혀 크고 복합적인 이야기를 이룬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야기의 종결 또는 종말이다. “그렇게 오래오래 잘 살았습니다” 하는 서술이 서사의 진짜 끝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사는 것’으로 끝나는 인생이란 없다. 그 뒤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따른다. 이야기의 실제 결말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죽어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깜깜하고 아득한 심연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 종말 앞에서 누군가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온 이야기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야기의 끝이란 결국 파멸이고 공허가 아닌가 말이다. 이 신화적 의문에 대하여 세계의 신화가 전하는 답변은 동일하지 않다. 극과 극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이제 그 이야기들을, 서사의 종말에 대한 서로 다른 서사들을 만나보기로 한다.

■  라그나로크…서사의 충돌과 파괴

세계 다수 신화들은 이 세상의 종말을 환란과 재앙으로 그려낸다. 그중에도 강렬하고 인상적인 것으로는 북유럽 신화가 말하는 ‘라그나로크(Ragnarǫk)’를 들 수 있다. 일컬어 ‘신들의 운명’이다. 라그나로크의 대환란은 신들도 피할 수 없었으니, 최고 신을 포함 모든 신이 죽어서 쓰러진다. ‘완전한 대절멸’이라고 할 만한 가차 없는 서사다.

봄이 영영 찾아오지 않고 겨울이 끝없이 계속되는 가운데, 사람들은 야수로 변해 서로를 잡아먹는다. 암흑으로 뒤덮인 땅이 크게 흔들리면서 거대한 늑대 펜리르가 봉인에서 풀려나 커다란 입으로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바다에서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가 나타나 독액을 뿜어내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재앙은 하늘에서도 온다. 안개로 가득한 하늘이 갈라지면서 불의 거인 수르트가 무스펠의 자손들을 거느리고 내려와 모든 곳을 숯과 재로 만든다. 절벽이 바닷속으로 무너지면서 유폐됐던 로키가 헬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무자비한 파괴에 가담하면서 재앙은 극에 달한다.

신들의 문지기 헤임달이 뿔피리를 불어서 대재앙의 도래를 알리자 잠자고 있던 신들이 깨어난다. 그 선두에 선 존재는 최고 신 오딘과 토르, 프레이 등이다. 이들은 재앙에 맞서 분투하지만 닥쳐온 종말을 막지 못한다.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었다. 오딘은 펜리르의 입에 창을 찔러넣지만 그 입속에서 창과 함께 바스러진다. 토르는 묠니르로 요르문간드의 머리를 박살낸 뒤 그 입에서 뿜어져 나온 독을 피하지 못하고 고통 속에 쓰러진다. 프레이도 수르트가 휘두른 불칼의 제물이 된다. 수르트의 불은 거인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다. 마침내 그 자신까지도 불에 타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두는 죽고 우주는 닫힌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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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나로크가 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이다. 그런데 그 서사는 나에게 한 인간의 종말로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인간이 곧 서사라고 할 때, 인간의 죽음은 곧 서사의 죽음이다. 라그나로크의 신화에서 우리 안의 수많은 서사들이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어떻게 몸부림치며 부딪치다가 쓰러지는지를 생생히 본다. 무의식 깊이 억압돼 있던 서사─거인과 괴물, 짐승의 서사─가 통제를 깨고 풀려나와 크고 험한 본모습을 드러내며 날뛴다. 우리 존재를 지켜오던 서사─수호신들의 서사─가 그에 맞서 움직이면서 최후의 대충돌이 펼쳐진다. 그렇게 펼쳐지는 대환란의 절멸…. ‘죽음’ 앞에 살아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그나로크가 그려내는 종말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고 허망하다. 그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존재적 진실이다. 죽음에 직면할 때의 내면서사의 격동은 족히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모든 움직임’을 다할 것이다. 그러다가 속절없이 잦아들 것이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처음 존재가 시작된 그곳, 끝 모를 혼돈 속으로.

■  니르바나…서사의 원융과 초탈

라그나로크 신화를 곱씹으면서 내 안의 서사를 반추해 본다. 거기에 펜리르나 요르문간드처럼, 또는 수르트나 로키처럼 충돌과 파괴의 환란을 가져올 서사가 내재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삶의 끝이 라그나로크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환란이 시작되었을 수 있다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과연 나의 서사는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는가’ 하는 자문(自問)에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하고 힘써 자답(自答)해 본다. 어느 곳엔가 갈림길이 있는 것이,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서사의 세계일 것이므로.

풀리지 않은 채 웅크린 서사들이 준동해서 충돌과 파괴의 종말로 나아가는 것과 상반되는 하나의 큰길을 ‘니르바나(Nirvana·涅槃)’의 서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일찍이 석가모니 붓다가 나아갔고 수많은 수행자가 찾아 나아가고 있는 길이다. 생로병사의 질곡과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아픔을 누구보다 무겁게 느끼면서 그에 대한 싸움을 치열하게 이어나갔던 싯닷타가 도달한 서사의 궁극은 제반 서사의 원융적 초탈이었다. 자신의 삶의 실체를 이루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풀려나 벗어남(解脫)’을 통해 그는 존재의 새 단계로 나아간다. 그 풀어냄의 핵심 대상은 자기서사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찾아내고 살아온 모든 서사부터의 자유! 그렇게 또 하나의 ‘궁극의 서사’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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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다만 그가 삶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거쳤던 마지막 싸움의 과정을 잠깐 보기로 한다. <본생경>(Jakata)의 서두에 해당하는 ‘세 가지 인연 이야기’는 붓다가 출가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과정을 전하는 전기적 기록인데, 이야기는 성불에 도달하는 고비 부분에 마왕 및 그 딸들과의 싸움에 대한 내용을 배치하고 있다. 라그나로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의 내부에서 이루어진 서사적 여정으로 볼 수 있는 무엇이다.

먼저 마왕 천자가 거대한 코끼리에 올라탄 채 천개의 팔에 갖은 무기를 들고서 수행자를 위협한다. 자기서사로 풀이하면 마음속에 내재한 분노와 폭력, 갈등과 공격의 서사의 마지막 준동이라 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공격이었지만 그것은 수행자를 조금도 침노시키지 못한다. 흉포한 바람은 그의 옷자락 끝도 흔들지 못하며, 바윗덩이와 칼날, 숯덩이와 모래 등은 꽃으로 변하여 사뿐히 내려앉는다. 수행자 싯닷타는 이미 그와 같은 종류의 어둠의 서사에 대해 집착의 굴레를 훌쩍 넘어선 것이었다. 결국 거대한 코끼리는 무릎을 꿇고, 마왕의 권속은 흩어져 달아난다.

그 뒤를 이은 최후의 싸움이 ‘마녀의 유혹’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각각 탕하(탐욕)와 아라티(혐오감), 라가(애염)의 이름을 가진 마왕의 세 딸이 수행자를 결박하기 위해 찾아온다. 인간이 못내 떨치기 어려운 ‘애욕의 서사’의 전방위적 공격이다. 존재를 흔들 만한 갖가지 유혹으로 다가온 그 서사를 붓다는 가볍게 떨쳐낸다. 아니, 풀어낸다. 그는 애욕의 굴레조차 훌쩍 넘어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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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불은 이루어지고, 수행자의 서사는 ‘니르바나’로 완성된다. 그 서사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미 서사를 벗어났으니 죽음이 없으며, 업이 없으니 회귀(윤회)도 없다. 영원한 자유와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무(無)의 서사’가 주는 한없는 무게감! 라그나로크의 서사도 니르바나의 서사 앞에서는 하나의 깃털에 불과할지 모른다.

■  나의 길과 요한계시록의 길

니르바나의 서사는 붓다가 평생에 거친, 아니 억겁의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싸움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경지였다. 그것은 나의 몸이 가히 미치지 못할 아득한 저편에 있다. 언제라도 흩어질 수 있는 미약한 마음만이 그것을 멀리 건너다보고 있을 따름이다. 어디인가 하면 라그나로크로 향하는 길 위에서. 두 길 사이에 놓인 것은 죽음만큼 깊은 서사적 심연이다.

그 심연을 어떻게 해야 건너갈 수 있을까? 건너기의 시도가 가능하기는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서사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사의 세계에서 서로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 길이란 없다. 우리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니 찾아 나가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 하나의 서사적 답을 붓다 자신의 삶에서 찾는다. 붓다는 저절로 니르바나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많은 라그나로크의 서사를 거친 결과였다. 마왕 천자 및 마녀들과의 싸움은 그 작은 끝자락이었거니와, <본생경> 본편은 그에 선행한 지난한 싸움의 과정을 무수한 전생 사연으로 전한다. 그 싸움에서 붓다는 늘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무참히 패하여 쓰라리게 무너진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감으로써 그는 마침내 심연을 넘어선 것이었다.

또 하나의 답으로 다가오는 것은 성경 속 요한계시록 서사다. 계시록의 대부분이 말하는 것은 대환란과 재앙, 사멸에 대한 내용이다. 색색의 말(馬)이 퍼뜨리는 폭력과 불의와 역병…. 천사의 나팔을 신호로 삼아 불타 무너지는 세상과 스러지는 생명들…. 머리 일곱 달린 적룡과 뿔 달린 짐승들의 파괴적 발호…. 스스로 죄의 굴레에 빠져든 인간에 대한 신의 심판과 죽음…. 그렇게 이 세상은 지옥의 땅 ‘아마겟돈’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서사의 끝이 아닌 과정이었다. ‘하느님 나라’로 표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위한 과정이었다. 자기서사로 풀이하면, ‘내 마음속의 천국’을 이루어내기 위한 내적 투쟁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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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지옥과 천국 사이에 길은 있다. 돌아보면 바리데기 또한 지옥에서 극락을 열었었다. 그 서사적 이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행’이다. 깨우침이 선행되고 의지(意志)가 작동해야 하지만, 이는 작은 단초일 뿐이다. 몸을 움직여 나아가지 않으면 허튼 공염불일 따름이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 죽음이다. 헤임달이 뿔피리를 불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미리 길을 찾아서 나아가고 있지 않으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아가 있지 않으면 펜리르와 요르문간드의 발호를, 또는 마왕과 마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다. 내 안의 라그나로크를 면할 수 없다.

라그나로크의 길을 벗어나 니르바나의 길로 나아가기 위하여, 내 마음속의 지옥을 허물고 천국을 펼쳐내기 위하여 지금 어디로 어떤 발자국을 내디뎌야 할지를, 나서서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나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지금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늘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일이다.

신동흔(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한국문학치료학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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